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9) - 인터넷 시대 우리에게 행복이란?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9) - 인터넷 시대 우리에게 행복이란?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9.02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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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풍차마을(Zaanse Schans)(사진=김윤정)
네델란드 풍차마을(Zaanse Schans)(사진=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설파가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다.

현대사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은 사회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소셜 미디어(트위터, 페이스북)로부터 강제로 계정을 삭제 당하게 된다. 고대에 행해지던 사형과 같은 효과가 소통의 창구를 잃게 만드는 행위로 대체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사람을 사형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어쩐지 나는 이런 소셜 미디어 업체들의 막강한 영향력이 불편하고 위험하게 느껴진다(개인적으로 나는 트럼프의 지지자는 아니다. 이런 설명을 굳이 붙여야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최근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온갖 자극적인 가짜 뉴스들은 판을 치고, 세상은 점점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간다.

처음에는 멀리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좀 더 나은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결국 돈을 버는 게 가장 큰 목적이 된 소셜 미디어는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지만 제대로 된 규칙과 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현대사회 인터넷 세상의 문제들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리좀(Rhizome)이론’처럼 뿌리들이 마구 뻗어나가 더 이상 제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문명의 도구들을 발명해왔다. 그러나 그런 도구들이 인간이 직접 다뤄야만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최근 4차 혁명의 문명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마구 퍼져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이지만 그 알고리즘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게 문제인 듯하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개발한 실리콘 밸리의 전문가들이 스스로 경각심을 느껴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은 <소셜 딜레마>라는 다큐 영화를 보면, 가짜 뉴스가 여섯 배나 빨리 퍼져 나간다고 한다. 거짓 정보가 훨씬 더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게 되므로 제재 받지 않은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전달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가 없다“라는 아서 클락(Arthur. C. Clarke, 1917-1995)의 명언과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네가 상품이다”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까페에 앉아서(사진=김윤정)

인터넷 문명이 가져다 준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들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코로나 시대가 되면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이용한 라이브 스트리밍 공연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나는 지난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창작산실 지원을 받아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라는 작품으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알고리즘의 체계가 점진적으로 우리 뇌 속을 침식하고 정체성까지 바꿔놓는 세상에서 자신을 자신답게 지킬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 모습 (c)옥상훈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 모습 (c)옥상훈

인터넷 시대의 아이러니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알고리즘이 리드하고 있는 탈진실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섭게 발전한 문명을 한 번 쯤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자 하는 공연을 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인터넷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라이브 스트리밍 공연을 병행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 세상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문제에 기대어 공연해야 한다는 상황이 그야말로 너무나 컨템포러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왔던 춤, 그리고 가장 직관적으로 느껴져야 하는 현장예술로서의 고유성이 있었던 공연을 스트리밍 공연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스마트폰으로 보게 될 관객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라이브로 해외에 있는 관객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관객층 저변 확대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임하면서 국내 관객과 해외 관객들의 실시간 댓글을 모니터링해준 스태프의 도움으로 그들의 참신한 피드백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양하고 자극적이고 화려한 짧은 영상들에 익숙한 관객들이 집중력을 요하는 한 시간짜리 공연을 과연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극장을 찾아오는 관객들 이외에 다른 플랫폼으로 영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 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관람과 실시간으로 나누는 피드백과 댓글들로 그들이 공연을 보면서 어떻게 느끼고 소통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고 또 다른 소통의 장이었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 모습 (c)옥상훈

나의 지난번 작품은 인류 역사에서 ‘애플’로 상징되는 사건, 즉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뉴턴의 사과, 현대사회의 사과(스마트폰, 인터넷)를 소재로 사과를 베어 문 인류의 욕망과 행복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베어 물어 인류의 운명이 바뀐 것처럼, 현대의 인간들도 다시금 손안의 스마트폰, 달콤한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에 대한 형벌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사과의 달콤함에 빠져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선악과를 베어 먹은 형벌로 낙원을 잃고 세상으로 쫓겨난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 후예들(우리 인간들)은 과학을 찾았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은 신에게서 멀어진다. 신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줄 수도 없고 현실적인 삶을 나아지게 하지도 못한다. 인간들은 점점 눈에 보이고 증명되는 것들만을 믿게 된다. 그리고 또 세상은 산업혁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4차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사회 모두가 손바닥 안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인터넷 세상 속에서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아우토반 길위에서(사진=김윤정)
아우토반 길위에서(사진=김윤정)

