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0 뮤직홀(6)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0 뮤직홀(6)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2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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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 비방 - 예술과 외설사이
벨라스케스, 로크비 비너스(출처 : en.wikipedia.org)<br>
벨라스케스, 로크비 비너스(출처 : en.wikipedia.org)

타블로 비방이란?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은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배우나 모델이 어떤 동작을 취하다가 정지한 뒤에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원본을 동일하게 재현한 뒤 정지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타블로의 기본조건은 사람의 신체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그림(Living Pictures), 즉 활인화라고 번역한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정지화면과 같은 것인데, 텔레비전과 영화가 탄생하기 전에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동작과 이미지를 혼합한 오락이었다. 예술작품을 재현하는 경우도 있고, 행진이나 축제에서 어떤 동작을 중단하고 정지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의미를 지니는 동작, 아름다운 동작, 예술적 장면 등 특별한 국면에서만 이루어진다.

요한 하위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군주의 입성식(Royal Entry- 중세시대에 군주가 어떤 도시를 방문할 때 벌였던 환영이벤트)이나 축하연에서 타블로 비방을 벌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런 경우의 타블로는 거대 이벤트에서 행해지던 의례였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폴리에서의 타블로 비방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스무 살쯤된 영국인 아가씨가 ‘ 머리를 풀고 숄 몇 개를 이용하여 자세와 몸짓, 표정 등을 바꾸면서 우리가 정말 꿈을 꾸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서 있는, 무릎 꿇은, 누운, 진지한, 슬픈, 짖궂은, 방탕한, 회개할 준비가 된, 유혹하는, 겁먹은 모습 등이다. .. 늙은 기사는 이 행사를 위해 조명을 들고, 온 영혼으로 이 대상에 자신을 바친다. ’(『이탈리아 여행』, 272). 사진이나 그림의 모델이 취하는 동작같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행하는 놀이 나아가서는 예술이다. 타블로는 사람이 만드는 오락이지만 기술의 힘이 필요했다. 이미 1787년(괴테는 1786년부터 1788년까지 1년 6개월 동안 당시 유행하던 그랜드 투어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각지를 방문하였다.)에 조명을 사용하여 타블로의 효과를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타블로 비방의 원형은 조각상에서 찾을 수 있다. 힘이 넘치는 조각상들은 남성들의 동작이 정지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조각은 움직임속의 정지다. 타블로는 이미 중세시대부터, 더 멀리는 로마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17세기 후반 영국에서도 귀족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타블로 비방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타블로 비방은 더 이상 귀족들의 사적 놀이가 아니었다. 타블로는 1830년대부터 1920년경까지 많은 지역에서 유행했다. 프랑스의 극장에 침투했고(poses plastiques) 영국의 드루리 레인의 멜로드라마에도 들어갔으며, 미국에서는 작은 시골마을의 축제에서까지 사용될 정도로 인기있는 놀이였다. 독일의 유명한 코메디 배우였던 카를 발렌틴은 왁스조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움직여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타블로와 반대의 과정이지만 신체의 정지와 움직임을 사용한 신체표현의 형식이었다. 타블로 비방은 지금도 일상적 동작에서부터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도 「민중의 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 ?)라는 합창 장면 바로 뒤에 타블로가 나온다. 이 노래는 뮤지컬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많은 사람이 출연하는 타블로 형식이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여러 오락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830년대에 플레저 가든에 등장하였고 벌레스크나 발레에도 사용되었다. 뮤직 홀에서는 1870-80년대에 유행했고, 1890년대에 피크를 이루었다. 1890년대의 타블로 비방은 팰리스 버라이어티 극장의 공연이 유명했고, 엠파이어, 티볼리, 알함브라 등 많은 메이저 홀에서도 공연되었다. 대부분 여배우가 살색의 스타킹만을 착용한 반누드로 등장하여 남성들의 관음증을 자극하였고 외설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 시기를 ‘외설의 90년대(naughty nineties)'라고 불렀다. 타블로 비방은 대부분 회화나 조각작품을 반누드 상태의 배우가 정지동작으로 재현하는 것이었고,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이 결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을 낳았다. 로열 아카데미의 마커스 스토운은 ‘ 미술이 지향하는 의도에 걸맞는 공연’이라고 칭찬했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비판적이었다. 비평가들은 타블로 비방이 젊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며 순수한 것을 타락하게 하는 비도덕적인 오락이라고 하였다.

