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화양연화(花樣年華) or ‘Carpe Diem’
[평론] 화양연화(花樣年華) or ‘Carpe Diem’
  • 더프리뷰
  • 승인 2021.09.1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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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훈 사진전에 붙여

“Things release their inherent ‘poetry’ when they’re considered in their spatial isolation.”

(사물은 공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살펴볼 때 자기 안에 내재된 시를 드러낸다.)

-Ralph Waldo Emerson*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Flower 02’, 2018-2021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Flower 02’, 2018-2021

[더프리뷰=서울] 홍가이 예술철학박사 = 사진가 박상훈이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타이틀로 11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신작을 선보인다. 필자는 과거에 그가 이루어낸 사진 예술가로서의 성취에 걸맞은 무엇,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변신으로 새로운 사진 예술의 지평을 열 것인지 그의 열성 팬과 애호가들, 경쟁자들 그리고 한국 예술∙문화계의 기대가 클 것이라 짐작한다.

그 중 박상훈의 <화양연화> 전시 초대장을 받는 순간 약간은 당황하고 의아해하는 프로 사진작가들이 꽤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꽃 사진은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아마추어들의 고유영역이 되어버려서, 한국의 프로 사진작가들은 꽃을 주제로 작업하는 것을 꺼려해 왔다.”고 박상훈은 고백한 바 있고, 프로 사진작가들의 금기사항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꽃 사진은 인물 사진이 동네 사진관 사진이 되고, 풍경화가 이발소 그림으로 간주되는 것과 유사한 경로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큰 부담감을 고스란히 안으면서, 박상훈 작가는 11년만의 신작 전시회를 꽃을 모티브로 결정하였다.

아마추어 영역이 되어버린 꽃 사진 작업은 대부분이 ‘예쁜 꽃’ 사진 찍기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꽃 사진 찍기를 아마추어 영역으로 간주하여 그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는 순수 예술사진을 추구하는 프로 사진작가들은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찍을까? 필자는 프로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작품을 ‘추상성’, ‘개념예술’, 여러 다른 제스처의 전위성으로 포장하여도 그들의 작품이 자본주의적 시장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상품성 즉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일지라도 현대 전위 예술세계는 이미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전위작가들끼리 게임을 하듯 그 세계에서의 시장과 교환가치 기준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언어 게임(Langauge Game)이 있듯이 사회행위로서의 예술행위도 그들만의 Art_ing Game인 것이다. 프로 사진작가들이 아마추어들의 꽃 사진 찍기를 예술행위로서 폄하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마추어들과 다르지 않게 그들도 세상을, 자연을 그리고 사물을 보고 평가하는 사진 작업을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Flower 04’, 2018-2021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Flower 04’, 2018-2021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이 당연히 있다고 프로들이 은연 중 전제하는 생각 또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과연 그런 구별의 당위성은 사진매체에 대한 정교한 예술철학적 그리고 기술적 해석에 근거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집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담을 수 없었지만 필자는 이 전시가 한국 현대 사진예술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번에 구성된 박상훈의 꽃 사진 신작을 통해 프로들의 전제가 검증되지 않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문제 제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의 문제 제기가 작가의 꽃 작품들이 전시의 의식된 목표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암묵적이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사진 및 영상 매체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새로운 사진예술의 담론을 끄집어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현대미학의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대안적 예술담론까지도 유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의 현대 미학적 판단 기준에 대한 비판을 하이데거나 그를 계승한 아감벤의 논지와는 다르게, 동양적 시각에서 도출해 내어서 더욱 의미 있고 설득력 있는 방법(methodology)으로 담론을 유도해 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화양연화의 순간으로 향하는 생명체, 꽃의 화룡점정으로서의 아침 이슬

화양연화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박상훈 작가의 작업과정을 살펴보자. 박상훈 작가는 아날로그로 축적된 노하우로 꽃 사진을 완성한 다음에 사진 및 영상에서의 후반작업(post-production)을 한다. 그 마지막 과정은 디지털 프로세스로 사진 속 꽃잎의 표면에 가상의 아침 이슬(morning dew)을 입힌다. 인위적인 가상의 디지털 이슬은 작가에게는 작품을 완성하는 사진작업의 결정적인 화룡점정으로 작업을 마무리 짓는다. 동시에 상징적으로는 꽃의 짧은 일생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에 오는 화양연화의 순간을 마지막 날의 아침 이슬로 어떻게 준비하는 가를 보여준다.

