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잡문집-1] ‘탱고의 전설’ 두 사람의 짧은 만남
[이종호 잡문집-1] ‘탱고의 전설’ 두 사람의 짧은 만남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1.09.25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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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졸라가 가르델의 마지막 투어에 동행했더라면?

*편집자 주 = 오늘부터 본지 이종호 편집인의 글을 연재합니다. 적당히 불규칙한 간격으로 실릴 그의 글들은 아주 개인적인 감상(感想 感傷)과 어린 시절의 추억담부터 그가 이끌어온 무용축제 이야기, 문화시론, 각종 제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등 특정 주제와 무관하게, 그리고 두서없이 실릴 예정입니다. [이종호 잡문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도 자신의 글에 대한 과도한 겸손이나 자기비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루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좀 더 개인적인 동기와 정서, 생각들은 추후 적절한 시기에 기술할 예정입니다.

[더프리뷰=서울] 만일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1992)가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90-1935)의 마지막 순회공연에 동행했더라면? 그랬다면 전통 탱고에 클래시컬 음악과 재즈를 혼융한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Nuevo Tango)’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 (c)위키미디아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 (c)위키피디아

1930년대 뉴욕의 아르헨티나 이민

1930년대 초 뉴욕에는 아르헨티나 이민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그중에 마르델플라타 출신인 비센테 ‘노니노’ 피아졸라(Vicente ’Nonino‘ Piazzolla)와 아순타 마네티(Assunta Manetti) 부부가 있었다. 이탈리아 혈통인 이들 부부에게는 아스토르라는 이름의 외아들이 있었는데 1934년 3월에 만 13세가 되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1920년대 뉴저지로 이민을 왔다. 대공황 기간인 1930년에 잠깐 아르헨티나로 돌아갔었지만 금세 다시 미국으로 복귀했다. 아버지 돈 비센테는 친척의 소개로 맨해튼에서 이발사로 일하면서 지금의 그리니치 빌리지 구역에 아파트를 하나 얻었다. 아들인 아스토르는 재즈를 매우 즐겨 들었다. 아버지는 그가 아홉 살 나던 해에 반도네온을 사주었다.

‘소르살(Zorzal, 스페인어로 노래지빠귀, 가르델의 별명)’이 연주차 뉴욕에 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 돈 비센테는 알고 지내던 가르델 악단의 편곡 담당자 투치(Tereg Tucci)를 통해 가르델에게 조그만 목공예품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그 전달 심부름은 소년 아스토르의 몫이었다.  

악단 일행이 머물고 있던 보자르(Beaux-Arts) 건물에 도착했을 때 아스토르는 가르델의 반주자 중 하나인 카스테야노스(Castellanos)와 부딪혔다. 그는 숙소의 열쇠를 잊고 나온 참이었다. 그는 몸집이 작은 소년에게 대피용 외부 돌출계단을 타고 올라 창문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카를로스 가르델
카를로스 가르델 (c)위키피디아

그렇게 해서 소년은 카를리토스(Carlitos, 카를로스 가르델의 애칭)를 만났고, 이 스타 가수는 소년이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가르델 역시 프랑스 출신의 아르헨티나 이민이었다(그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아르헨티나로 옮긴다. 본명 샤를 로뮈알 가르데스 Charles Romuald Gardès). 아스토르는 그에게 기타를 들고 있는 가우초(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 그림이 그려진 목공예품을 건네주었다.

가르델은 아스토르를 통역 겸 뉴욕 구경 가이드로 ‘입양’했다. 그는 소년을 앞세우고 메이시나 플로샤인 같은 백화점에 들러 옷과 구두를 샀다.

가르델은 어린 소년이 반도네온을 연주할 줄 안다는 게 사뭇 신기했다. 비록, 아스토르의 회상에 따르면, 그의 첫 연주를 듣고 난 뒤 “마치 갈리시아 사람이 탱고를 연주하는 것 같군”하면서 웃었다지만 말이다.

