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2 뮤직홀(8)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2 뮤직홀(8)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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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 가르니에(파리 오페라 하우스) (출처=위키피디아)

파리 뮤직 홀 발레(1) - 판토마임 발레

예술을 좋아했던 독재자들이 있었다. 네로나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인물들이다. 동양에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나 서태후, 연산군도 공연을 좋아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 못지않은 예술애호가로, 특히 연극을 좋아했다. 15년간의 제국통치기간중 374편의 연극을 관람하였고 어떤 작품은 한 번 이상 보기도 하였다. 그가 극장을 찾은 횟수는 682회였다. 15년간 매주 한 번씩 간 셈인데, 거의 종교적 경배에 가까운 열정이었다. 특히 코르네이유를 좋아했고 전문적 비평가의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세인트 헬레나 유배당시에는 연극에 대한 비평과 희곡 읽기로 소일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혁명후 누구나 극장을 짓고 간단한 신고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극장신축을 허용하였다. 5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작가들의 작품도 아무 데서나 공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정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1791년의 포고령은 프랑스의 고전작품에 대한 코메디 프랑세즈의 독점권을 폐기하였다. 이로써 1792년부터 1806년까지 연극의 황금시대가 열린다. 이 당시에 어떤 사람은 ‘만약에 이대로 극장이 늘어간다면 모든 거리에 극장이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와 대형 홀에서도 연극공연에 나섰다. 거의 전염병이었다.

나폴레옹은 연극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공연을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1806년 파리의 극장을 12개로 줄였고, 1807년에는 다시 8개로 줄였다. 모든 극장은 자신만의 레파토리를 공연하도록 제한하였고 어떤 극장도 허가없이는 공연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내용에 대해서는 검열관의 엄격한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1807년부터는 모든 극장의 신축을 제한하였고 레파토리도 엄격하게 검열하였다.

발레도 이 조치의 영향을 받았다. 파리 오페라 극장 이외에는 스토리 라인과 세트, 분장을 갖춘 발레를 공연할 수 없었다. 다른 극장들은 디베르티스망만 가능하였고 카페 콩세르는 아예 발레 공연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조치는 1864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는데, 당국에 신고만 하면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극장에 대한 완전한 해제가 아니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정부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극장들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카페는 1864년까지도 기악과 성악 등은 가능했지만 의상, 세트를 갖춘 판토마임이나 댄스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제한조치가 모두 해제된 것은 1867년 두 번째 포고령이 발령되면서부터였다. 모든 극장에서 모든 형식의 공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파리 뮤직 홀의 설립도 이러한 제도의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파리 뮤직 홀은 영국의 알함브라를 모델로 만들었다. 프로그램 역시 버라이어티한 것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발레는 매우 인기있는 장르였다. 초기에는 알함브라의 발레를 그대로 파리로 옮겨오거나 약간 각색하여 공연하는 등 영국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런던과는 다른 파리의 발레를 제작한다. 그 차이는 판토마임 발레였다. 런던에서는 이야기가 있는 판토 발레가 없었던 반면 파리에서는 판토 발레가 인기있는 장르로 발전한다. 스토리를 금지한 영국의 공연법 때문이었다. 파리 뮤직 홀 발레는 단순한 디베르티스망으로 시작하여 이야기를 삽입한 판토마임 발레로 진화한다.

판토 발레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19세기에 와서 꽃을 피운다. 판토마임이 발레에 등장한 이유는 춤의 매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춤에 다른 장식을 달고 싶었던 것이다. 춤만으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을 마임으로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발레에서 마임이나 제스처, 연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파리 뮤직 홀 발레의 판토마임 발레는 <지젤>과 같은 발레 - 판토마임(판토마임- 발레가 아니라)보다 더 대중적인 형식을 띠게 된다. 선정적인 의상과 타블로, 외설적인 춤사위 등을 삽입하고 여기에 화려한 장식과 세트, 군무 등을 덧붙여 웅대하면서도 에로틱한 스펙터클을 만든다. 대중적인 스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볼거리, 내용이나 구성방식과 구성요소들의 변화를 통해 대중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뮤직 홀 발레의 스펙터클은 화려한 파리 오페라 발레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파리 오페라 극장의 발레제작은 매우 부진했다. 오히려 파리 오페라 극장이 뮤직 홀 발레를 모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파리 오페라 발레의 명성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발레리나의 기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이 시대를 발레의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틈을 메운 것이 뮤직 홀 발레였고, 이는 영국과 상황이 매우 흡사했다.

