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8 뮤직홀(4)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8 뮤직홀(4)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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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 드라마
19세기 리얼리즘 연극무대(출처 : http://heironimohrkach.blogspot.com)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다. 이는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TV의 장르선호도를 조사해보면 드라마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고 영화는 가장 인기있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만큼 이야기는 모든 콘텐츠의 핵심을 이룬다. 많은 예술들이 이야기를 도입하려 하는 것은 이야기의 긴장감과 재미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우리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감정이입에 다다를 수 있으며, 구술성이 있어서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구술연극을 영국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칙허극장에서만 공연할 수 있었다.

1843년 개정된 공연법은 모든 극장에서 구술연극을 공연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드라마를 공연하는 극장에서는 술을 팔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펍은 술을 팔 수 있는 뮤직 홀로 변신할 것인가, 술을 팔지 않는 정극극장으로 바꿀 것인가의 양갈래길에서 대부분 술을 파는 쪽을 택했다. 뮤직 홀 초기에는 주류판매수입이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술을 파는 뮤직 홀이 드라마를 공연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뮤직 홀은 드라마를 공연하였고 이는 연극계와 뮤직 홀계의 갈등을 유발했다. 법적인 문제이외에도 연극계로서는 구술연극을 자신들의 독점적 권리로 생각하였고, 또 하나는 연극관객을 빼앗아가는 뮤직 홀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 연극의 위기

페터 쏜디는 드라마의 위기를 형식의 문제에서 찾는다. 옛 형식과 새로운 형식사이의 괴리, 콘텐트가 요구하는 형식과 이미 채택된 형식사이의 모순, 즉 내용과 형식사이의 모순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위기는 19세기 후반 자연주의 연극때 시작되었으며 입센이나 스트린드버그 등의 작품에서 주체와 객체의 전도현상을 볼 수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드라마의 내적인 모순으로 한정하고 있어 진정한 위기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연극의 위기는 연극의 형식보다 연극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84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연극이 대호황을 맞았다. 철도가 발달하여 인구이동이 잦았고 중산층의 소득이 점점 늘어나면서부터다. 50만 명의 파리시민이 일주일에 한번씩 극장을 찾았고 한달에 한번씩 찾은 인구는 백만에서 120만 명 정도에 달했다.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구경했고, 이런 급격한 공연인구의 팽창은 공연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극장의 증가도 괄목할만했는데 정부가 인위적으로 숫자를 통제하기 시작한 제1 제정(First Empire, 1804-1815년)의 극장제한정책을 폐기하면서 급증하기 시작한다. 1828년 1개에 불과했던 극장이 1882년에는 23개로 증가한다. 총매출액도 4,789,000프랑에서 20,168,000프랑으로 증가하였다. 프랑스어로 공연하는 극장이 19세기 문명세계의 곳곳에 세워졌다. 카이로에서 뉴올리안즈까지, 리스본에서 피터스부르크까지 건립되었고. 343명의 배우와 여배우가 외국에 파견되었다. 또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성이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아 그들의 작품이 허가없이 사용되었다.

공연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7월 왕정(1830-48) 말엽의 롱 런은 보통 40회 정도였다. 그래서 알렉상드르 뒤마(아버지 뒤마)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60-80살 정도인 것처럼 연극의 롱 런도 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 2제정(1852-1870)과 제3공화국(1870-1940) 무렵에는 100여 회로 늘어난다. 1897년 12월 28일에 시작된 <시라노 드 벨주락>은 1913년 5월 3일까지 1,000회에 달했다. 공연산업은 점점 활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극은 아직 예술이 아니었다. 적어도 철도시대와 1856년 파리박람회때까지만 해도 연극을 예술로 보지 않았다. 7월 혁명(1830)후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테오필 고티에는 연극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는 것같은 극장, 수백만 프랑이 소요된 아스팔트 공장같다고 하였다. 제2제정하에서 공쿠르 형제는 포르트 생 마르텡 극장의 뒷무대에서 엑스트라, 장면전환수, 용역, 커다란 목공소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일꾼들을 보고 ‘산업단지의 뒷문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1848년과 1870-71년 독불전쟁에 의해 극장이 폐쇄되었을 때 수천명의 스탭과 배우들이 해고되었다. 마치 기업이나 공장에서 직원들이 해고되듯이.(The Theatre Industry in Nineteenth - Century France, 1-30). 이처럼 공연은 거대한 산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네, '카페 콩세르'(출처 : en.wikipedia.org)
마네, '카페 콩세르'(출처 : en.wikipedia.org)