타블로 비방(출처 : en.wikipedia.com)

타블로는 기술발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초기에는 인간의 신체만으로 대상을 재현하거나 동작으로 정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무대기술, 특히 조명의 발달로 마치 예술작품과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커튼이 올라가면 30초 정도 무대위에 정지상태로 있는 배우를 볼 수 있었다. 1분 내외의 18개의 ‘그림’을 계속 보여줄 수도 있었는데, 주로 클래식 작가의 작품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영자들은 이를 예술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순히 인물의 정지동작만이 아니라 조명, 음향, 세트 등이 배우의 동작을 강조하였고 때로는 장면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해설도 추가되었다. 특히 중요했던 것은 조명이었다. 움직이는 파노라마와 같은 이런 스펙터클은 뮤직홀 인기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관객들은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보러 갔다. 인기극장과 비인기극장의 차이는 스펙터클이었다

타블로 비방은 팰리스 극장에서 시작되었다. ‘ 사보이 오페라’로 유명했던 임프레사리오 리차드 도일리 카르트(Richard D'Oyly Carte)가 1891년에 세운 극장으로 최근에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소유하기도 했었다. 사보이 극장이 길벗과 설리반(G&S)의 그랜드 오페라에 중점을 둔 반면 팰리스 극장은 경가극의 진흥을 목표로 한 극장이었다. 1891년 개관 당시의 이름은 로열 잉글리쉬 오페라 하우스였고 개관작품은 길벗과 설리반의 <아이반호>였다. 카르트는 개관작품의 성공을 위해 더블 캐스팅과 스펙터클한 무대 등, 모든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반호> 이후의 후속작품이 준비되지 않아 폐쇄했다가 11월 재개관하였지만 다시 폐쇄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사라 베르나르에게 임대한다. 그러나 베르나르도 손해를 보고 손을 떼고 만다. 이어서 드루리 레인을 경영한 바 있던 아우구스트 해리스를 영입했는데, 해리스는 이름을 팰리스 버라이어티 극장으로 바꾸고 뮤직 홀 스타일의 경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 이번에는 찰스 모튼이 경영을 맡는다. 모튼은 프롬나드의 설치를 신청했지만 런던시의회가 매춘을 우려하여 불허하자 모튼은 타블로 비방을 시작한다. 팰리스 극장은 이렇게 타블로 비방의 본거지가 된다.

예술과 외설 사이

팰리스 버라이어티 극장에서는 8시에 공연을 시작하여 춤,노래, 서커스, 코미디, 동물쇼 등을 공연한 다음에 타블로를 맨 뒤에 배치했다. 관객들의 기대를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런 배치방식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타블로를 9시대에 배치하면 매춘부들의 활동시간과 겹치기 때문이었다.

팰리스 극장의 타블로에 대한 외설논란이 발생한다. 젊은 여성들을 선정적인 복장의 반나체 상태로 출연시켜서 남성들의 관음증을 자극한다는 비판이었다. 이는 곧 매춘과도 연결되어 여성들의 강한 비판을 받는다. 전국경계연합회(National Vigilance Association, NVA)와 영국여성금주연합회(BWTA, British Women's Temperance Association)가 비판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타블로가 여성들을 타락과 파멸로 이끌고 있는 ‘우매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임무는 이 오락의 정체를 폭로하고 여성들을 파멸로부터 구출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타블로가 모두 다 외설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요한 폰 다네커의 <아리아드네>라는 조각작품은 사자상위에 여성이 반라상태로 앉아 있는 모습인데, 여성의 누드가 문제가 되었다

