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시학 시부문 신인상에 최병호 시인
열린시학 시부문 신인상에 최병호 시인
  • 이미우 기자
  • 승인 2021.09.28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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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시인 (사진제공=계간문예지)
최병호 시인 (사진제공=계간문예지)

[더프리뷰=서울] 이미우 기자 = 계간 문예지 <열린시학>은 2021년 가을호를 통해 제 60회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최병호 시인의 <길장미> 외 3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병호 시인은 1966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대우그룹 홍보실에서 10여 년간 근무했다. 경동고 재학 시절에는 서정주 시인이 심사한 전국고교생 현상문예에서 당선된 바 있다.

이지엽 시인과 하린 시인은 심사평에서 “최병호 씨의 <길장미>는 길가의 장미가 가진 존재성을 상상적 발화를 통해 역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길장미의 ‘향’이 ‘길’이라는 코드를 만나 ‘마을버스의 승객들과 인사하는 법 / 가슴 속에 피어 종점까지 길게 향을 간직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소음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사물과 현상에 서린 근원성과 본질성을 자신의 시선으로 잡아내 자신만의 감각적인 언술로 형상화시키는 힘이 뛰어나다. 자신만의 ‘필터’를 가지고 근원성과 본질성을 향한 시적 탐구를 개성적으로 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최병호 시인은 당선소감에서 “시(詩)는 힘이다. 내가 시에게 향할 때, 시에게 다가갈 때, 여전히 시는 힘이다. 나는 시를 점령하고 싶지도, 시에게 점령당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시에게 향하고 싶다.”면서 늦은 데뷔인 만큼 더욱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길장미

6월의 담벼락은 샤넬 No. 5

거리의 장미들은
몸 전체로 향을 피워내는 법을 안다

불가리아 벌판에서 자라
손가락 긴 파리지엥의 귓불에서 증폭될
흑장미들은 모른다

마을버스의 승객들과 인사하는 법
가슴 속에 피어 종점까지 길게 향을 간직하는 법

장미의 마을에서는 소음도 향이 된다

코로나로 닫혀있던 학교 문이 장미의 계절에 열리고
꽃보다 향이 깊은 아이들은
아름다운 소음을 뱉어낸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장미들은
사춘기의 하굣길을 훌쩍 키 크게 한다
그래서 길에서 자란 장미들은
뜨거운 햇살에도 시들지 않는다

울타리를 넘어온 장미에 취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소녀가 스틸 컷이 되어버린 모퉁이

노선버스들은 장미 향을 담기 위해
빈 차로 왔다

 

기수역(汽水域)

장마가 길어지면서 하류로 달려온 섬들은
기수역을 모른다
떠내려온 섬들이 모여서 만든 기차는
흑꼬리도요새역을 지나 꼬마물떼새역을 지나
쇠제비갈매기가 기다리고 있는 역으로 올 때까지
여전히 기수역의 존재를 모른다

새벽에 태어나 부피를 키워온 물안개들은
바다로 섬들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 몸으로 울타리를 쳤다
안개처럼 물이 불어나면서 황어들은
부지런히 바다와 강을 오르내리지만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물과 싸우지 않는다

큰비에는 배들을 뭍에 올려놓고
강준치와 농어들이 근육을 키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고라니가
강가에 모습을 나타내면
강마을 사람들은 긴 장마가 끝난 것을 안도할 뿐
지난 밤 고라니의 안식처는 묻지 않는다

이제 강에서는 안개가 섬들의 결박을 풀어도
섬은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는다
기수역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곳이 기수역인 줄 몰라도
이곳의 물고기들은 기수역 주위를 오가며
물의 나이만큼 살이 오른다

*기수역(汽水域) : 강과 바다가 만나는 수역, 염도가 다양해 많은 생명체가 산다

 

백린(白麟)

원대리 그 숲에서 만난 하얀 기린들의 열병식
사바나를 넘어 이곳까지 찾아온 기린들은
밤마다 지상에 백지를 펼쳐놓는다

우기를 기다리던 사바나 꿈의 크기만큼
원대리 밤의 지름이 커지면
별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사바나 우기의 꿈으로 부풀어 오른다

폭설로 세상이 온통 덮이면
기린들은 꿈속에서 사바나 우기의 아침을 맞는다

지난여름부터 시루떡처럼 쌓아온 시간들이
37cm 적설량이 된 아침, 발목이 깊이 빠져들수록
기린들은 다리로 힘을 모으고
뿌리 쪽으로 키를 키운다

적설량의 마력에 빠져든 길들이
가슴에 그물을 준비하고 기린의 마을로 건너오면
기린들은 호기심 많은 길을 우기의 문장처럼 태우고
사바나 초원까지 긴 여행에 나서는 것이다

하늘 쪽으로 키가 자랄수록
큰 눈 가득 덮어버린 하얀 눈송이들과
사바나 밤의 별 송이들 모두가
기린들의 시였다는 것을 바람은 기억할까

이미 백지로 자신을 비운 비탈에 서서
사바나 바람을 키워온 하얀 기린들은
제 몸의 얼룩으로 빗어낸 하얀 시편들을
뿌리 쪽으로 툭툭 떨구고 있다

 

바람의 문신

오월이면 아버지는 보리밭을 땅끝까지 밀고 갔다
바람은 펄럭이듯 일어서 보리밭을 다시 데리고 왔다
수년간 계속된 이들의 밀당은 파도처럼 계절을 넘었다

바람은 사방으로 청보리들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보리 가시 같은 수염이 자랐다

청보리들이 우-우-우
웅성거리며 손을 잡는다
바람이 귀때기를 후려치듯 사납게 휘몰아칠 때마다
청보리의 몸에 바람의 문신이 새겨졌다

남해 바닷바람에 실려 온
고래 떼 물보라가
기다리던 편지를 전하는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가고
아버지의 잠 속에서
바람의 결대로 살이 차오르는 보리들

아버지 바람을 더 이상 데려오진 마세요
제 몸이 바람 속에서 자꾸 흔들려요
아들은 제 무늬 속 아버지의 문신을 보았을까

땅끝은 늘 바닷바람이 세다
제대로 땅끝을 보려면 바람의 끝까지 가야 한다

바람도 이따금 회오리 지며 보리밭 푸른 격정 속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땅끝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의 궤도를 따라
바람의 문신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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