그러나 이런 팽창이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1880년대부터 연극이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연극의 위기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19세기 말부터 나타나고 있던 현상이었다. 프랑스에는 1880년대 중반에 불황이 닥쳐온다. 극장간의 경쟁은 치열해서, 49 개 극장중 20 개가 문을 닫는다. 오죽하면 극장경영자들은 국가가 개입하여 강제로 통폐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까! 게다가 자전거 타기나 경마, 스포츠같은 다른 오락들이 등장하여 연극관객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카페 콩세르였다. 카페 콩세르는 영국의 뮤직 홀과 유사했지만, 다른 점은 공연할 무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뮤직 홀의 전신인 프리 앤 이지나 노래살롱과 같은 성격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뮤직 홀과 유사한 공간은 폴리 베르제르같은 공연장이었다. 하여튼 카페 콩세르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1894년의 숫자는 연극극장만큼 많았다. 1900년도 올렝피아라는 카페 콩세르의 수입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수입과 맞먹는 200만 프랑이었다. 카페 콩세르는 무엇보다도 연극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매우 저렴했다. 극장 입장료는 보통 30프랑 정도였지만 카페 콩세르는 음료대를 포함하여 6프랑 정도였다. 카페 콩세르는 연극을 위기에 빠뜨렸다.

영국에서는 프랑스보다 연극산업이 더 빨리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연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관객이 감소하고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뮤직 홀의 등장과 이로 인한 대중의 취향변화였다. 세익스피어는 더 이상 최고의 오락이 아니었고 , 극장들은 뮤직 홀의 인기에 눌려 있었다. 연극계는 뮤직 홀에 대한 견제에 나선다. 우선 뮤직 홀 설립을 반대한다. 연극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뮤직 홀 사업자도 반대하였다. 이들은 공연법 조항을 근거로 제시했는데, 이미 뮤직 홀 허가를 받은 사업자가 특정지역의 필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신규허가를 불허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은 바로 찰스 모튼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1860년 웨스트 엔드에 옥스포드 뮤직 홀 허가를 신청했는데, 경쟁자들이 이미 웨스트엔드에는 극장이 세 개, 뮤직홀이 다섯 개나 있어서 불필요하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치안판사는 허가를 승인하였다. 세금을 더 징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프로그램에 대한 견제로, 개정된 공연법에 따라 술을 파는 뮤직 홀에서는 연극, 오페라. 스케치 등 대화가 들어가는 드라마를 공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연극계에서는 연극은 고급장르로서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보고 있었다. 질투심많은 연극관계자들은 서커스에 등장하는 대화조차도 불법이라고 하였고, 대화가 삽입되지 않는 판토마임도 세트와 의상, 스토리라인이 들어가면 연극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뮤직 홀측에서는 연극의 기본적 조건인 세트와 장면전환이 없는 공연은 연극이 아니라고 맞섰다. 검열은 유명무실했다. 드라마 대본을 치안판사에게 보내기로 되어 있었지만 보내지 않거나 보내더라도 치안판사의 부족으로 대부분이 검열하지 않았고, 뮤직홀도 검열결과를 무시하였다. 뮤직 홀은 초기부터 드라마를 공연하기 시작했다.

