[칼럼] 광주의 천재시인 허난설헌 콘텐츠의 세계화 과제
[칼럼] 광주의 천재시인 허난설헌 콘텐츠의 세계화 과제
  • 이창봉 시인
  • 승인 2021.08.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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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광주] 이창봉 시인/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 = 필자는 현재 예술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예술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몇 해 전 허난설헌의 한시를 현대시로 번역, 강의시간에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관점에서 강의하면서 허난설헌 시예술의 세계에 흠뻑 빠져 학생들과 함께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더군다나 그녀가 강릉에서 출생해 필자가 사는 광주로 시집 와서 시를 썼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시인 이창봉 교수

그리고 노력 끝에 광주시민대학에 인문인물학 허난설헌 강좌를 새로 만들고 광주시민들을 모아서 7월에 강의를 마쳤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광주시민 여러분들이 허난설헌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그녀의 삶과 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을 받았었다. 그리고 협력해서 허난설헌을 지역문화로 진흥시키기 위한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허난설헌 지키기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중섭, 헤밍웨이, 허난설헌 문화 콘텐츠

우리가 좋아하는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은 1951년 아내 마사코와 함께 제주도로 건너가서 짧은 기간 산 적이 있다. 그해 12월 다시 부산 범일동으로 귀환, 동포마을 변전소 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이중섭과 아내는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시 살았던 서귀포시에는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는 1.4평 크기의 단칸방이 있다.

가족이 살았던 방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좁고 허름하다.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간 그의 예술혼을 느끼고 싶어서일까, 이 이중섭 거리가 있는 서귀포시 하영올레 2코스는 제주 관광객의 31%가 걷는 대표적인 문화거리가 됐다.

외국의 예가 하나 떠오른다. 프랑스 파리에는 소르본 대학을 지나 라탱 지구(Quartier Latin)를 천천히 걷다 보면 헤밍웨이 거리인 무프타르(Mouffetard) 거리가 있다. 무프타르는 2천년 전부터 있었던 파리의 가장 오래된 거리다. 이 비좁은 거리 카르디난 르무안가 74번지 허름한 아파트 3층에서 헤밍웨이는 1922년에서 1923년까지 신혼살림을 살았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콩트르스카르프(Contrescarpe) 광장에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와 만나 차를 마시고 문학을 이야기했었다. 파리를 여행하다 보면 그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의 불꽃같은 예술혼에 잠시 감전이라도 될 것 같은 거리. 그 거리를 필자를 포함해서 관광객과 수많은 파리지앵들이 걷는다.

필자가 사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는 1563년 강릉에서 출생, 15살에 광주에 사는 안동 김씨 김성립에게 시집와서 비운의 삶 속에서 시를 쓰다가 27살에 생을 마감한 최초의 한류 예술가 천재시인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다.

허난설헌(1563-1589)

그녀는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장편 시를 지었었다. 이 글은 하늘의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에 대해서 그녀만의 상상을 동원해서 지은 시다. 여덟 살 신동이 지은 이 글은 지역은 물론 장안에까지 나돌아 그녀의 천재적 시재가 인정받았다. 훗날 정조도 이를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난봉꾼이었던 남편 김성립과의 갈등, 봉건주의 시대의 남존여비 사상, 자식을 모두 잃는 슬픔, 친정이 몰락하는 고통과 절망의 삶을 시로 승화시키며 살다가 27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허난설헌의 시는 그녀보다 여섯 살 아래 동생,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도 애송했었다. 뒷날 이 시들은 고스란히 중국에 전해졌고, 그리고 다시 일본에 전해져 학자와 문장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과 일본의 독자들은 그녀의 시를 읽고 극찬했고 현대에 와서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그녀의 시를 읽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이렇듯 세계가 극찬한 최초의 한류 예술인, 조선의 허난설헌이 잠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앞서 소개한 이중섭과 헤밍웨이의 경우, 1년 남짓 살았던 도시들에서 두 예술가를 그들 도시의 문화인물로 추앙, 거리를 조성하고 공간 스토리텔링 등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예술과 문화에 목마른 대중의 발길을 끌며 문화경제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런 모습에 비해 허난설헌은 너무도 초라하게 잠들어 있다.

광주인물 허난설헌 지키기

강릉의 한 학자는 “작은 소원을 풀어 준다면, 경기도 시댁 묘소에 외롭게 있는 그분의 묘소를 그토록 그리워했던 강릉 땅 친정 생가 터로 옮겨 오는 일이다”(교산난설헌학회장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중)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천재 여류시인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필자는 그녀가 고통스런 시집살이를 했던 광주에서의 삶은 고통의 삶을 시로 승화한 시 예술의 ‘승화기’로 표현해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이 시기를 그녀의 예술의 ‘낙화기’로 보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강릉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이제 광주인 스스로 함께 한마음으로 협력해서 우리 고장의 보물인 허난설헌의 스토리 콘텐츠를 지켜야 한다. 앞서 예를 든 두 인물의 도시 문화 콘텐츠를 벤치마킹해서라도 허난설헌은 광주의 인물로 지키고 기념해야 한다.

필자는 몇몇 예술가, 문화계 인사들과 오는 8월 27일 광주시 생골문화마을에서 허난설헌의 시를 현대적으로 번역한 시극제 <초희 날다>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광주인물 허난설헌을 우리 손으로 지키고 광주의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 나가는 작은 밀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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