세상의 새로운 문명이 하나씩 발달할수록 우리는 에덴의 동산에서 멀어져 간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의 말처럼 인간은 새로운 힘을 얻는 데는 극단적으로 유능하지만 이 같은 문명의 힘을 더 큰 행복으로 전환하는데 는 매우 미숙하다.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녔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하게 문명이 마법처럼 발전한 세상 속에 우리들의 정신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차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글로벌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 가족, 국가,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온 세상과 너무나 쉽게 소통하고 있는 이 시대, 과연 진짜 자신과의 소통이 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다운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작품 속에는 주제가 담긴 장면으로, 무용수들이 각자 진솔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솔로를 추는 장면이 있었는데 우리는 함께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마지막까지 발전시켜 나갔었다. 무용수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은 어떤 ‘무엇’이 아니라 감정의 경험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다시 재공연을 앞두고 있는 이 시간, 안무가로서 나도 나의 행복한 순간들 또는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적어 보았다.

나에게 행복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들은 이렇다.

집안 가득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매일 보던 사물들이 달리 보일 때

아르뛰르 랭보의 시구(詩句)처럼 온몸에 햇살 듬뿍 받으며 정처 없이 걷고 싶을 때

소설보다는 새로운 생각이 열리게 해주는 인문학, 철학책을 읽으며 가슴에 와 닿는 문장에 밑줄 그을 때

작가들과의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 속에 마음껏 정신적인 사랑에 빠질 때

친밀한 타인으로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잡다한 생각들을 적으며 카페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동네 까페에서(사진=김윤정)
동네 까페에서(사진=김윤정)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다시는 보지 못할 타인과 어떤 관심사를 터놓고 이야기할 때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낯선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될 만한 영감 충만한 어떤 이미지나 문구를 찾았을 때

아들과 햇살 받으며 카페에 앉아 인생을 이야기하거나 누군가를 편하게 비판하거나 분석하거나 또는 찬미할 때

먼 길 혼자 운전하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뜻하지 않은 옛날 노래를 듣고 그 노래로 인하여 옛 추억이 되살아날 때

또는 처음 듣는 음악인데 무슨 노래인지 궁금할 만큼 좋은 새로운 음악을 만날 때

사우나하고 정원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할 때

여행 갈 준비를 하면서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옷들을 입어보고 평소에 꺼리던 옷들을 과감하게 시도할 때

갑자기 서랍과 옷장을 정리하며 버릴 것들을 분류해서 버리거나 지인들에게 나눠줄 때, 입던 옷이지만 친구가 만족하는 모습을 볼 때

어린 시절 친구와 보이스 톡을 하다가 갑자기 둘 다 기분에 취해 옛날이야기를 들추며 울다가 웃을 때

엄마랑 자유롭게 발 닿는 대로 걷다가 들른 식당에서 은근 입맛이 까다로우신 엄마가 맛있어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이태리 나폴리(사진=김윤정)
이태리 나폴리(사진=김윤정)

멀리서 오랜 친구가 찾아와 주고 늦어져서 자고 갈 때, 밤이 늦도록 은밀한 수다를 떨 때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 때(단, 듣기보다 내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내 말을 경청해주고 재미있어한다고 착각에 빠질 때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너무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나 자신을 절제하기 위한 어떤 노력들을 해서 극복이 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때

소소한 일상 속에 멈추지 않는 시간을 사진으로 고정시킬 때

정말 맘에 드는 커트를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대부분 내 맘에 드는 커트는 아주 소수의 좋아요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와 논쟁이 붙어 소통 불능의 지경에 가는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그 중간지점이 보일 때, 또는 진심으로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될 때