(1) 스펙터클 드라마

초기 20여 년 동안 몇몇 뮤직 홀에서는 자연재해, 유명한 전투, 역사적 사건 등을 제재로 한 스펙터클한 드라마를 선보였다. 폭죽과 대규모의 군중신, 말등이 동원되어 관객들의 감각을 자극하였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실이나 맥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터클 드라마는 뉴스와 사건도 다루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1847년에 스타 뮤직홀은 런던 대화재와 그 재건을 다루었고, 10여 년 뒤에 볼턴의 밀스토운 콘서트 홀은 세바스토폴 공방전 (크리미아 전쟁 1853-56 당시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서방연합군의 전투)을 재현하였다. 이 연극에서는 여성가수와 코믹가수 그리고 알마전투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저녁 6시에 시작하였고, 월요일에는 두시에 마티네도 있었다.

스펙터클로 유명한 뮤직 홀은 알함브라였다. 알함브라는 1854년 <왕립 과학과 예술 판옵티콘>으로 개관했다가 2년 후에 휴관, 1858년에는 알함브라 서커스로 바뀌었고, 1860년에 뮤직 홀로 다시 바뀌었다. 4-5천석의 객석을 가진 거대한 홀로 스펙터클한 공연으로 유명했다. 1861년 프랑스의 쥴 레오타르(Jules Leotard)는 객석에서 무대까지 바를 매달고 관객들의 머리위에서 공중그네 묘기를 선보였다. 아름답게 분장한 200여 명의 발레리나, 40여 개의 샹들리에 아래서 60여 명의 오케스트라 멤버가 출연한 코르 드 발레도 화제였고, 위에서 탱크로 물을 쏟아부은 ‘ 타이타닉 폭포’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여러 개의 작은 바에서 술마시는 관객들의 소리가 더 컸다. 지하에는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캔틴(canteen)이 있었고 여기서 발레리나들은 남자손님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1859년에는 한 발레리나가 부족한 출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매춘을 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알함브라의 발레는 매춘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리즈에 <카지노>라는 뮤직 홀을 개관한 조셉 홉슨은 코르 드 발레를 기획하였고, 1866년에는 미국의 민스트럴 쇼단인 <크리스털 민스트럴>을 초청하였다. 맨체스터와 브래드포드에서도 발레가 등장하여 1870년대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는 비용 때문에 대형 홀에서만 가능했다. 1892년에 개장한 맨체스터의 팰리스 홀은 런던 자본으로 발레를 공연하였다,

뮤직 홀은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알마전투의 파노라마 신에서는 H.S. 맥클로드라는 역사학자가 나와 군사전술, 전투의 발전, 공방전의 개요, 무기 등에 관해 해설하였다. 기술적 혁신에 대해 강의하여 최신 과학의 동향을 알기 쉽게 전달한 것이다. 특히 스타 뮤직 홀의 토마스 샤플스(Sharples)는 그런 사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48년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던 이민의 장단점을 해설하였고. 디오라마를 사용하여 마이크로스코프, 전기마그네틱 전신장비도 소개하였다.

알함브라 버라이어티 극장(출처 : en.wikipedia.org)
알함브라 버라이어티 극장(출처 : en.wikipedia.org)

1844년에는 보텐(Botten)이라는 물리학자가 스타 뮤직 홀에서 베니스와 홍콩을 소개하는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샤플스의 관심은 교육보다는 오락에, 과학적 사실보다는 오락적인 장난감이나 스펙터클로 접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뮤직 홀이 없었다면 볼턴의 노동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나 새로운 발명품, 외국에 대한 지식이나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지식의 전달은 영국사회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1860년대에 교육프로그램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의 교육기회가 증가했고 뮤직홀이 이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펙터클 드라마도 1860년대에 사라졌다. 몇몇 홀들이 계속했지만 이는 디오라마나 살아있는 배우들이 동작을 정지하고 일정한 포즈를 취하는 동작인 타블로 비방(living pictures)을 보여줄 뿐이었다. 디오라마로 전쟁신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1866년 2월 조셉 홉슨은 역사적. 우화적 타블로를 선보였고, 나일전투와 넬슨의 죽음을 디오라마로’ 재현하였다. 그러나 디오라마도 점차 감소하였다.

