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7 뮤직홀(3)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7 뮤직홀(3)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0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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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 음악
뮤직 홀 쇼(출처 : unrestrictedtheatre.co.uk)
뮤직 홀 쇼(출처 : unrestrictedtheatre.co.uk)

뮤직 홀의 프로그램은 산업혁명 이전의 오락들, 즉 펍, 플레저 가든, 페니 개프, 갤러리, 거리오락, 유곽, 페어(Fair, 일년에 한번씩 열리던 엔테테인먼트 이벤트), 강당과 학교강의 등의 전통오락과 유랑극단의 노래와 춤 등 온갖 대중문화가 결합한 것이다. 런던은 상업적 재능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의 형식안에 흡수하였다(Peter Bailey, 『Music Hall: Business of Pleasure』 ). 이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민스트럴 쇼 등 흑인문화, 유럽의 대륙문화,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대중연극 등을 받아들였고, 반대로 뮤직 홀 문화를 이들 나라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버라이어티

찰리 채플린의 <뮤직홀의 밤(A Night in the Show)>이라는 무성영화에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없는 뱀쇼, 불 먹기(fire eating)등의 쇼가 등장한다. 뮤직 홀에서는 고급예술에서부터 대중예술까지, 클래식 음악에서 행상들의 노래까지, 코믹한 쇼에서 교육적인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공연했다. 각종 서커스, 칼 던지기, 칼 삼키기, 힘겨루기, 마술, 짧은 드라마(sketch), 기형쇼, 동물쇼, 인형극, 판토마임, 디오라마, 복화술, 캉캉, 발레, 자전거 묘기, 스케이트 묘기, 강연 등등 모든 프로그램이 가능했다.

뮤직 홀의 효시로 알려진 스타 홀의 1840년대 프로그램은 기형쇼, 동물쇼, 복화술, 저글링, 아크로바틱 등 이미 음악 이외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공연하였다. 노래살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뮤직 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음악에 한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음악만을 공연하다가 나중에 버라이어티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버라이어티한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19세기 중반, 대중들의 관심은 센세이셔널한 공연에 있었고 센세이션은 당시 뮤직 홀의 유행어였다. 보다 새롭고 충격적인 프로그램, 스펙터클한 드라마와 자극적인 쇼들이 인기를 끌었다. 위험한 서커스, 예를 들면 블론딘과 레오파드의 센세이셔널한 서커스 묘기들은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다. 그러자 여성 블론딘까지도 등장한다. 센세이션과 스펙터클은 전가의 보도였다. 1910년대에 신디케이트 때문에 작은 뮤직 홀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들은 다시 센세이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뮤직 홀 프로그램은 1860년대에 완성되어 30여년간 지속되다가 1890년대에 들어와 버라이어티 연극으로 이름을 바꾼다.

뮤직 홀은 노래살롱에서 출발하였지만 노래살롱과 차별화되는 다른 새로운 콘텐츠를 보여주어야 했다. 찰스 모튼이 뮤직 홀이라는 이름을 쓴 것도 기존의 펍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공연장 분위기도 펍과는 다른 세련되고 정돈된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 그래서 모튼은 모든 출연자들에게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도록 지시했다. 모튼의 개인적 취향도 있었지만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영국에서 처음 연주한 일 역시 전통적인 펍과 다른 뮤직 홀의 세련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셰필드의 토마스 유단도 오페라 아리아를 삽입하곤 했다. 오페라를 삽입하는 건 중류층의 기호에 맞게 ‘합리적 오락’을 제공하려는 의도였고, 당시만 해도 오페라는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클래식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프로그램 논란

뮤직 홀은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으로 프로그램의 내용은 매우 중요했다. 확장된 펍 정도로만 생각해 왔지만 그 영향력의 크기를 감안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계급적 오락이었던 뮤직 홀의 주요관객층은 젊은 남성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외설적 장면이 많이 등장하여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비판이 많았다. 또한 홀내에서의 음주와 매춘을 조장하는 공간이라는 부정적 인식으로 인한 사회적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정작 제도적 통제는 189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합리적 오락(Rational Recreation)’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공권력에 의한 제도적 통제는 1888년에 지방정부법이 제정되고 런던시의회(LCC)가 출범하면서 18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글래드스톤 정부하의 LCC는 매우 진보적 조직으로 뮤직 홀의 개혁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민사회로부터는 뮤직 홀 프로그램이 지적이고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불만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런던시의회는 그 동안 시종장관(Lord Chamberlain)이 가지고 있던 뮤직 홀 인허가권을 양도받았고, 이를 활용하여 강력한 개혁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경영자들도 자율적인 규제를 취하기 시작한다. 성적 암시를 담은 이중적 의미의 외설적 코미디(이를 더블 앙탕드르 double entendre라고 하였다)를 하는 배우는 즉각 해고, 개런티 몰수 등의 조치를 취했다. 왕실, 경찰, 종교지도자 등에 대한 비방도 징계대상이었다.

