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8) - 시간여행의 도시 파리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8) - 시간여행의 도시 파리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8.21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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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jeton, 뮤지션들 농장 가는 길의 해바라기 마을(사진=김윤정)
Hajeton, 뮤지션들 농장 가는 길의 해바라기 마을(사진=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매년 파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건 나의 연중행사였는데 코로나로 인해 물리적, 심리적으로 그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2년 만에 파리에 다녀왔다. 내가 살고 있는 뒤셀도르프에서 파리까지는 500여 킬로미터 거리여서 차를 가지고 가면 하루에 독일,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이렇게 네 나라를 거치게 된다. 이번에는 오랜 만에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하필이면 8월 초부터 프랑스도 백신접종 증명이나 검사결과가 있어야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해서 일단 하루 일찍 7월 31일에 마스크를 쓰고 기차를 타기로 했다(당시 나는 일차 접종만을 마친 상태).

유난히 쌀쌀한 여름 같지 않은 여름 날씨를 위한 한 주일치의 짐을 차분히 싸고 집을 나섰건만 기차를 타기 바로 직전에야 스마트폰을 집 현관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울상이 되어 기차를 타는 나를 보며 배웅 나온 파트너의 얼굴이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더욱 애절하다. 이 기회에 스마트폰 없이 가는 여행을 즐기고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껴 보라는 위로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위로는커녕 현실적인 걱정들이 앞섰다. 심지어 가방을 가볍게 하려고 노트북도 두고 온데다가 그야말로 평소 자주 연락해야 하는 기획팀, 가족, 지인들과도 일주일 동안 완전 소통이 끊어지는 것이다. 머릿속에 기억나는 전화번호도 없고 내 메일 주소 비번도 기억이 안나고(스마트폰에 중요한 자료들은 저장되어 있으니) 메일을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일주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더구나 늘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내가 여행지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스마트폰의 부재(不在)와 가스통 바슐라르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돌려 먹는 데는 서럽지 않게 긍정 마인드의 내가 아니던가? 그야말로 몇 분(?) 속상했지만 곧 침착하게 생각을 고쳐 먹고 창밖으로 흩날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면 불안하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그 순간을 잘 이용해서 즐겨야 한다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집에 가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메일 비번과 중요한 전화번호나 기록들을 꼭 따로 노트에 적어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가장 확실한 것은 아날로그다. 디지털로 보관된 자료들은 소프트웨어가 없어지면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당분간 안전하다는 안일함에 그렇게 해놓지 못했다. 깨닫고 생각하는 걸로는 늘 부족하다. 행동으로 즉시 옮기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것이다.

아무튼 너무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은 특별했다. 더구나 빠르게 역동적으로 달리는 기차 안, 바깥세상과의 소통이 차단된 상태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상태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길은 내 안으로 들어가는 일 뿐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멈춰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들은 어딘가로 무한을 향해 움직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물들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가 쓴 <공간의 시학>을 보면 “우리들은 움직임 없이 있게 되자마자 다른 곳에 가 있게 된다. 무한은 움직임 없는 인간의 움직임이다. 무한은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에는 경계가 없다.”라고 했다. 내면의 무한이라니 얼마나 정확하면서도 철학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이야기인가? 이 답답한 상황을 본질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재미있어졌다.

시간과 공간에 갇히고 나니 움직이려는 속성이 나를 무한의 내면으로 파고들게 하여 나는 이런저런 상념들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프랑스로 접어들었다는 현실감은 검문이 있으면서부터 였다. 팔에 타투를 하고 캐주얼한 복장에 권총을 찬 무리가 우르르 좁은 기차 안을 지나갔다. 그 모습이 처음에는 사뭇 테러리스트들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곧 그들은 사복 경찰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어딘가 살벌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만약에 저들이 무기로 무장한 테리리스트이고 우리가 저들에게 제압된 상황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보니 어느덧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4시간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갔다.

도시마다 그 특유의 공기의 냄새와 색깔이 있다. 갑자기 많이 보이는 불어를 쓰는 흑인들, 그리고 역 입구에서 무장한 듯한 경찰들의 검문(프랑스에 테러가 잦은 때문인 듯), 야외에 테이블들이 늘어선 카페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관광객들에 놀랐다. 워낙은 스마트폰의 구글 맵 길찾기가 간단하게 안내하던 길을 갑자기 벽에 붙어있는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한참 보고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목적지인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쌓이는 먼지는 쌓이는 시간?