스펙터클 드라마는 전장에서 전기적 장치와 전보를 통해 들어오는 전황과 사실적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연극공연을 금지한 1843년의 공연법은 관에 못을 박은 꼴이었다. 지방의 극장들은 이런 연극이 값비싼 법적 댓가를 치루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극을 공연한 많은 극장주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특수효과와 스펙터클 제작비는 점점 경영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뮤직홀 경영자들은 드라마에서 이탈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서서히 작은 이야기, 판토마임, 코미디와 발레공연으로 바꾸어 나갔다.

(2) 스케치

뮤직 홀에서는 스펙터클한 드라마를 짧은 토막극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를 <스케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역시 공연법 위반소지가 있었고 연극계의 반발을 샀다. 연극배우들에게 연극은 뮤직 홀에서 공연할 질낮은 오락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미국 보드빌에서는 스케치를 플레이렛(playlet)이라고 불렀는데, 이와 관련한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를 규제하는 공연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케치는 책으로 말하자면 다이제스트나 문고본 같은 형식으로 긴 내용을 축약해서 짧은 연극으로 만든 것이었다. 스케치는 점점 늘어갔다. 1868년에 불과 4%에 불과했지만 1899년에는 20%까지 증가한다. 내용은 주로 코믹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고, 멜로드라마와도 유사했다.

드라마에 대한 연극계의 비판에 대해 뮤직 홀 경영자들은 모호한 법의 허점을 파고 들었다. 1843년의 개정공연법 23조에는 모든 비극, 희극, 소극, 오페라, 벌레타, 막간극, 멜로드라마 또는 무대와 유사한 공간에서 ‘기타 엔터테인먼트’를 공연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기타 엔터테인먼트의 범위가 애매했다. 뮤직홀에서는 이를 최대한 확대해서 해석하려고 한 반면, 연극관계자들은 문자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했다. 갈등은 피할 수 없었고 이들은 번번히 충돌하였다. 당시 가장 탁월한 배우이자 경영자였던 벤 웹스터는 찰스 모튼을 공연법 위반혐의로 제소하였다. 뮤직홀에서 판토마임과 대화극을 공연하면서 무대, 세트, 의상, 스토리 라인을 사용한 연극적 공연을 했다는 이유였다. 반면 뮤직홀에서는 이를 부정했다. 이는 드라마 이론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번졌지만 문제해결에는 실패했다. (Victorian Music Hall 141-142)

뮤직 홀은 난감했다. 대화가 들어간 연극을 공연하면 극장에서 항의가 들어왔고,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수준이 낮다고 불평하였다. 결국 뮤직홀에서는 1843년 이전의 전통으로 복귀하여 연극은 공연하지 않기로 잠정 결정한다. 모튼은 미니연극과 스케치를 공연하였다고 하여 법정에 불려나간다. 알함브라 뮤직 홀의 프레데릭 스트레인지는 발레를 공연하였다고 해서 소환되었다. 발레에는 플롯이 없는 발레 디베르티시망, 즉 볼거리 위주의 발레와 이야기가 삽입된 발레 닥시옹이 있는데 스트레인지는 발레 닥시옹을 포함하였다고 해서 소환된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스트레인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양측은 이 문제는 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법은 늘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법을 개정하는 것이었지만 법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뮤직 홀은 계속 발레 닥시옹과, 스케치, 오페라 등을 공연하였다. 혹시라도 법정에 불려가면 차라리 적은 벌금을 무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880년대에 스케치 배우들과 극장주들은 뮤직 홀에서의 드라마 공연을 제한하자는 취지의 공연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고귀한 연극이 술과 담배, 음식을 먹는 시끌벅적한 삼류 공연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뮤직 홀 관계자들은 성숙한 관객들은 극장으로 갈 것인지 뮤직 홀로 갈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관객들이 스케치를 보는 동안에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공연에 몰입하고, 오히려 웨이터들을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알함브라 뮤직 홀의 경영자 존 홀링스헤드는 모든 공연장은 관객들이 원하는 시간에 ,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연법 개정주장은 제삼자로부터도 제출되었다. 런던 시의회는 이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한다.

