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1) - 가을 이야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1) - 가을 이야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10.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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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 그라펜베르크 발트의 가을 하늘 ©김윤정
해질 무렵의 뒤셀도르프 라인강변 ©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가을은 왠지 조금 고독해도 될 것 같은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또 왠지 불행 속에 빠져들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은 듯하여 마음껏 불행해진다.

기왕이면 이 불행이 매우 근원적이면서도 시작도 끝도 없는 심연적인 불행이고 싶다는 열망 에도 빠지게 한다. 불행하고 싶다는 열망이라니! 가당치 않은 소리 같지만 우리에게 가을이 없었다면 이 불안함에, 이 고독함에 기댈 근거가 없었을 테니 가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더구나 오늘처럼 가을비까지 내리는 날이면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듯 축축한 오후의 멜랑콜리에 빠질 수 있어 더욱 좋다. 가을은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흔들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흔들리고 있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으며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갑자기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서울 어느 거리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으로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재공연을 준비하느라 서울에 왔다.

서울 계동의 카페 더블컵 커피 ©김윤정
베를린 문학의집(Literaturhaus) 카페 ©김윤정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시간이 가장 빨리 가는 곳일 것이다. 서울은 가을조차도 시간이 빨리 가는 도시이다.

그야말로 느림의 도시에서 빠른 속도의 도시로 오면 그 스피드를 살짝 즐기다가도 몸은 따라 가지만 가끔 나의 영혼은 뒤처져 있을 때가 있다. 그 속도를 따라잡기에 버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갑자기 너무 조용한 여유의 시간이 오면 그조차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날은 그런대로 나른하고 무기력하게 두어야 한다. 특히나 가을에는 말이다. 뒤처진 영혼이 몸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

연습이 없는 날, 약속도 없는 날 어슬렁거리며 하루쯤은 그냥 그렇게 두기로 한다. 그리고 그냥 바라보기로 한다.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결속이 될 것이니 말이다. 가을은 인생조차 가을로 접어드는 중년의 나이에는 더욱 결속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 계절이 풍기는 느낌을 적당히 가을스러운 생각으로, 그런 무드로 젖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정의는 그냥 뚝 떨어진 나 하나가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계절, 내가 처한 환경,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 심지어 내 곁의 사물까지도,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에너지들이다. 나를 포함한 그 에너지들의 파장으로 연결된 모든 것들은 나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나는 변화하는 동사처럼 가을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우연히도 이 가을날하고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프랑스 영화를 보았다. 사실 몇 년 전에 본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사, 이런 장면이 있었나 할 정도로 마치 처음 보는 영화처럼 새로웠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지만 다시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잊어버리게 될 것들을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또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계속 무한반복을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내일이면, 한 달 뒤면, 일 년 뒤면 잊힐 순간들을 위해서 말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원제 L‘Avenir)' 장면 (사진제공=김윤정)
영화 '다가오는 것들(원제 L‘Avenir)' 장면 (사진제공=김윤정)

이 가을날 다시 보게 된 영화 <다가오는 것들(원제 L‘Avenir)>은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1953-)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사백년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 <올란도>를 원작으로 한 로버트 윌슨 연출의 일인극으로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 서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생존하는 작가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파스칼 키냐르의 원작 <빌라 아말리아>라는 영화에도 주인공으로 나왔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에서는 성 도착증에 빠진 피아니스트 연기를 하기도 했었고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에도 나왔었다. 그녀는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연기보다는 섬세한 감정과 깊이 있는 내면 연기로도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다양한 캐릭터의 스펙트럼 넓은 연기를 하는 배우이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한때 열정적으로 쏟아부은 것들이 하나씩 그녀 곁을 떠나고 자신의 일에서도 밀려나면서 홀로 서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영화 사이사이에 들어오는 묵직한 철학적, 사회적 질문들은 사색의 계절 가을하고 잘 어울린다. 인생에서 다가오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의 주인공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나탈리가 가족 여행 중에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험 문제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라는 주관식 문제이다. 그리고 마치 복선처럼 그녀가 잠시 멈춰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낭만주의 작가)의 묘비명을 읽으며 음미한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그리고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영화는 영화의 흐름 속에 상황에 맞는 철학가들의 문장들을 읽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과 밀접하게 다양한 관점으로 철학을 다룬다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고 결국 그녀 곁을 떠나면서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돌려받는 집착을 보인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사람이 집착하는 책의 제목이 사뭇 아이러니컬하다. 견고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온 여자가 중년이 되면서 남편도 떠나고 자식들은 독립하고 늘 철학교과서를 쓰던 그녀의 확고하던 자리도 밀려나고 홀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유일하게 잘 통하던 애제자도 급진적인 사상가가 되어 그녀를 비판한다. 나탈리가 적당하게 사회참여를 하지만 세상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중요한 사상은 모른 척했다는 이유에서다. 중년의 여자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한 남편의 배신과 애제자의 조롱 앞에 묵묵하게 반응하던 그녀는 조용히 혼자 잠시 흐느끼지만 시종일관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쓴 철학교과서는 현대 시대에 맞춰 표지를 화려하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젊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를 찾았노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보통 영화에서 보여질만한 애제자와의 러브라인 같은 것은 끝까지 없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지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기로 한다.