1894년에 여성 기독교 금주연합회 회장이던 헨리 서머셋 부인은 팰리스의 타블로를 비난한다. 매춘이나 금주와 같은 강도의 비판은 아니었지만 도덕을 타락시키고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하는 외설이라는 비판이었다. 예술과 외설사이의 논란이 벌어졌다. 어디까지가 적정한 오락이고 어디까지는 외설인가? 의회에서도 모튼에게 편지를 보내 타블로 비방의 내용을 개선할 것을 유구했다. 화들짝 놀란 모튼은 외설적인 타블로 비방을 폐지했다. 서머셋 부인은 팰리스 극장의 주류판매허가를 비판하였고 타블로가 예술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타블로는 장 레옹 제롬의 <무어여인의 목욕> 이었다. 백인 여주인의 목욕을 흑인노예가 돕는 그림으로 에로틱한 여인의 누드를 백인과 흑인, 주인과 노예, 풍만한 여성과 가냘픈 신체를 대비시켜 표현한 그림이다. 서머셋은 미술관의 조각이나 그림과 달리 타블로로 표현한 <무어여인의 목욕>은 예술적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 누드는 가짜 누드이고,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예술로 승화하지 못한 천박한 것이다. 천재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해 왔다. 여성의 고전적인 몸과 타블로가 표현하는 조악한 신체의 차이를 정교한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타블로의 모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속성을 표현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서머셋 부인의 친구 W.A. 쿠트(남성)도 이에 동조하였다. 하나는 진짜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모방이다. 그림에서는 예술가의 영혼과 이상을 느낄 수 있지만 타블로에서는 사회적 . 경제적 상황에 의해 오염된 모델의 인성이 드러날 뿐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모델들의 인성이 타블로에도 그대로 전이된다는 것이었다 . 서머셋 부인의 비판은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으로, 여성을 남성의 지시에 순종하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쟝 레옹 제롬, 무어여인의 목욕(출처 :wikidata.com)<br>
쟝 레옹 제롬, 무어여인의 목욕(출처 :wikidata.com)

종교인도 비판에 가세했다. 윌슨 칼릴(Carlile) 목사는 팰리스 극장장 찰스 모튼에게 젊은 여성이 매일 밤 대중들앞에 나서서 몸을 내보이는 건 악에 오염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튼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만약 몸매가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 허드렛일을 하면 하룻밤에 5파운드의 개런티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칼릴 목사의 시각은 대중 앞에 서는 여성들이 대중들의 음탕한 시선에 오염될 수 있다고 보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버나드 쇼와 시인 아더 시몬스(Arthur Symons) 같은 남성 엘리트들은 이런 비판을 비판했다. 특히 버나드 쇼는 쿠트를 애송이라고 칭하면서 자기와 같은 훈련된 전문가가 보기에 타블로는 대상을 새로운 것으로 변용할 수 있고, 특히 기술은 모델자체를 변용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무대 디자인과 조명 등의 기술적 작업이 모델들을 예술적 존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델들은 타블로를 통해 정숙함, 여성스러움 같은 고전적 교양과 문화를 배울 수 있다. 관객들은 타블로의 누드가 실제로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살색 타이츠를 입은 것임을 안다. 관객은 주어지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구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더 시몬스도 모델들이 그렇게 쉽게 악에 물들지 않으며 돈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모델로 출연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평가 프레데릭 웨드모어도 타블로를 옹호하였다. 그의 주장은 타블로의 누드는 실제의 누드가 아니고 , 타블로는 문명화된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타블로는 고전적인 인간형태를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논란에 대해 런던시의회 산하 <극장과 뮤직홀 위원회>는 타블로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여기서는 매춘문제와는 달리 규제나 금지가 아니라 권고가 나왔다. ‘타블로는 누드가 아니라 타이츠를 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 Music Hall& Modernity, 143-180)

스펙터클

타블로 비방을 전문적으로 하던 공연단도 있었다. 에드워드 킬리야니( Edward Kilyani)의 공연은 특히 유명해서, 그가 1894년 2월 팰리스 극장을 떠날 때는 많은 모방팀들이 등장했다. 무대기술자였던 W.P. 단도(Dando)도 타블로 공연단을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들은 다수의 단원을 출연시키고 기술을 이용하여 스케일이 큰 , 스펙터클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1893년 킬리야니는 팰리스 극장에서 타블로 비방을 공연하였다. 그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그 동안의 타블로 비방과는 다른 획기적인 쇼를 만들어냈다. < 밀로의 비너스>에서 사라진 팔을 표현하기 위해 환영(illusion)을 만들어냈다. 전기 조명을 사용하여 모델의 외모를 마치 대리석을 자른 조각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그림자를 없애고 부드러운 톤을 만들어냈다. 킬리야니의 이런 기술들은 19세기 후반의 문화를 지배하던 ‘ 시각적인 것에 대한 열광’의 표현이었다. 당시에 발명된 사진, 카메라, 매직 랜턴, 디오라마등의 시각적인 기계들이 몸을 더욱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타블로는 움직이는 장면을 포착하는 사진이나 디오라마와도 유사하다. 무대에서 벌어지던 타블로는 여기에 리얼리티를 강화했다. 그가 만든 <누드 아프로디테>에는 실제의 물을 떨어뜨려 리얼하게 만들었다.