1892년 3월 <극장과 엔터테인먼트 공간에 관한 특별위원회>가 열렸다. 런던과 지방의 치안판사, 경찰관, 뮤직홀 소유주, 극장주, 배우, 가수 등이 참석했다. 과거와는 논쟁의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극장주들은 원칙적으로 스케치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길이, 기술적 요구와 출연자수를 연극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제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1891년에 런던 시의회(LCC)가 20분, 6명을 제안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반면 뮤직홀 소유주들은 출연자수에는 동의하였지만 시간을 40-50분으로 늘리자고 제안하였다. 위원회는 뮤직 홀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레와 스케치를 6명 미만의 출연자가 40-50 분동안 공연하는 내용으로 타결되었고, 일반 시민들도 뮤직홀측에 동조하였다.

이 법도 1912년에는 지역의 치안판사가 뮤직홀에 연극공연을 허가하기 시작함으로써 뮤직 홀에서의 드라마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3) 판토마임

판토마임은 17세기에 시작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대중연극이었다. 작가 막스 비어봄은 판토마임을 ‘영국인이 창안한 유일한 예술형식’이라고 말했지만, 판토마임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의 인기극단이었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시작된 것이다. 판토마임은 영국의 연극이라고 불릴만큼 영국에서 많이 공연되었고,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 각광을 받았다. 판토마임에는 시대별로 스타들이 있었다. 18세기에 판토마임을 인기장르로 만든 건 <거지 오페라>의 제작자 존 리치(Rich)였다. 그는 스스로 대사없는 할리퀸(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아를레키노)역을 맡아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함으로써, 판토마임의 기초를 닦았다. 18세기 중반에 데이비드 개릭은 드루리 레인에서 판토마임에 대화를 넣었다. 칙허극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19세기 초반에는 드루리 레인과 코벤트 가든에서 활약한 조셉 그리말디(1778-1837)는 할리퀸을 더욱 개량하였고, 시골뜨기에 불과했던 광대(클라운)를 도회풍의 세련된 스타로 변경시켰다.

크리스마스 판토마임 포스터(출처 : en.wikipedia.org)<br>
크리스마스 판토마임 포스터(출처 : en.wikipedia.org)

1843년 공연법 개정이후에는 대사가 들어가고 마술, 동화, 동물쇼 등이 삽입된다. 실제 동물이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당나귀가 배우를 태우고 , 배우들은 동물분장을 하고 등장하기도 하였다. 시각적 효과를 노려, 한 장면이 서서히 다른 장면으로 변하는 전환무대(Transformation Scene)가 사용되었다. 젠더 바꿔치기에 의해 여성들이 남성역할을 담당하면서 다리를 노출하기 시작하자, 남성관객들의 관심도 높아진다. 무대는 점점 스펙터클한 세트와 의상, 분장등으로 화려해지고 제작비는 급등한다.

- 뮤직 홀 배우와 판토마임

판토마임은 원래 어린이용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판토마임은 크리스마스 오락이나 어린이용 연극이 아니었다. 1840년경부터 판토마임은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에 보는 공연이 되었고 점점 가족오락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레가 공연되는 것처럼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판토마임이 유행했고 그 중에서도 드루리 레인의 판토마임은 유명했다. 분수가 나오고 실제 말이 등장하는 등 스펙터클한 공연으로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제작비도 매우 많이 소요되었다. 1900년에 아우구스투스 해리스가 제작한 판토마임에는 1만 파운드, 약 15억원의 제작비가 소요되었다. 정기적으로 극장에 갈 수 없는 런던 시민들은 판토마임을 관람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할리퀸(출처 : en.wikipedia.org)

판토마임은 특히 19세기 후반에 인기장르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연극배우들만이 아니라 단 레노 등의 뮤직 홀 스타들의 참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뮤직 홀 배우를 기용한 것은 판토마임이 대화보다는 코믹한 제스처에 의존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뮤직 홀 스타들의 인기를 활용할 목적이었다.