반도네온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아스토르 피아졸라 (c) fundacioncarlosgardel.org
반도네온을 들고 포즈를 취한
어린 시절의 아스토르 피아졸라
(c) fundacioncarlosgardel.org

소년과 스타 가수의 인연

어느 날 그들은 54번가에 있는 산타 루치아라는 이탈리아 식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가르델은 뭔가 한 가지 아쉬운 듯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 산타 루치아에는 크로케가 없었던 것이다! 아스토르는 즉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 우리 집에 가서 먹으면 어떨까? 가르델은 즉시 좋다고 했고 그들은 함께 92번가에 있는 피아졸라의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다. 물론 크로케를 포함해서, 라비올리 등등... 이 자리에 가르델은 뉴욕에 사는 아르헨티나인 12명 정도를 초대해 ‘크리올 바비큐 파티(un asado criollo)’를 베풀면서 아르헨티나식 가정식 만찬을 흡족하게 즐겼다. (크리올은 유럽계 중남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찬이 끝난 후 가르델은 노래를 하러 갔다. 피아노 반주는 카스테야노스, 반도네온은 아스토르였다. 하지만 아스토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저녁 카스테야노스는 몸이 좋질 않아서 연주를 포기해야 했고 따라서 아스토르 혼자서 반주를 도맡아야 했다. 그렇게 가르델은 <그대가 날 사랑하게 되는 날 El día que me quieras>에 나오는 모든 노래를 아스토르의 반도네온 반주만으로 불렀다. 

어쨌거나 이런 인연으로 소년 아스토르는 가르델의 영화 <그대가 날 사랑하게 되는 날>에 출연하는 영광을 얻는다! 비록 신문팔이 같은 단역이었지만 말이다.

영화 '그대가 날 사랑하게 되는 날' 무대에 오른 아스토르 피아졸라 (c) fundacioncarlosgardel.org
영화 '그대가 날 사랑하게 되는 날'에 출연한
아스토르 피아졸라(맨 좌측 소년)
(c) fundacioncarlosgardel.org

얼마 후 그는 가르델에게서 전보 한 통을 받는다. 다음번 순회연주에 반도네온 연주자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투어가 될 연주일정이었다. 아시다시피 가르델은 연주순회 중이던 1935년 6월 24일 콜롬비아의 메데인(Medellín)에서 비행기 폭발사고로 일행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사고 희생자는 16-17명으로 기록돼 있다. 40대 중반이라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가르델에게 보낸 아스토르의 편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카를로스 가르델의 무덤​​​​​​​(c) lookphotos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묘지
(c) lookphotos

아스토르는 40여 년이 지난 후, 그 일에 대해 다소간 유머 섞인 문체로 이렇게 썼다. 

“그것은 1935년 봄, 내 나이 열네 살이 되던 때였어요. 어른들은 허락하지 않았지요.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연주자 조합에서도 나같은 어린아이와 함께 다니는 걸 반대했구요. 카를리토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살아난 거네요! 만일 그때 당신을 따라갔더라면 지금쯤 반도네온이 아니라 하프를 뜯고 있겠지요. 지금 여기선 당신의 음반들이 밤마다 열심히 연습한다는 소문이 돌아요. 그래서 당신이 매일매일 노래를 더 잘하는 거라고 말이죠...” - (197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피아졸라가 가르델에게 쓴 편지. 아르헨티나 일간지 <클라린 Clarín>에서 인용)

만일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탱고가 아니라 재즈 뮤지션이 됐을까? 13-14세 소년에게 가르델 같은 신적인 존재를 만난다는 게 어떤 의미였을까? 만일 가르델을 따라 마지막 순회연주 길에 동행했다면 아마도 비극적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그걸 생각해보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다 운명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아스토르 피아졸라 퀸텟(Astor Piazzolla Quintet)의 연주회를 어린아이처럼 기다리면서 거의 날마다 뉴욕의 이민자 사회, 탱고와 반도네온, 가르델의 준수하고 수려한 용모와 젠틀하면서도 약간은 마초스러운 미성, 그가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노래하는 낡은 비디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선창가, 그리고 1988년 1월 리옹 오페라발레 내한공연 때 처음 들었던 피아졸라의 음악, 그후 미친 듯이 사 모았던, 지금은 사뿐히 내려앉은 먼지를 쓰고 꽂혀 있는 그의 음반들을 떠올리고 있다. (공연 내용이 궁금한 독자께서는 더프리뷰 8월 3일자 및 8월 31일자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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