내가 하는 일이나 아이디어에 공감해주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서 반기를 들거나 사차원적인 말을 막 하는 지예(내 작품의 무용수, 드라마투르그로 함께 작업했던)랑 생각이 통할 때

학력 또는 배경 자랑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우리 지예씨가 서울대 나와서 무용을 하는 아주 지적인 사람이라고 자랑할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볼 때

어둠을 뚫고 나온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마주할 때

영화나 공연을 보면서 맘에 안 들면 내 맘대로 머릿속에서 작품을 바꾸고, 안무를 하는 공상을 할 때

길을 잘못 들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할 때

빡센 하루를 보내고 한번 보고나면 기억도 못할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편을 볼 때

여행 중이거나 길을 걷다가 마주한 성당이나 교회에 들어가 초 하나를 켜놓고 고인이 된 아빠와 동생을 위해 기도할 때

평소에 기품(?)있어 보이는 파트너가 갑자기 모자라는 바보 연기를 할 때, 문득 연기가 아니고 그 사람 안의 진짜 바보가 묻어 나와서 보일 때

연기가 아니라 진짜 네가 보인다고 하면 더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아주 드물지만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궁금증을 자아내는 타인을 만날 때

공항 또는 기차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서로 다른 카페의 취향 때문에 논쟁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가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야말로 별로 영양가 없고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떠들고 웃을 때

그러다가 나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세상 정세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는 척하다가 진심으로 동요될 때

나도 모르던 내 자신의 약점을 들키면 아니라고 우기다가 나중에 진심으로 그 말이 맞다고 생각될 때

뒤셀도르프 라인강 노을(사진=김윤정)
뒤셀도르프 라인강 노을(사진=김윤정)

아들과 통화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진심을 다해 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다시 물어올 때

60년대, 70년대 영화를 보면서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며 그 분위기에 젖어 아주 특별하게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스스로 허락할 때

몇 번을 보아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텍스트들이 좋아서 몇 번이고 같은 영화를 다시 볼 때, 그리고 여전히 처음 보는 것 같은 새로운(?) 장면을 발견할 때, 그리고 여전히 그 영화 속에 빠져들 때(예를 들면 장-뤽 고다르,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감독들의 영화 또는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 같은 영화)

상대에게는 그다지 별것도 아닌 일인 걸 알면서도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맘껏 신나게 자랑할 수 있을 때, 별일 아닌 걸 알면서도 함께 기뻐하며 들어주는 친구를 볼 때

누군가의 일차원적인 칭찬에 별로 기쁘지 않고 누군가의 지적에 관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때, 그래서 아 내가 나이가 드는 만큼 정신도 조금은 성숙하고 있구나 라고 느껴질 때

오랜 만에 만난 친구나 지인의 인생이 큰 변화가 생겨서 삶이 달라진 사람들을 볼 때(대부분의 사람이 변함없이 똑같은 문제를 곱씹으며 같은 자리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완전히 낯선 어딘가에 가서 하루에 몇 시간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몇 시간은 카페 서빙 같은 단순한 알바를 하고 남는 시간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1년만 살아 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할 때

산책길dml 그라펜베르거 숲(Grafenberger Wald)(사진=김윤정)
산책길dml 그라펜베르거 숲(Grafenberger Wald)(사진=김윤정)

다음 생이 있다면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어볼 때

너무 좋은 작품을 보면서 아 저런 작품을 남기고 죽을 수만 있다면 하고 상상할 때, 또는 좋은 작품을 보고 가슴에서 나오는 박수를 칠 때

어떻게 보면 우리는 글로벌한 인터넷의 소통이 없이도, 스쳐 지나기 쉬운 하루하루 행복의 코드들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과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쉽게 행복을 느낄 수있는 요소들을 일상 곳곳에 심어놓고 모두가 조금 더 자기다울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 속의 한 대사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미묘한 격려. 포옹. 위안. 빵.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 소설. 영화. 뉘앙스. 예의. 미묘한 차이.

우리가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휠씬 크고 고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게 사실이란 걸 안다. 그런 작은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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