브로드사이드 발라드(출처 : press.encimprint.english.ucsb.edu)
브로드사이드 발라드(출처 : press.encimprint.english.ucsb.edu)

이런 개혁적 조치들은 오히려 관객증대에 기여한다. 1890년대에 35개의 런던의 뮤직 홀 입장객은 천 4백만 명에 이르렀다. 관객구성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오락을 온 가족오락으로 바꾸려 한 LCC의 개혁의 성과였다. 이 개혁은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홀의 구조개혁, 즉 건축물의 개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홀의 구조가 근대적으로 바뀌자 프로그램도 바뀌고 관객구성도 바뀐 것이다.

음악

음악의 대중화는 매체와 기술발전의 결과다. 과거의 음악은 입에서 입으로, 즉 구술로 전파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자 유통방식이 종이로 바뀐다. 영국에서는 인쇄혁명의 영향으로 16-17세기부터 쉬트음악이 활성화되고 악보보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커다란 종이의 한 면에 가사를 적어서 음악을 사고 팔았는데, 이를 브로드사이드 발라드(Broadside Ballad)라고 하였다.  민속음악 내지는 유행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미디어의 일종이었다. 영국에서는 1830년경부터 합창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피아노 보급이 확대되면서 음악소비가 증가한다. 브라스 밴드의 보급도 늘어나는데 이는 피스톤 밸브의 개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로 의해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정확한 소리를 쉽게 낼 수 있게 되었고, 악기의 생산과 보급을 원활하게 하였다. 음악가의 증가도 괄목할만해서 1870년도 이후 60년 동안 영국인구는 두 배 증가했지만, 음악가는 7배가 늘었다. 브라스밴드는 북부공업도시에서 빠르게 확산된다.