두 칙허극장은 1880년대가 되자 뮤직 홀의 스타들을 출연시키기 시작한다. 이를 시작한 것은 아우구스투스 해리스 드루리 레인 극장장이었다. 순수연극 전용극장 그것도 칙허극장이 뮤직 홀 스타를 판토마임에 출연시킨다는 건 대단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타와 스펙터클한 무대를 결합하여 관객을 유인하는 정책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었고, 이를 ‘코스모폴리탄 시스템’이라고 하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 뮤직 홀 스타들, 단 레노, 마리 로이드, G. W. 맥더모트, 베스타 틸리 등을 섭외하였다. 이들은 흥행의 보중수표였고, 이들 때문에 판토마임은 더욱 인기장르가 되었다.

판토마임은 남녀간 옷바꿔입기(Cross Dressing)가 특징이었다. 남자 소년주인공은 여배우가, 여성역은 남자배우가 맡았다. 주인공의 어머니를 데임(dame)이라고 하였는데, 단 레노는 최고의 데임이었고 마리 로이드는 최고의 남자소년 주인공이었다. 베스타 틸리 역시 1881년부터 1901년까지 20년 동안 리버풀, 글라스고우, 뉴캐슬, 맨체스터, 런던 드루리 레인 등에서 남장여배우로 출연했다. 판토마임 출연은 스타들의 몸값을 올리는 최고의 무대였다. 더구나 정기적으로 오랫동안 출연하면 더할 나위없었다. 뮤직 홀에서 쌓은 명성을 극장을 통해 더욱 높이는 것이었다.

채플린의 영화는 뮤직 홀의 판토마임을 미국에 이식한 것이었다. 판토마임은 대사가 없는 연기중심의 연극으로 무성영화 시대에 딱 맞는 연극이었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유성영화와 무성영화의 차이를 연기중심과 대사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무성영화시대를 석권한 것은 영국의 판토마임 전통과 그로부터 익힌 연기실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국의 오랜 연극전통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연기지도도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는 채플린이 본 가장 훌륭한 판토마임 배우였다. 그녀는 거리를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손짓과 눈짓 그리고 표정으로 끊임없이 재현했다.

판토마임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찰스 디킨스, 루이스 캐롤, 매슈 아놀드, 존 러스킨 등 저명한 엘리트 지식인들까지 좋아했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는 코벤트 가든의 판토마임 관람기가 나온다. 판토마임은 여왕에서부터 가난한 어린이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보편적 사랑을 받은 장르였다.

할리퀸, 할리퀴네이드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우스운 분장과 동작, 칼러풀한 의상, 마스크 등으로 인기를 모았던 유랑극단이다. 정형화된 등장인물(stock character)이 있었고, 이 중에는 아를레키노(Arlecchino)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를 할리퀸(Harlequin)이라고 하였고 할리퀸과 광대가 벌이는 촌극을 할리퀴네이드(Harlequinade)라고 하였다. 할리퀴네이드는 판토마임의 꽃이었다.