우리는 자주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눈을 마주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수다의 시간을 깊게 공유한다. 아이를 키우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카오틱한 친구의 거실이 정감이 간다. 친구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이컨은 30년간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상 위로 쌓이는 먼지는 시간이 쌓이는 것이기에 시간을 지켜보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먼지를 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멋지다고 공감하면서 그동안 서로 읽고 느낀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늦도록 나눈다. 나는 최근에 본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다큐영화 <Pretend It’s a City>에서 프랜 레보위츠 (Fran Lebowitz 1950- )가 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피카소의 그림이 나오면 침묵하다가 가격이 정해지면 그 숫자에 박수를 치는 걸 보면서 놀랐다고 하는 그녀의 신랄한 현대사회 풍자와 유머에 관해서 말이다.

우리는 다소 두서없이 정치철학, 그리고 코로나 사태에 대한 너무나 나라마다 다른 대응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백신을 강요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는 동안 한국은 백신 확보가 부족하다며 불평을 하고, 독일은 정책은 백신을 맞으라 하지만 의사들조차 개인적으로 백신을 불신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차라리 코로나에 걸렸다가 자연 치유되는 것이 백신을 맞는 위험보다 작을 수 있다며 코로나 환자들을 찾는다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하루 확진자가 2만 명이던 네덜란드에 갈 일이 있었는데 실내, 실외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 나 혼자 쓰고 있자니 마치 나만 코로나 환자 같아서 머쓱했었다. 개인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사회풍조, 그리고 스스로 책임지고 문제가 생겨도 정부 탓을 하지 않는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라지만 그야말로 혼돈의 코로나 시대인 것 같다. 세상이 점점 인터넷 알고리즘으로 인해 극단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코로나조차 백신을 신용하는 사람들과 불신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이런 현상들은 그야말로 초(?)형이상학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테마도 자유롭게,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친구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소중하다. 매일 아침 나는 친구 부부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동네 베이커리에서 신선하고 맛난 바게트를 사온다. 워낙 아날로그틱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던 친구는 새로 커피를 내리는 기계를 들여 놓았는데 못 보던 상표였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길래, 그 흔하고 편한 네스프레소 커피를 사지 왜 이런 걸 샀어? 하고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던지니 자기는 되도록 대기업 상품보다는 중소기업 제품을 사주려 한다고 했다. 오 그런 개념 멋진 걸? 고장도 자주 날 것 같고 디자인도 맘에 안 든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뭐 뒤로 하고라도 나는 인생을 자신의 콘셉트대로 사는 사람들을 존중한다. 페미니스트, 환경운동가, 채식주의자 또는 특정한 종교인들 나름 자신의 콘셉트와 개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존중한다. 단,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인에게 강요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건축 사무실에 다니는 친구 부부는 코로나가 시작되고부터 전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트로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코밑에 걸치고 있거나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나도 전기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뒤를 쫒아 복잡한 파리 시내를 달렸다. 그녀가 일하는 동안 나는 자유롭게 파리 시내를 유유자적 걸어다니며 중간중간 카페에 앉아 펜으로 종이에 끄적이기도 하고 들고 간 책을 읽기도 하면서 파리를 느꼈다.

전기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에서(사진=김윤정)
전기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에서(사진=김윤정)

워낙에 사진 찍는 걸 즐기는 내가 스마트폰이 없다보니 의외의 집중력이 생기고 스쳐가는 풍경들이 좀 더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는 듯했다. 하루는 뱅센 숲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숲이 너무 커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조금 걸어 들어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들, 젖은 풀들, 피어나는 꽃들, 이미 만개해 떨어진 꽃잎들, 낙엽의 냄새들이 맑은 공기와 뒤섞여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폐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멀리 어디선가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하나의 의무? 또는 습관 같은 것을 내려놓으니 다른 감각이 또 열렸다.

파리, 그리움

파리는 나에게 그리움이다. 아주 오래 전 나보다 먼저 유학을 했던 동생이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는 동생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 축축한 겨울을 함께 보내며 느꼈던 시간들이 늘 아련하게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동생이 하루하루 파리 유학시절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내준 봉투를 들고 거기 발신인 주소를 찾아 그녀가 걷던 길을 걸으며 그리움을 달래던 때도 있었다. 그때의 공간은 돌아갈 수 있지만 시간은 돌아갈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간조차 초월하게 하는 파리는 시간이라는 마법에 걸려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종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횡적으로 나열되어 아포리즘적 시간의 개념으로 그려진다. 그냥 펼치고 싶은 장이 열리고 아니 자동적으로 그렇게나 오래 전 시간들의 기억과 추억들이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들처럼 살아난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저 쪽 골목에서 긴 머리, 긴 머플러, 긴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동생이 나타날 것만 같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보이는 그 애는 이십대 중반으로 머물러 있다.