영화 속에 줄곧 나오는 그녀의 철학수업 시간에 다루는 명제들은 그야말로 토론의 결론을 내리기 힘들지만 우리가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그 와중에 철학시험 시간에 배점이 낮다는 이유로 대충 답안지 작성을 하고 나가는 아주 현실적인(?) 한 학생을 비춰주기도 한다.

학교 입구에서는 학생들의 노동자 인권을 위한 집회가 열리고(워낙 시위를 많이 하는 나라 프랑스답다) 학생들이 입구를 막아서며 당신은 노동을 착취 당하는게 괜찮냐며 항의하자 나탈리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러 가는 길을 너희들이 막을 권리는 없다고 한다. 그녀는 한때 68세대로서 급진적인 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지만 혁명을 원하는 젊은 세대와의 균형을 원하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관찰자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뚫고 들어온 날 수업에서 그녀는 18세기 사상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주며 생각해 보고 토론을 해 보자고 한다.

“만약 신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가장 민주적일 것이다. 이토록 완벽한 정부는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다.”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서는 추모사로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팡세>의 한 구절을 읽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앗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적인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서 안식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하기에는 너무 많이, 확신하기에는 너무 적게 보는 나는 개탄할 상태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든지,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바란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善)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야외수업 중에 학생들과 “분명하게 확립되는 진리가 있는가? 진리는 논쟁 가능한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진리가 확립되는 것은 시간과 시점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진리의 존재 여부보다는 그 확립 기준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예술 분야에서 진리를 논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예술의 진정성은 시간이 결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자 한 학생은 시간이 잘못 결정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한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알랭(Alain, 본명 Émile-Auguste Chartier, 1868-1951)의 <행복론>을 읽는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도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오지 않는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그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나탈리는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에 영감을 주었던 루소의 <쥘리, 혹은 신엘로이즈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1761)라는 18세기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의 이야기에 빗대어 위 <행복론>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 주인공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어떻게 더 고결한 행복을 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뤄질 수 없는 연인들은 즉각적인 충족이 아닌, 욕망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다고 설명해준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자체로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에이플랫 단조로 서글프게 시작되는 <물 위에서>는 독일의 바리톤 가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her-Dieskau, 1925-2012)의 노래인데 너무 아름다워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지적이고 감각적이며 홀로 있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한 여자의 진정한 홀로서기 여정을 함께하는 듯 동화되게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물위에서 Auf dem Wasser

작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슈톨베르크(Friedrich Leoplod Stolberg, 1750-1819)

시간은 흐르는 물결 위에서 이슬 젖은 날개로 사라져가네
내일도 시간은 날개 위로 어제와 오늘처럼 사라져가겠지
나 또한 찬란한 날개를 타고 시간을 따라 사라지겠지

Ach, es entschwinder mit tauigem Flugel
Mir auf den wiegenden Wellen die Zeit.
Morgen entschwindet mit schimmerndem Flugel
Wieder wie gestern und heute die Zeit,
Bis ich auf hoherem, strahlendem Flugel
Selber entschwinde der wechselnden Zeit.

인생은 불완전해서 아름답다. 우리들 인생은 늘 계획대로 또는 당연한 귀결로 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하게 흐르며, 또 알 수가 없다. 뒤섞이고 무작위적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인생은 수많은 표식(open secret)들을 해독하고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영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잠시 멈추고 불안스레 서성이는 시간도 좋을 것 같다.

가을날 한번쯤은 그렇게 길을 잃기도 하면서 잠시 인생의 표식들을 음미하는 시간이어도 좋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묵직한 철학적 질문들은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들 인생처럼 말이다.

가을은 답이 없는 질문들로 채우고 싶기도 한 계절이다. 인생은 살아갈수록 답을 찾는 것이 아니고 질문들이 쌓여가는 듯하다.

그리고 답을 찾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또 깨닫게 한다.

세상이 나에게 던지던 질문들, 어디선가 들었던 질문들, 그리고 내 작품 속에서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내 안에서 나오던 질문들로 가을 이야기를 마친다.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영화 속의 이자벨 위페르 (사진제공=김윤정)

당신은 누구인가?(이름이 없다면 습득된 것들을 기억상실로 다 잃어버렸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네가 하는 일, 네가 이루어 놓은 것과 너 자신이 별개라면?!! (네가 누구라는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되고 싶은 나가 아닌 그냥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비극은 매순간 감정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 변하는 순간, 무너지는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말이 사라지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을 믿어야 하는가? 왜?

나는 내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을까?

죽음의 끝은 어디일까?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있을까?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 일까?

우리가 사랑했었다는 걸 미래의 시간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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