킬리야니는 이렇게 환영과 리얼리즘이라는 상반된 특수효과를 사용하여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예술적 지식을 제공하였다. 그가 재현한 타블로 비방은 전통회화와 관련인물들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였다. 즐거움이 지식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살아있는 조각상은 고급문화와의 관련성을 강화하였다. 로열 아카데미에서는 매년 여성누드화를 전시하였고 타블로 비방에서는 이들을 재료로 삼았다. 이처럼 미적담론이나 기술의 사용은 타블로 비방의 미장센을 강화하고 더욱 세련된 예술로 발전하게 하였다.

타블로 비방은 많은 신규관객을 창출했다. 타블로 비방은 뮤직 홀 자체의 인기를 높였다. 타블로의 성공요인은 스펙터클이었다. 스펙터클은 뮤직 홀과 극장의 인기를 높이고 관객을 유인하는 최고의 장치였다. 1830년대에 스펙터클과 기술발전이 관객을 유인한 것처럼 1890년대의 타블로 비방은 전에는 뮤직 홀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던 신규 관객을 끌어들였다. 문화계, 법조계, 의학계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들어왔고, 객석에는 보석과 화려한 의상으로 번쩍거렸다. 킬리야니와 단도의 타블로 비방은 최고의 인기오락이었고 팰리스 극장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뮤직 홀’이었다

관객 자체도 스펙터클이었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 등장하는 귀족과 지식인, 귀부인들은 그 자체로 볼거리였다. 타블로 비방이 성공한 뒤 모튼은 투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이제 버라이어티 극장의 신시대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관객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관객들, 법조인. 대사, 정치인, 정부관료등까지도 가족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습니다.’ 타블로 비방은 대중들에게 고급예술 교육의 장이 되었다. 타블로의 예술적 표현을 공부하려는 예술전공 학생들도 들어왔다.

고디바 부인 (출처 : history.com)

- 라 밀로

팰리스 극장은 영화관으로 바뀌기 전까지 타블로의 중심지로 계속 남아있었다. 타블로는 킬리야니와 W.P 단도(Dando)가 벌였던 집단적 퍼포먼스에서 개인 퍼포먼스로 바뀌었다. 팬시 몬태규(Pancy Montague)는 호주 출신의 타블로 비방 아티스트로 라 밀로(La Milo)라는 예명으로 영국에서 활약했다. 타블로가 점점 개인화되어 가던 1906년에 런던 퍼빌련에서 벨라스케스의 <로크비 비너스>를 타블로 비방으로 만들어 큰 인기를 모았다. 6-7개의 모방작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가 사용한 광고문구는 ‘유일한 라 밀로’였다. 기자들은 이들 모방작들이 라 밀로의 독특한 매력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폴 몰 가제트의 W.T.스테드 기자는 열렬한 라 밀로 팬이었다. 폴 몰 가제트는 뮤직 홀의 공연들을 매춘을 조장하는 타락한 오락이라고 비난해 왔고, 스테드 기자 역시 그런 입장을 취해왔는데 1907년에 라 밀로의 공연을 보고나서부터는 그녀를 유일한 예외로 다루었다,‘ 추함과 저속함이 단조롭게 이어지는 뮤직 홀의 공연에서 라 밀로의 공연은 예외였다. 라 밀로가 그려내는 그림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차도 없을 것이다. 비지성적이고 천박한 관객들조차도 그녀의 스펙터클의 아름다움에서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스테드는 그 이후 라 밀로를 지속적으로 칭송했다. 라 밀로는 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1907년에 <고디바 부인 Lady Godiva>을 타블로 비방으로 제작했다. <고디바 부인>은 11세기에 영국 코벤트리에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으로 그녀의 남편 레오프릭이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전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다. 무언가를 훔쳐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피핑 톰(Peeping Tom)은 여기서 나온 말로 고디바 부인을 훔쳐보던 사람을 말한다. 라 밀로는 15만여 명의 군중앞에서 핑크 빛 의상과 긴 가발을 쓰고 5시간 동안 마을을 돌았다. 라 밀로는 무대를 홀에서 거리로 바꾼 것이다.

