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낸 연가곡들 – 홍혜란 최원휘 백혜선
[공연리뷰]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낸 연가곡들 – 홍혜란 최원휘 백혜선
  • 이민희 음악평론가
  • 승인 2021.08.0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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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 Life : 사랑과 삶을 노래하다
'러브앤라이프' 무대 캡처 (제공=
'러브앤라이프' 공연 모습 (제공=스톰프뮤직)

[더프리뷰=서울] 이민희 음악평론가 = 노래 가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이 많고, 무대 위의 성악가들은 배역에 맞는 상황을 연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대 예술이 갖는 비현실적이고도 퍼포먼스적인 본질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음악회는 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가사 속 ‘사랑을 노래함’이 단지 글귀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사랑’을 투영한다. 지난 7월 2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그리고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음악회가 그랬다.

홍혜란은 여성의 입장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여인과 사랑의 생애>를, 테너 최원휘는 남성의 입장에서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는 <세 개의 페트라르카 소네트>를 불렀다. 이 둘은 부부로, 이들과 좋은 인연을 맺어온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음악회의 반주를 맡았다. 1부에서는 슈만의 <헌정>이 리스트 편곡 버전으로 연주됨으로써 부부에게 사랑의 축복을 보냈고, 2부 마지막 곡으로는 부부가 위촉한 <김소월 시에 의한 세 개의 연가곡>이 초연되었다. 예컨대 이 음악회에서는 음악의 발화(發話)가 결국 그 행위를 이행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는 음악회의 타이틀이었던 ‘사랑과 삶을 노래함’이 정말 연주자들의 ‘삶 속의 사랑’이 되어 관객을 만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혜선이 반주라는 영역에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딛는 무대였다는 점, 28세의 젊은 작곡가 김신이 대규모 청중 앞에서 신곡을 선보이는 자리였다는 점도 기억할만하다. 더 나아가 이날 연주된 연가곡 세 편을 통해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음악적 표현법은 물론 슈만과 리스트의 사랑에 대한 관점들, 더 나아가 동시대 음악 작법을 음미할 수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낱 곡 하나마다, 그리고 연가곡마다 각기 다른 음색을 들려주었던 백혜선의 반주도 인상적이었다.

슈만 <여인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 Op. 42>

화음 반주로 시작하는 1곡 <그를 본 이후로>는 여인이 한 남성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그린다. 단 한 마디의 피아노 도입부가 연가곡 전체의 화성적 어조와 피아노의 역할을 공표하는 듯했고, 홍혜란은 고르게 울리는 비브라토로 단호하면서도 차분한 심상을 표현했다. 그렇게 홍혜란이 그리는 여인은 자기 확신이 있되 들뜨지 않고, 새로운 남성과 함께 펼쳐질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인물로 상상되었다. 2곡 <누구보다 가장 뛰어난 그대>는 강인한 남성에 대한 상념을 음악화하듯 넓은 음역을 연이어 도약하는 선율이 특징적이었다. 팔분음표의 화음 연타가 만드는 음향의 중경(中景) 위아래를 힘차게 내딛는 성악 선율과 피아노의 베이스 라인, 그리고 이따금 등장하던 대선율. 이렇게 다채로운 성부가 번갈아 소리를 내며 일관된 속도로 내달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러브앤라이프' 소프라노 홍혜란 (제공=스톰프뮤직)
'러브앤라이프' 소프라노 홍혜란 (제공=스톰프뮤직)

4곡 <내 손에 낀 반지여>에서는 여성의 결혼을 ‘반지’라는 소재로 표현하는데, 흡사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선율선과 이와는 분리된 피아노 반주가 눈에 띄었다. 이어진 5곡에서는 결혼의 기쁨이 아르페지오 화음 반주와 동음반복을 포함하는 또렷한 모티브로 등장했다. 이처럼 비교적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화성과 짜임새 그리고 선율의 형태는, ‘결혼’이나 ‘반지’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것처럼 들렸다.

6곡 <다정한 그대여, 나를 놀란 듯 바라보고>에서는 첫 음을 길게 끄는 독특한 성악 선율이 마치 말을 하듯 노래되며, 피아노는 화음 위주의 반주를 느리게 진행시킨다. 짜임새와 조성이 다른 새로운 섹션이 레치타티보적인 초반과 대조됨으로써 연가곡 중 가장 드라마틱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도 특징적이다. 홍혜란은 이 곡을 고른 비브라토와 단단한 음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비로운 뉘앙스를 만들었다. 이는 임신으로 인해 복잡한 감정을 겪고 있지만 이에 당당히 대면하는, 사뭇 숭고하기까지 한 여인의 태도로 다가왔다.