지독하게도 춥던 어느 날 감기가 들어 동생이 살던 다락방에 누워 그 애를 기다리던 시간들, 시몬 드 보봐르와 싸르트르가 자주 갔었다는 생-미셸가의 카페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들, 난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어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세상의 모든 아침, 반주자,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퐁뇌프의 연인들 등등. 이런저런 추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아나 현재에 오히려 집중할 수 없는 도시가 파리다. 파리는 나에게 시간여행이다

내 친구 김나영

나에게 파리가 여전히 또 특별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친구, 그동안 내 작품들의 무대를 맡아준 건축가 김나영씨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려면 나의 첫 스태프 미팅은 늘 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리 건축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소르본에서 예술철학으로 석사를 마치고 리옹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한 나영씨는 워낙 무대미술을 하고 싶어 파리에 왔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콘셉트의 초안을 잡을 때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요점을 늘 집요하게 끌어 내주고 상상력을 자극하게 해주며, 논리가 부족한 내가 마구 쏟아내는 느낌들을 좀 더 명확하게 이끌어주는 동지이기도 하다.

건축가 김나영씨와 함께(사진=김윤정)
건축가 김나영씨와 함께(사진=김윤정)

그녀는 아무리 어려운 콘셉트나 논리도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늘 강조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철학가 질 들뢰즈로 석사를 한 나영씨는 프랑스 친구들로부터 프랑스 사람인 자신들도 이해하기 힘든 들뢰즈를 넌 어찌 그리 이해를 쉽게 하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어떤 어려운 철학적 이론도 늘 실제의 이 시대 상황의 예를 들어서 말해주는 나영씨의 설명을 들으면 아주 쉽게 다가온다. 친구 자랑에 한 마디 더 붙여 보면, 카프카의 반모뉴먼트적 공간의 분석으로 천개의 상자를 만들어낸 졸업논문과 작품으로 유례없던 만점에 가까운 최고 점수를 받는 졸업생이 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 공부를 하던 학생시절, 건축계의 거장 장 누벨 건축회사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택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독학으로 터득해서 한국에 짓는 건축은 풍수지리가 중요하다고 그들을 설득시켜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한다.

우리는 <메종 바로크>라는 작품으로 만난 이후 의기투합해서 <베케트의 방> <문워크> <미팅 유> <울프>, 네 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미팅 유>라는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어린 왕자가 만나는 이야기였는데 앨리스 역할인 나의 의상을 천을 잘라 연결해서 굵은 실로 만들고 그 실로 손으로 뜨개질 방식으로 의상 겸 무대 세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제작된 의상은 춤을 추고 회전을 하는 동안 옷이 다 풀려 긴 줄이 되고 그 줄을 허공에 사각형으로 걸면 문이 되고 또 어린 왕자와의 연결고리가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콘셉트였다. 매번 연습 하고 공연을 할 때마다 풀리는 건 잠깐이고 다시 만들려면 두 시간씩 걸리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공연으로 우리는 뉴욕, 일본, 캐나다, 독일, 한국을 투어했는데 나영씨는 고된 작업에 코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크기변환_3, 미팅유 작품의 앨리스 의상
'미팅 유' 에서 앨리스의 의상

어느 날인가 파리에서 콘셉트 회의를 하고 독일로 돌아가던 날 파리 북역 카페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기는 워낙 무대미술을 하고 싶어 파리에 왔고 어쩌다 건축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늘 공연에 대한 목마름으로 무용공연들을 찾아다니며 본다고 했다. 좋은 공연을 보고나면 일 년 동안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 충만하고 에너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안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무대를 만들고 펼쳐질 때 행복했기에 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영씨의 무대는 늘 가내 수공업처럼 작업을 해서 과정이 조금 힘들어 보여도 엉뚱하면서도 무대가 작품 안에 깊숙이 들어와 함께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무대였기에 특별히 내가 그녀의 무대를 좋아하기도 했고 또 감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늘 헌신적이던 그녀의 노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나를 울컥하게 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건축 공부를 하던 중 신문에서 어느 연극 공연 팀에서 스태프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동생이 출연하는 연극 작품이었고 그 공연에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늘 바쁘게 살던 동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영씨가 동생을 마지막 본 것이 우연히 퐁뇌프 다리 위에서였는데 동생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고 자신은 책을 사러 헌책방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훗날 동생이 한국에서 지방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알기 이전에, 아니 그녀가 나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동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은 실제에서도 불쑥불쑥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인연

나영씨 부부는 남프랑스가 시작되는 툴루즈에서 한 시간 거리에 집을 짓고 있다. 시댁이 있는 시골이면서 건축가 부부답게 오래전부터 틈나는 대로 집을 짓고 있었는데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 평소 예술을 사랑하는 부부답게 일 년에 한두 번은 그 집에서 예술가 레지던시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관광명소이기도 한 중세도시 로까마두르(Rocamadour)와 피작(Figeac) 사이에 위치한 피조니에(Piegeonnier)라는 곳인데, 그곳은 모든 유럽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목으로 통한다.