가부키 미에(출처 : artjapan.blog.jp)<br>
가부키 미에(출처 : artjapan.blog.jp)

미에와 타블로

가부키에는 미에(見得)라는 독특한 동작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은 크게 벌리고, 때로는 혀를 내밀고 발은 바닥에 굳건하게 고정한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돌리다가 정지해서 머무르는 동작이다. 팔을 흔들면서 얼굴전체를 긴장시킨 뒤 전체의 에너지를 응축시켜 보여준다. 이를 미에를 자른다고 표현한다. 이 때는 나무로 만든 쯔께라고 불리는 악기를 때려 긴장감을 높이는데, 드라마에서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효과음악과 같은 것이다. 미에는 곧 동작과 몸짓(しぐさ)에서 정지(きまり)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순간에 극적 효과를 높이고 관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渡辺保,『歌舞伎, 97-108) . 가부키는 부드러운 내용과 연기중심의 와고토(和事)와 거친 내용의 아라고토(荒事)로 나뉘는데, 미에는 대부분 아라고토에 등장한다. 이는 미에가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서 배우의 연기나 배우를 클로즈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말한다. 마치 영화의 클로즈업이나 줌인과 같다. 배우가 관객들과 최대한 가깝게 상호작용을 하고, 극의 전개를 더욱 흥미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한 사람이 하지만 두 사람 이상이 하는 경우도 있고 무대중앙이나 하나미치에서 벌어지는데 이 역시 관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공간배치다 . 미에가 벌어지면 관객들은 배우들의 야고(屋號-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이름)를 외치면서 환호한다. 움직임과 정지의 과정, 이를 통한 그림만들기는 타블로와 매우 흡사하다.

가부키 수련에서는 인간묘사에 앞서 먼저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 또는 그림을 감상하는 감식력(에고코로,繪心)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행위와 동작의 예술인 가부키가 정적인 그림을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동작만으로 구성되는 연극보다는 동작을 중단하고 이를 정지상태로 바꾸는 일은 공연의 흐름을 일시에 역전시키고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동적인 연극흐름에 정지된 상태를 도입함으로써 그림이나 조각상을 만들어낸다. 그림, 즉 정지동작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도 법칙이 있다. 무작정 아무 동작을 연결하는 게 아니라 중층적인 일련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야 한다.

타블로와 미에는 움직임과 정지 또는 그림만들기라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diegesis)를 연상케도 하지만 이들은 극전개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점에서 특정 장면을 강조하는 타블로나 미에하고는 다르다. 디에게시스는 말로 극을 이어가는 것이고 미메시스는 대사없이 동작이나 재현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모든 연극에 등장한다. 그러나 타블로와 미에는 특별한 순간에만 등장한다.

서양연극에서는 대사가 중심이 되지만 가부키에서는 대사 대신 동작을 통해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 회화적 동작 또는 조각적 동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에 회화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방식이다. 타블로는 재현이 중심이지만 미에는 움직임이 정지로 전환되는 탈재현의 동작이다. 미에에는 모방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중심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에에서는 그 중심은 비어있다. 과거의 가부키에서 온나가타는 무대의 중심을 비워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미에는 지금도 가부키의 핵심적인 연기로 남아 있다.

미에와 타블로는 유사한 목적으로 출발했지만 전개의 과정과 결과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미에는 가부키에 등장하는 연출의 한 형식으로 일반인은 쉽게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연기양식이지만, 타블로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장르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재현양식이다. 미에의 그림이나 조각만들기는 대상을 동일하게 그려내는 재현의 방식이 아니다. 미에에서 재현의 대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의 내부에 축적된 강렬한 에너지를 외부로 발산하는 것이다. 쟝 보드리야르는 2천년의 서양문화는 재현에 기초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대상을 원본과 동일하게 복제하는 작업인데, 플라톤은 재현의 동일성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여 예술을 비판하였다.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르지만 재현위주의 서양연극과 탈재현의 동양연극. 이것이 동서양 공연의 차이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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