박상훈 ‘화양연화Carpe Diem Flower 28’, 2018-2021
박상훈 ‘화양연화Carpe Diem Flower 28’, 2018-2021

Art--ing이란 필자가 새롭게 만든 neologism, 즉 신조 단어이다.

프로 사진가로 명성이 높은 박상훈 작가가 한국의 프로 사진작가들이 손대기를 꺼려하는 꽃 사진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통속적인 보기(seeing-as)를 뛰어넘은, 보기(seeing)를 하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나의 눈’이라는 보기의 주체를 간헐적으로 내려놓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 즉 진아(眞我)의 눈(unalloyed eye)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남 봉은사나 도산공원, 동네를 산책하다 소박한 꽃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꽃이 피어 있는 자연 조건, 환경이라는 콘텍스트(context)에서 격리시켜 거의 현미경 레벨의 ‘들여다 보기’(intensely focused seeing)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고 사진을 찍느냐가 사진 예술의 전부이므로, 자연 속의 다른 풀,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피어 있을 때와 한 송이 꽃만 따로 격리(isolate), 확대하여 들여다볼 때, 작가는 완전히 다른 경이로움의 생명력이 묻어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기의 뷰 파인더를 통해서 세상 보기를 하는 인간주체의 정서, 감정, 즉 그만의 총체적인 감성(sensibility)을 담아내었다.

박상훈의 사진은 똑같은 한 세상의 단면을 선택하여 찍더라도, 하루 24시간의 어떤 시간대에 찍느냐에 따라 그 세상의 단면을 다 다르게 뷰 파인더에 표현한다. 그가 고집한 이른 아침, 여명의 시간대의 숲과 소나무 그리고 촌부들이 농사일을 시작하러 들판으로 또는 가로수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장면들은 그 시간대의 독특한 존재론적 분위기(ontological mood)를 잘 담고 있다(1986, 1994년 개인전 <우리나라 새벽여행>). 그는 암실에서 인위적인 개입(subjective intervention)을 하여 회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진작업의 필요성을 구태여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박상훈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말하는 순수한 모더니스트 예술가의 예술정신을 표출한 작가이며 모더니스트 사진가로서의 사진 찍기에 충실했던 작가임에 분명하다.

3명의 인물과 개 한 마리의 사진- 마지막 이미지 4개

필자에게는 이번 전시에서 꽃 작품 연작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꽃이 등장하지 않는 4개의 ‘인물’ 작품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중 첫 번째 작품(화양연화-People 01)은 작품 하단에 전체 작품을 프레임하는 직사각형 프레임 속의 새 프레임을 만들어 배경의 야경과는 단절된 장면과 3명의 인물을 삽입한다. 이 사진 작품 외에 다른 3개의 비슷한 사진이 더 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는데, 이미 50여 년 전에 깊은 감동으로 전율하며 본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의 영화 <Seventh Seal>(1957)의 마지막 장면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1’, 2018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1’, 2018

오늘날 전 세계가 코로나 판데믹의 공포 속에 갇혀 있듯이 중세의 유럽에서 판데믹의 공포(흑사병) 속에서 죽음을 피해 한 가족이 마차를 끌고 길을 떠난다. 판데믹이 번지는 세상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피난 여행을 떠나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날 결국은 죽음이라는,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를 머리부터 온 몸에 길게 두른 신(?)을 만난다. 주인공 남자인 3인 가족의 가장은 죽음에게 지면 죽음을 순순히 따르겠다는 조건으로 내기 체스(장기)를 제안한다. 결국 게임에 지게 되고… 죽음이 앞서서 인도하는 산등성을 따라 죽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그림자 영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2’, 2018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2’, 2018