예술가 레지던시가 될 시골집(사진=김윤정)
예술가 레지던시가 될 시골집(사진=김윤정)

3층짜리 집은 넓은 마루바닥의 거실로 무용을 하는 댄서들을 위한 배려도 있고 주변이 과수원이었던 터라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까지 트인 자연 풍광이 멋진 곳이다. 그야말로 프랑스 영화를 보면 자주 나오는 시골 별장 같은 분위기를 연상 하면 될 것이다. 우연이지만 내가 요즘 두 번째 읽고 있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서 예전에 영감을 받아 집안의 경계를 결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콘셉트로 지은 집이라고 했다.

나영씨 부부가 짓고있는 시골집 안(사진=김윤정)
나영씨 부부가 짓고있는 시골집 안(사진=김윤정)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 그러니까 2019년 여름 나는 아들과 함께 친구의 시골집을 방문했었다. 집 앞 마당에 양떼가 풀을 뜯고 있고 닭이 낳은 달걀을 가져오는 아들 유진이는 닭이 알을 낳는 게 당연하단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 알을 직접 가져다 먹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는 나영씨가 특별히 자기 아들이 시골에 오면 배우는 승마 코스에 등록을 해서 모두 다 같이 말을 타보기도 했다. 운전을 하듯이 말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속성으로 기술을 익히고 말 우리에서 벗어나 말을 타고 산속을 유유히 거니는 그 기분이라니! 그야말로 최고의 바캉스였다.

프랑스 시골에서 말타기(사진=김윤정)
프랑스 시골에서 말타기(사진=김윤정)

그리고 우리는 나영씨가 파리에서 부업으로 비&비를 운영하고 있는 관계로 나영씨 집에 손님으로 왔다가 인연을 맺은 재즈그룹 께볼라(Que Vola)의 공연 연습 겸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하는 파티에도 가게 되었다. 이 그룹의 더블베이스 연주자이자 리더인 티보의 시골 농장 집은 우연히도 나영씨네 시골 집에서 가까운 위치였다. 프랑스 재즈 뮤지션들과 쿠바의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그룹인데 이미 뉴욕 링컨센터에 초청 받아 연주를 했고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도 연주회가 있었는데, 독일 라디오에서 연주 실황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어스름 저녁, 환상의 농장 콘서트

온 마을이 해바라기꽃으로 뒤덮인 마을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니 떠듬떠듬 보이던 집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외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갑자기 평지가 나오고 그림 같은 농가가 나왔다. 마당 한쪽에는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텐트들이 쳐져있고 방으로 개조한 마구간도 보이고 흔들의자들이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고...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집주인인 티보의 어머니는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시며 세심하게 챙겨 주셨는데 그녀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자기는 소설가 황석영의 팬 이라고 해서 놀랐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그녀는 18세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아직은 어리지만 내 아들 유진이도 음악을 한다고 하니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아주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잘 지지해 주라고까지 했다.

농장의 저녁(사진=김윤정)
농장의 저녁(사진=김윤정)

서서히 각지에서 뮤지션들이 모이고 짐을 풀고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음악을 즉흥적으로 시작하면 한 사람씩 악기를 들고 나와 잼이 시작되었다. 쿠바 타악기 리듬과 현악기, 기타가 함께 하면서 테이블 위 냄비 단지가 드럼이 되고 눈에 보이는 모든 도구가 악기가 되어 연주되는 즉흥 잼은 그야말로 여기가 낙원이구나 싶을 정도로 자연과 어우러져 해가 지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는 소통의 화합은 음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덩치가 꽤 큰 쿠바 여자가수가 도착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한쪽에서는 불을 피우고 준비한 양고기를 굽고, 농장에서 바로 따온 온갖 야채들을 모여서 까고 썰고 해서 라따뚜이(ratatouille)가 만들어지고... 환상의 저녁이었다.

Que Vola 의 잼 (사진=김윤정)
Que Vola 의 잼 (사진=김윤정)

저녁을 먹고 본격적인 께볼라 그룹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 여름 툴루즈 음악 페스티벌에서 연주될 음악들이라고 했다. 특별히 무대와 조명 디자이너들도 합류해서 설치한 조명들로 은은한 빛을 발하니 그야말로 농장은 환상의 극장이 되었다. 중간에 나영씨의 아들 엔조도 잠시 파아노에 앉아서 연주를 하고 유진이도 기타를 잡고 께볼라 그룹의 뮤지션들과 즉흥으로 함께 연주하는 영광의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도록 음악과 술과 웃음과 춤은 저 멀리 보이는 피레네 산맥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인생은 만남이 전부다.

인생은 과정이 전부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부다 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매 순간 순간이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에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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