각 곡에 짧게 곁들여졌던 네다섯 마디의 피아노 후주(postlude)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 ‘단성’의 성악에 대한 총천연의 ‘다성’적 응답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곡에서는 첫 곡의 주제를 피아노에서 재등장시키는데, 이는 연가곡 전체를 이끌고 아우르며 또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피아노였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결과적으로 백혜선의 피아노는 입체적인 음색과 표현력을 들려줌으로써 다소 평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보수적인’ 여인의 삶을 보다 긴 여운이 남는 형태로, 즉 음악 속 여인이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하고 다난한 삶을 보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텍스트’로 전달되는 이야기 이외에도 오직 음표로만 전달되는 ‘시심(詩心)’의 세계가 있음을 너무도 잘 알았던 슈만이었기에, 홍혜란이 노래했던 가사 안의 여인의 삶과 백혜선이 받아 마무리했던 음향 속 내면적인 여인의 삶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 <세 개의 페트라르카 소네트 Tre Sonetti di Petrarca, S. 270>

<세 개의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화성적으로는 난해하며 형식적으로는 자유롭다. 이런 곡은 성악가의 가사 해석 능력과 드라마를 소화할 수 있는 역량, 그리고 정교한 음정 처리 등을 필요로 한다. 이에 화답하듯, 테너 최원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것처럼 무대 위에 있었다. 특히 1곡 <평화를 찾지 못하고>에서는 포효하는 음색으로 좌중을 압도했으며, 변화무쌍한 화음 및 선율 위에서 긴 고음을 내지르는가 하면, 토로하는 듯한 제스처로 드라마를 극대화했다.

'러브앤라이프' 테너 최원휘 (제공=스톰프뮤직)

<여인의 사랑과 생애>와 비교해 보았을 때 리스트의 <세 개의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화자가 겪는 감정의 격변이 훨씬 극적이다. ‘여성의 삶’을 그려낸 슈만의 작품이 양식의 ‘틀’ 안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곱게 드러냈다면, 리스트의 작품은 비록 사랑을 다루고 있음에도 고통과 환희, 좌절과 절망 등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게 펼친다. 그렇게 행의 반복이나 모티브 전개가 희미해지고, 감정에 이끌려 지옥에서 천국을 맛보는 남자의 사랑이 최원휘의 묵직하고 힘찬 음성과 함께 객석을 메웠다. 백혜선의 피아노 반주도 <여인과 사랑과 생애>에서는 단아한 화음을 중심으로 안쪽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면, 이 곡에서는 화려한 음색 및 과감한 타건과 함께 밖으로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소네트의 2곡은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노래와 반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곡 중반에는 새로운 조로 시작하는 완전히 다른 악상이 등장하며, 반음계와 까다로운 음정이 미묘한 사랑을 나타낸다. 한편, 3곡 <나는 보았지, 지상에서 천사를>은 음악회의 시작을 열었던 피아노 독주의 원곡이다. 주요 선율의 흐름 및 전체적인 음악요소는 동일했지만, 테너가 음역의 가장 고음을 내지를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카타르시스가 압도적이었다. 이는 피아노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던 것으로서, 관객은 이를 들으며 ‘극단’에 이른 사랑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김신 <김소월 시에 의한 세 개의 연가곡> 첫사랑-님의노래-못잊어

김신은 현대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데 능할 뿐 아니라, 조성을 기반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데도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이런 작법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음역과 모티브가 섬세하게 통제되어 우리말 가창에 최적화된 선율을 만들었고, 수직적으로 울리는 화음은 인상주의 기법을 연상시키는 부가화음이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오음 위주의 음계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연가곡 속 한글로 된 ‘시’를 청취하며 음의 수사학(修辭學)적 표현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 짜릿했다. 이를테면 성악가가 말로 건넨 비둘기의 “구, 구, 구” 가사는 짧게 끊어 치는 피아노 화음의 연타로 이어졌고, “장미가 시든다”는 가사는 하행하는 선율로 노래된 후 점차 낮은 음역으로 가라앉듯 흘러내리는 피아노 선율이 되었다. 이처럼 단순하지만 명확한 가사의 음악적 번역은, 그 텍스트가 한글이었기에 무리 없이 그 의미를 쫒아갈 수 있었다.

홍혜란을 위해 쓴 <님의 노래>는 쭉 뻗는 고음을 주로 사용하며, 성악가의 음색을 직접적으로 부각시켰다. 이 때문에 앞선 슈만의 연가곡보다도 성악가의 성량과 힘, 그리고 강렬한 표현력이 쉽게 엿보였다. 다만 김신의 곡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화음 반주를 기반으로 하는 호모포닉 짜임새가 대부분이었기에, 백혜선 피아니스트 특유의 섬세한 성부 표현이나 독창적인 해석 등을 드러낼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연가곡은 음악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각인되었는데, 두 부부가 꼭 맞는 맞춤옷을 차려입은 듯 능수능란하게 가사와 선율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관객들 역시 부부가 함께 불렀던 <못 잊어>의 클라이맥스를 흥얼거리고 또 기억하며, 이날 음악회의 주제였던 ‘사랑과 삶’을 곱씹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좌로부터) 피아니스트 백혜선,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제공=스톰프뮤직)
(좌로부터) 피아니스트 백혜선,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제공=스톰프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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