빅토리아 시대에 대중음악가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런던의 이스트 엔드와 리버풀이었다. 비틀즈를 낳은 도시 리버풀은 W.G 로스, 아서 로이드 , 해리 리스턴, 윌키 바드, 베스타 빅토리아 등과 같은 저명한 뮤직 홀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다. 북부도시에서 프리 앤 이지나 노래살롱이 활발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의 오락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53년에 맨체스터에서 벌어졌던 브라스 밴드 경연대회도 음악소비에 큰 기여를 했다. 브라스 밴드는 북부공업도시에서 1830년경에 시작되었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오락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행정당국은 이들의 정치적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브라스 밴드를 권장하였다. 밴드는 직장단위로 조직되었고 순식간에 많은 직장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정체가 브라스 밴드 경연대회였다. 맨체스터만이 아니고 요크셔 등 인근 지역에서도 참가하여 대회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이벤트의 성공에는 철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브래스밴드 경연대회는 맨체스터의 음악열을 높였다. 1898년에는 우승팀이 런던 로얄 알버트 홀에서 연주를 하게 되고, 이는 맨체스터의 음악열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 때의 지휘자는 사보이 오페라의 아서 설리반이었다. 설리반은 이 이벤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1900년에 브래스 밴드 전국대회를 런던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한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대중들 사이에 음악활동이 증가하고 있었고 이는 프리 앤 이지나 노래살롱 등의 활성화로, 나중에는 뮤직 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뮤직 홀에서는 민스트럴 송이나 발라드, 마드리갈과 민속음악이 연주되었고 오페라 형식의 음악연주도 있었다. 다만 오페라는 뮤직 홀의 보편적 프로그램은 아니었고 극장경영자의 취향에 따라 간혹 연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뮤직 홀 노래의 중심주제는 사랑, 결혼, 가정, 섹스 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을 다룬 주제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자식들을 키우면서 경험하는 갈등 등도 주요한 소재였다. 주거문제도 많이 등장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서 살기가 어려워지면 집세를 내지 않고 야반도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집주인과 임차인의 관계를 다룬 노래도 있었다. 공무원들에 대한 풍자, 특히 경찰을 풍자하는 노래도 있었다. 정부기능이 강화되면서 1839년에 도시경찰법(Metropolitan Police Act)이 통과되고 경찰의 권한과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는데, 그들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현상일 것이다.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톤간의 정치적 갈등이나 여성참정권을 다룬 정치적 노래도 있었다. 섹스도 터부가 아니었다. 정치스캔들은 특정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소재였다. 대표적인 노래는 당시의 유망한 정치인이었던 찰스 딜크(Charles Dilke)와 버지니아 크로포드의 스캔들을 다룬 노래였다. 찰스 딜크는 1880년경 추후 수상임명이 유력시되는 정치인이었는데 자신의 남동생의 처제인 크로포드와의 불륜 스캔들을 일으켰다. 신문은 연일 이 사건을 ‘ 짐승보다 못한 야만적 간통’의 스캔들로 다루었다. G.W. 헌트는 <찰리 딜크가 우유를 엎질렀네>(Charlie Dilke Upset the Milk)라는 노래를 작곡하여 G.H. 맥더모트에게 주었고 이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소풍, 경마, 펍에서 술마시기, 먹고 마시는 이야기 등을 그린 노래도 많았다. 외설스런 농담과 저속한 코미디 등이 주류를 이루던 초기의 뮤직 홀 프로그램은 늘 영국 중산층들이 염원하던 품위있는 오락, 합리적 오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를 중산층들이 선호하는 품위있는 오락이나 고급 클래식으로 바꾸면 관객의 급감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뮤직 홀 경영자들의 딜레마는 이러한 이중구속에서 시작되었다. 뮤직 홀의 프로그램, 특히 초기의 프로그램에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프로그램, 성찰적인 메시지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드물었다. 사회비판적이거나 정치적 프로그램 또한 적었다. 뮤직 홀의 경영자들은 어떻게 하면 관객을 많이 끌어들일지를 늘 생각했다. 따라서 음란하고 외설적인 노래와 코미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사회적 부정의도 많이 다루었지만 현상을 바꾸자는 노래는 없었다. 이런 것이 뮤직 홀 음악의 특징이자 나아가서 영국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딜크와 맥더모트 홍보 포스터(출처 : london overlooked.com)

브로드사이드 발라드와 코스터 송

뮤직 홀의 초기음악, 적어도 1860년대까지는 브로드사이드 발라드가 중심이었다. 당시 인기곡이었던 W.G. 로스의 <샘 홀>은 대표적인 브로드사이드 발라드로 스코틀란드의 민속음악에서 차용한 곡이었다. 초기의 뮤직 홀은 민간에 산재한 유행가나 민속음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장르는 코스터 송으로 거리에서 행상(costermonger 또는 coster)들이 야채나 과일, 중고품 등을 팔 때 부르던 상인들의 노래였다. 민중들의 삶의 애환, 해학과 풍자, 유머가 담긴 노래들이었다. 행상은 뮤직 홀의 단골 소재였다. 코스터 코미디언들은 행상, 꽃파는 소녀, 공장노동자, 슬럼가의 막노동꾼 등의 분장을 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들을 표현하였다. 브로드사이드 발라드나 코스터 송이 뮤직 홀에서 많이 불린 이유는 아직 작곡과 작사가 전문화되고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타들도 코스터 송을 불렀다. 코스터 송으로 유명했던 건 ‘행상의 계관시인’으로 불린 알버트 슈발리에(Albert Chevalier)였다. 그는 원래 연극배우였지만 코스터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여 1890년대에는 뮤직 홀의 인기 코미디언이 되었다. 슈발리에는 작사와 작곡능력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코스터 송을 작곡하였다. 나중에는 코미디언을 그만두고 전업 작곡가로 변신하였다. 거스 엘렌(Gus Ellen)도 코스터 송으로 유명했다. 달걀포장, 펍종업원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펍에서 코스터 송을 부르면서 일약 스타가 된다. 코스터 가수들은 행상들의 복장으로 등장하였는데, 줄무늬 바지와 삐딱하게 쓴 모자, 비스듬히 문 파이프 등이 거스 엘렌의 대표이미지가 되었다.( 『British Music Hall』, 519-520)

그러나 민속음악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보다 다양한 노래가 필요했다. 전문적인 작곡가와 작사가가 등장한다. 음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많은 곡들이 나왔지만 가수에게 맞는 곡, 좋은 곡을 고르기는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음악의 전문화는 저작권 문제를 낳았다. 마리 로이드는 데뷔하고 나서 작곡자의 허락없이 노래를 불렀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많았다. 어느 홀에서 연주하는가, 누가 부르는가 등도 중요한 문제였다. 뮤직 홀은 음악의 전문화에 기여했고 나아가서 대중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비틀즈같은 스타음악인들을 배출한 것도 뮤직 홀의 오랜 전통의 결과라고 말한다.