물론, 박상훈 작가의 사진 작품이 겉으로 보기에 베리만의 그것과 이미지가 유사하지 않지만, 필자는 존재론적 분위기(ontological mood)가 유사하다고 느꼈다. 이 사진의 배경을 이루는 잠들 줄 모르는 끝임 없는 욕망과 새로운 욕망의 창조와 충족의 전쟁터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꽃, 마천루로 하늘을 가득 메운 대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하단에 새롭게 등장하는 하얀 새 프레임 속에, 모든 것에서 단절되어 환경이나 맥락이 없는 흰 바탕의 세상에 비현실적인(unreal) 갈 곳 없는 무인도 같은 하얀 프레임 안에서 외롭게 보이는 3명의 인물들. . . 필자한테는 하얀 프레임 속의 새 프레임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속에서의 마지막 장면, 마지막 죽음의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그림자 영상처럼, 박상훈의 사진 작품 속의 하얀, 세상(World)이라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물체들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망으로서의 세상에서 동떨어져서 세상의 모든 관계망에서 해방된(?) 아니면 격리/단절되어 어떤 인간 세상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거대 대양, 현대문명의 허무주의의 대양 속의 한갓 조각배 위에 둥둥 떠서 어떤 비전도 없는 미래, 그리고 죽음으로 향하는, 아니 이미 그 죽음으로 향하는 걷기가 끝난 상태에서 그 마지막 길을, 네거티브 사진 상태를 그림자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다른 해석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현대 문명의 꽃인 대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배경 속의 자본주의적 욕망의 용암(molten magma)이 마치 지구의 지하 깊숙한 중심부에서 들끓는 욕망의 회오리가 파도의 심연(abyss)에서 벗어나, 다행히 벗어나, 비록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새 프레임이지만 이 새 프레임의 공간을 노아의 방주 삼아 저 더러운 욕망의 열기로 밝히는 도심의 세상을 배격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뭐, 이런 해석도 가능할까? 어떤 해석도 모두 다 관찰자의 몫일 것이다. 전자건 후자건 또는 완전히 다른 대안적 해석이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은유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새로운 시작도 그것을 위한 죽음도 다 같이 상징적으로 그리고 또 실제적으로 담아낸다.

필자의 논지가 틀리지 않다면, 현대 과학기술 산업문명의 발전이 그 최대치의 순간에 왔을 때, 그것이 현대 문명의 발전 동력(기운)의 화양연화의 순간이고, 그때부터는 바로 그 발전동력의 기운이 서서히 수축하기 시작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화려한 대도시의 밤 풍경은 현대문명의 꽃이라는 메토니미의 상징으로 충분하기에 이사진은 화양연화의 순간의 현대문명의 메토니미적 꽃이다. 화양연화의 순간, 그 순간부터는 죽음의 응축점(블랙홀)을 향한 걷기가 시작된다. (물론 그 블랙홀의 응축점을 지나면, 다시 싹 틔워져 새로운 화양연화를 향한 기운이 생동하게 되지만!)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Seventh Seal>은 약 천 년의 교황이 상징적 우두머리로 군림한 종교적 질서의 세계가 흑사병 판데믹의 여파로 중세 유럽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순간의 에피소드와 또 다른 시각에서의 세계의 정화(淨化, cleansing through erasing)를 잘 보여준다. 만약 필자의 해석이 틀리지 않다면, 작가가 사진 한 장으로 코비드19 판데믹이라는 21세기판 페스틸런스(Pestilence/Pandemic)가 지난 6-7 세기 동안 계속 문명발전이라는 동력의 기운을 키워 꽃피우다가 화양연화의 순간을 이미 맞아 수축과 응결의 죽음의 블랙홀을 향한 걷기를 시작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박상훈은 우리 시대의 혼탁한 사진 및 영상매체의 타락에 대안적인 세상 보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진가로 보인다. 아니 사진작가의 범주를 넘어선, 매체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서 사진 영상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사려 깊은 현대인이다.

*Ralph Waldo Emerson, cited in Cavell on Film, 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W. Rothman, Albany, SUNY Press Charney, L., published in 2005, p.55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5’ 2018
박상훈 ‘화양연화 Carpe Diem People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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