이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코메디를 슬랩스틱 코메디로 만든 것이었고, 할리퀸과 그를 사랑하는 콜럼바인,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콜럼바인의 아버지 판탈룬과 광대, 그리고 하인 피에로가 등장한다. 판토마임은 원래 무언극이었지만 나중에 대사가 삽입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프랑스 단원들이 영국에서 공연할 때 언어문제 때문에 대사없이 공연한 것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런 전통이 영국 판토마임에도 그대로 전승된 것이다. 따라서 판토마임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강조했다. 할리퀸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느 평범한 불한당이었지만 영국에선 낭만적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판토마임의 인기가 높아지자 서커스 단장들도 판토마임 공연허가를 신청했지만 공연할 무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 그러나 이들도 할리퀸 복장과 광대를 등장시켜 판토마임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판토마임이 인기를 얻었던 건 뮤직 홀 배우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 레노는 독특한 코메디 연기로 뮤직 홀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코미디언으로 불린다. 늘 우수에 찬 표정,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코미디언 단 레노(Dan Leno)는 노래와 코메디, 연기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스타였다. 그는 1888년부터 사망하는 1904년까지 16년간 드루리 레인 판토마임의 단골출연자였다. 뮤직 홀화(Music Hallization)의 한 단면이었다.

 

단 레노(1860-1904, 출처 : en.wikipedia.org)

단 레노는 뮤직 홀의 코믹 배우겸 가수였는데, 판토마임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런던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떠돌이 배우였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로 단이 4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곧 재혼했는데 재혼한 남편도 떠돌이 배우였다. 의붓아버지의 무대 이름이 레노였고 단 레노는 그의 무대이름을 딴 것이다. 단 레노는 4살 때 뮤직 홀에 데뷔하였다. 어머니의 검은 스타킹을 신고 형에게 배운 짧은 춤을 추었다. ‘ 위대한 작은 레노’라는 이름으로 뮤직 홀에서 공연을 하거나, 때로는 펍의 바깥에서 버스킹을 하였다. 8살 때 솔로로 데뷔했고 10대에는 클로그 댄스(clog dance, 탭댄스와 유사한 춤으로 나막신 모양의 신을 신고 추는 춤이었다)를 추었다.

성인으로 데뷔한 건 1885년. 이 때부터 철로간수, 형사 등의 코믹한 캐릭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노래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졌다. 판토마임에 출연하기 시작한 건 1886-7년 로열 서레이 극장에서였다. 이 공연이 인기를 끌자 1888년 드루리 레인의 경영자 아우구스투스 해리스는 단 레노를 드루리 레인 극장에 스카웃하였다, <숲속의 어린이들>이라는 작품이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둔다. 대스타 헨리 어빙이 같이 출연하였는데, 당돌하게도 뮤직 홀 작가 챈스 뉴튼은 어빙에게 단 레노의 연기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고 어빙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엠파이어 홀과 옥스퍼드 뮤직 홀 등에 겹치기 출연했고, 이미 이 때 3년치의 예약이 잡혀 있었다. 단 레노는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판토마임 배우였다. 레노는 판토마임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던 데임을 가장 중요한 역할로 만들었다. 이는 마치 가부키에서 여성역할을 하는 남자배우, 즉 온나가타(女形)의 역할이 절대적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단 레노는 1897년 미국에서 해머스타인의 올림피아 극장에 출연한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물론 좋은 평가도 있기는 하였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연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머라고 폄하하였다. 그는 잡지를 발행하고 공연을 제작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는 지긋지긋하던 가난에서 벗어나 큰 돈을 만지게 된다.

레노는 불우한 배우들을 위한 기금마련에도 헌신적이었다. 1890년에는 은퇴배우들을 위한 테리어스 연합회를 설립하였고, 뮤직 홀 자선기금(Music Hall Benevolent Fund)의 회장, 뮤직 홀 배우들의 모임이자 나중에 뮤직 홀 스트라이크의 주역이 된 워터 래츠( Grand Order of Water Rats)에서 1891년, 1892년, 1897년에 킹 래트(King Rat)가 된다. 이어서 뮤직 홀 예술가 철도연합회(MHARA)의 공동창립자가 된다.

그는 알콜 중독자였다. 아버지처럼 술을 매우 좋아했다. 말년에는 청각을 잃고 은퇴하였고, 1903년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화와 위로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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