비틀즈(출처 : rollingstone.com)

전쟁노래와 징고이즘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있었다. 발칸반도를 지배하려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1875년경이 되면 매우 심각해진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늘 신경이 쓰였지만 터키가 군사적 우위에 있어서 영국으로서는 여기에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1877년에 러시아군이 플레브나(Plevna)에서 터키군을 격파하자 상황이 급변한다. 플레브나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할 수 있는 교통로라는 점에서 뼈아픈 패배였던 것이다. 반러시아 감정이 고조되고 당시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대중집회와 연설회등을 개최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 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민들의 반러 감정을 부추긴 것은 정치집회가 아니라 공연이었다. 뮤직 홀에서 보여준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 디오라마와 전쟁노래들이 강한 반러시아 감정을 고취시켰다. 애국주의를 의미하는 징고이즘이라는 말이 이 때 등장한다. 징고이즘(Jingoism)은 이미 17세기부터 간간히 사용되었는데, 대중화된 건 빅토리아 시대였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G.J.홀리요크(Holyoake, 1807-106)로 그는 징고이즘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 징고란 주로 경마장, 술집, 저속한 뮤직 홀의 단골로 그 활력의 원천은 맥주, 모토는 하이칼라. 그리고 그들의 정책은 외국인 경멸이다. 그들은 펍이나 뮤직 홀 특유의 언어를 말 한다.’ 징고는 노동자 계층으로 뮤직 홀이나 펍등을 드나들면서 애국적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1878년 초에는 전국 각지에서 반러 징고집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압도적으로 젊은이가 많았고, 집회는 행진으로 이어졌다. 브라스밴드가 연주하는 가운데 횃불을 들고 애국적 노래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애국적 노래인 <룰 브리타니아>를 불러 애국적 감정을 고조시켰다.(井野瀨久美惠, 『大英帝國はミュージックホールから, 212-215)

징고이즘에 불을 붙인 건 전쟁노래(War Song)로. 반러감정이 한창이던 1877년에 등장하여 1890년경까지 유행했다. 전쟁노래를 주로 부른 건 G.H.맥더모트였(Macdermott)다. 그는 해군에서 9년 동안 복무하면서 아마추어 연예인으로 활동하다가 뮤직 홀 무대에 데뷔한다. 그를 스타로 만든 건 전쟁노래였다. 그의 <바이 징고(By Jingo)>라는 노래는 당시 최고의 히트곡으로 영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 노래를 부르면 ‘천정이 내려앉을’ 정도로 모든 관객이 따라 불렀다. 이 노래를 작곡한 G.W.헌트는 맥더모트만이 아니라 아서 로이드, 조지 레이본 등 당시의 인기가수들에게 노래를 주었고 노래작곡만으로 생계를 유지한 최초의 작곡가였다.

징고이즘은 정치계로도 확산되었다. 맥도머트의 공연에서 <바이 징고>를 들은 디즈레일리의 비서는 이 용어를 디즈레일리에게 보고했고 그는 의회연설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바이 징고의 코러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네
그러나 해야 한다면 애국심으로 싸우리라
우리는 배도 있고 사람과 돈도 있네
우리는 전에도 곰(러시아를 말함)과 싸운 적이 있지
영국은 진실하지
러시아는 결코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수 없으리라

여성가수

여성 연예인은 1850년대에 캔터버리 뮤직 홀의 사회자가 여성을 출연시키면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찰스 모튼은 여성관객의 입장을 장려하기 위해 관객행동을 통제하고 프로그램도 품위있는 것들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여배우의 출연을 장려했다. 여성연예인들은 남성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들에게는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뮤직 홀 가수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직업중의 하나였다. 또한 여성들은 남성들의 관음증의 대상이었다. 마리 로이드, 베스타 틸리, 베스타 빅토리아 등은 최고의 여성스타들이었다.