이렇게 판토 발레는 파리 뮤직 홀의 중추적인 프로그램이 된다. 폴리 베르제르에서 발레는 거의 매일 저녁 공연되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제작했고, 과거의 인기프로그램도 재공연했다. 하루 저녁에 2편을 편성하기도 했고, 보통 6주에서 3-4개월씩 공연하였다.

루이 아벨 트뤼셰(Louis Abel Truchet, 1857-1918)
'네 예술의 무도회, 1903'(출처=gazette.drouot.com)

3대 뮤직 홀

- 세기말의 데카당스

파리에는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 카지노 드 파리, 올랭피아 등 3대 뮤직 홀이 있었고, 이들은 영국의 알함브라와 엠파이어처럼 경쟁자였다. 시설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에서도 더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서커스, 음악, 플레이렛(짧은 드라마), 오페레타, 대중춤, 레뷔 등 버라이어티한 쇼들이었고, 이들은 1880년대부터는 카페 콩세르의 인기를 누르고 파리의 밤을 지배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의 파리는 소위 세기말(fin de siècle)의 퇴페적 분위기속에서 선정적인 쇼들이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이벤트가 1893년의 <네 예술의 무도회 Bal des Quat'z'Arts’>였다. 이 무도회는 네 가지 예술, 즉 건축, 회화, 조각, 판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1892년에 앙리 기욤이 조직한 이벤트였다. 그런데 무랑 루즈( 무랑 루즈도 1889년에 설립된 뮤직 홀이었다)에서 열린 1893년의 두 번째 무도회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역의 모델과 일부 여성들이 전라로 등장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사회문제가 되고 결국 고소를 당하였지만 예술을 목적으로 한 이벤트라는 이유로 벌금을 물고 풀려난다. 이 사건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뒤늦게 개장하여 다른 뮤직 홀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던 무랑 루즈를 명소로 만들었고, 이를 모방한 쇼들이 출현한다.

세기말은 관능주의, 기괴한 것에 대한 관심,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자유, 도덕적 행동의 거부 등 퇴폐적 문화에 탐닉했던 해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사회, 경제, 기술, 문화가 발전했던 벨 에포크의 시대이기도 했다. 문명과 퇴폐가 공존했던 혼돈스런 상황은 뮤직 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폴리 베르제르

1869년에 개장한 폴리 베르제르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첫 뮤직 홀로, 가장 인기있는 뮤직 홀이기도 했다. 이 홀의 프로그램은 다른 뮤직 홀에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 대중문화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르도와 리용에도 폴리 베르제르가 생길 정도로 전국적인 유행의 진원지였다.

폴리 베르제르(gettyimages.ae)

파리 뮤직 홀 프로그램의 특징은 여성의 신체를 활용한 선정적 스펙터클이었고, 이 중에서도 발레는 뮤직 홀의 데카당스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3개 홀은 1872년부터 1918년까지 제작된 200여 편의 발레 중 절반 이상을 제작했다. 1890년대에만 폴리 베르제르가 30편, 카지노 드 파리가 16편, 올랭피아가 18편을 공연하였다.

폴리 베르제르는 처음에는 오페라 극장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871년까지는 흥행성적이 좋지 않아 몇 번의 폐쇄와 재개관을 반복하였다. 1870-71년에 벌어진 프러시아와의 전쟁(보불전쟁), 파리 코뮌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프로그램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1872년에 경영을 맡은 레옹 사리(Leon Sari)는 영국의 알함브라 홀을 모방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로비를 확장하고 객석 뒤에 새로운 사회적 공간인 프롬나드를 설치하였고, 로비에는 웨이트리스들이 서빙하는 바를 설치하여 술을 팔았다. 영국에서 프롬나드에 대한 비판이 높던 터에 이를 설치한 것은 성을 사업에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실제로 폴리 베르제르의 프롬나드는 매춘부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라는 그림을 보면 오렌지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여성이 보이는데, 이들은 오렌지 걸로 불리던 매춘부들이었다. 프롬나드는 무대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프로그램은 음악, 서커스, 동물쇼, 복싱, 기형쇼 등 각종 버라이어티 쇼로 구성했다. 특히 공중그네, 줄타기, 아크로바틱 등 수준높은 서커스로 유명했고, 타블로 비방이 인기가 있어서 멀리 런던에서까지 구경하러 오곤 했다. 음악으로도 유명했는데, 당시 인기가수들이 모두 이 홀에 출연했다. 폴리 베르제르는 화려하고 선정적인 레뷔로 유명했다. 1887년에 시작된 <젊은이의 공간>이라는 레뷔는 파리의 밤을 뜨겁게 달군 화려한 쇼였다. 그리고 1890년대에 들어오면 반라의 여성들의 쇼가 큰 인기를 얻었고, 1910년대에 가면 거의 누드에 가까운 쇼를 잇따라 선보였다.