제니 힐( 1850-1896)은 뮤직 홀 초기의 여성스타였다. 어릴 때 조화공장에서 일하다가 공장장이 직공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제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이 때 자신의 재능을 확인한 제니는 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7세에 뮤직 홀 배우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술과 폭력으로 원만한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혼자서 딸을 키우게 되었다. 어느 날 런던 퍼빌련의 오디션에서 극장장의 눈에 띄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어 승승장구했다. 생명의 불꽃(Vital spark)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무대에서의 카리스마가 뛰어났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미국 순회공연에서 병을 얻어 치료차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갔다 왔지만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리 로이드(1870-1922)

마리 로이드는 뮤직 홀 최고의 스타였다. 그녀는 1885년 그레시안 뮤직 홀에서 데뷔했다. 불과 1년만에 유명인이 되었고 출연료는 10배로 뛰었다. 주급 10파운드에서 100 파운드로 뛰었는데 이는 오늘날 6천 파운드, 한화로 천만원 정도다. 그녀의 댄서였던 이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엔터테인먼트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동생 앨리스도 가수였고 이들은 공연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1890년에는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어서 드루리 레인에서 단 레노, 리틀 티치와 함께 처음으로 판토마임에 출연하였다. 1892년에는 영국내 도시를 순회하였고 9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1913년까지 모두 5회의 미국공연을 한다. 1913년 공연이 마지막 미국공연이 되었는데, 미이민국에서 그의 장차 세 번째 남편이 될 연하의 버나드 딜론에게 비자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8살이나 어린 22살의 젊은이와 40살의 여성의 관계를 이민국에서 의심했던 것이다. 곧 입국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마리는 미국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관객들도 그녀의 공연에 대해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그녀의 노래를 ‘ 프랑스적 음탕함과 영국적 저속함’이 결합된 노래라고 혹평하였다.

마리 로이드(출처 : peel.fandom.com)
마리 로이드(출처 : peel.fandom.com)

그녀의 세 번의 결혼이 전부 순탄치 않았다. 남편들이 갱으로 불릴 정도로 하나같이 성격이 포악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범하게 이겨냈고 역경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리 로이드는 데뷔 초기에 남의 노래를 저작권을 획득하지 않고 함부로 불러 분쟁을 일으켰다. 아직 음악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는 음악선곡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음악구입비에 많은 돈을 썼다. 1개의 히트곡을 얻으려면 10개의 곡을 사야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녀는 노래는 우연히 히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노래도 명곡으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에게 오면 ‘넝마가 비단’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역할은 노래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마리 로이드는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감성적인 노래, 유머, 그러나 매우 외설적이고 음란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녀에게는 외설적 가수라는 오명이 붙어 있었다. 1912년 뮤직 홀 사상 처음으로 왕실의 에드워드 7세와 메리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로열 커맨드 퍼포먼스가 열렸는데, 마리 로이드는 배제되었다. 그녀의 외설스런 노래 때문이었다. 마리 로이드가 외설적인 가수라는 오명이 붙은 것은 노래 자체에도 있었지만 그녀의 제스처나 윙크와 같은 섹시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스타가 되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마리는 다혈질이었고 제왕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관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석에서 쏘아붙이고 퇴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관대하고 다정다감한 여성이었다. 약자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에게 부츠를 사주기도 했고 고아들에게 용돈을, 군인들에게는 위문공연을 해 주었다. 1907년 뮤직 홀 배우들의 파업때는 누구보다 가난한 배우들을 위해 헌신했다. 자신의 집을 회합장소로 제공했고, 피켓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기금마련 공연에도 참여하였다. 영국인들이 마리 로이드를 좋아했던 건 그녀의 노래만이 아니었다. 대범한 마음씨, 타인을 배려하는 관용적 태도에 있었다.

그녀는 1922년 62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에드몬턴 엠파이어 극장에서 노래를부르다가 쓰러져 3일후에 사망했다. 마리는 무대위에서 비틀거리다 쓰러졌고, 관객들은 이 광경을 보고 술에 취한 연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깔깔대고 웃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왕실 의례에 준하는 정도로 성대한 것이었다. 10만여명의 사람들이 연도에 몰리자 경찰이 동원되었고, 묘지의 출입구는 폐쇄되었다. 각계각층에서 보낸 조화가 6대의 운구차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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