마네 ' 폴리 베르제르의 바'(출처 : 위키피디아)<br>
마네 ' 폴리 베르제르의 바'(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레옹 사리는 1881년에 돌연 프로그램을 고급예술로 바꾼다. 홀을 품격있는 고급공연장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작동한 것이다. 교향곡 시리즈를 도입하여 구노, 마스네. 생상스 등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객이 급감한다. 한 달만에 다시 버라이어티로 복귀하지만 경영상의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회복과 부진을 반복한 끝에 1885년에는 파산하고 만다. 1886년 알레망드 부부(Allemands)에게 매각했고, 이 부부는 다시 에두아르 마르샹에게 경영을 위탁한다. 이 때부터 폴리 베르제르의 황금시대가 열린다. 마르샹이 아니었다면 폴리 베르제르는 평범한 뮤직 홀이 되었거나 파산했을지도 모른다. 마르샹은 1886년부터 1901년까지 폴리 베르제르의 예술감독을 맡았는데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건 발레였다. 디베르티스망에 머물고 있던 뮤직 홀 발레를 판토마임 발레로 바꾸었고 이 개혁이 15년간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그는 15년간 49편의 판토 발레를 제작하였는데, 1890년대에만 30편의 신작을 창작하였다. 판토 발레의 황금시대는 1890년대였던 것이다. 관객의 변화에도 신경을 써서 좀 더 부유한 중상류층 대상의 마케팅에 힘을 쏟았다(『Parisian Music - Hall Ballet, 1871-1913』).

마르샹의 전략은 스펙터클과 성을 활용한 마케팅이었다. 프롬나드에는 매춘부 출입이 지속되었고, 무대에서는 다리를 흔드는 코러스 걸과 반라의 육감적 여성들의 춤이 남성관객들을 유인했다. 폴리 베르제르는 파리의 에로틱한 오락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프로그램이 모두 외설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프로그램을 보다 다채롭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새로운 서커스, 아크로바틱, 마술, 저글링 등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도입했고, 얼굴이 온통 털로 덮인 버마인, 2미터 40센터의 거인 등의 기형쇼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는 동안 건물도 두 번이나 리모델링하여 고급 연극극장에 가까운 수준으로 혁신해 나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혁신은 판토 발레의 도입이었고 이를 계기로 1890년대에는 창작발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르샹은 1902년에 사망하고 홀은 올랭피아를 소유하고 있던 이솔라(Isola) 형제에게 매각되었다. 전직 마술사였던 이솔라 형제는 이렇게 폴리 베르제르와 올랭피아의 두 개의 대표적인 뮤직 홀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 이들은 판토 발레 대신 화려한 레뷔에 더 치중한다. 1902년부터 1913년까지 이들이 제작한 판토 발레는 6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마저도 레뷔에 인기를 빼앗긴다. 이런 흐름 역시 영국의 뮤직 홀과 매우 유사했다.

카지노 드 파리의 포스터 (출처=antikbar.co.uk)

- 카지노 드 파리

1890년에 창업자 루이와 폴 룅티어는 홀을 건립하자는 다짐을 했다. 홀은 컸다. 1600개의 객석이 있었고 1000석은 일층과 박스석과 발코니에 있었고, 600석은 입석이었다. 정교한 정원과 프롬나드까지 합치면 4천명이 입장할 수 있었다. 객석 못지않게 부대시설이 컸던 셈이다. 규모만큼 장식도 화려했고, 시설이 화려한만큼 인기도 있었지만 수입은 이에 미치지 못해서 1년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관객들이 공연보다는 프롬나드에만 들어가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홀은 루이 보니와 아르망 데스프레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1891년에 홀을 두 개로 분리해서 카지노 드 프랑스와 순수연극을 공연하는 누보 테아트르로 만들었다.

홀과 극장은 통로로 연결하여 극장공연을 보고 싶은 홀 관객은 추가요금을 내고 관람할 수 있었고, 극장관객은 인터미션 시간에 홀에 무료입장이 가능했다. 홀은 분리후에도 컸지만, 윙(무대의 양옆)은 거의 없었다. 폴리 베르제르처럼 프롬나드가 설치되어 매춘부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프로그램도 폴리 베르제르와 거의 비슷했다.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춤, 아크로바틱, 스포츠묘기, 서커스, 동물쇼, 기형쇼, 판토마임 발레, 노래 등이었다. 다만 로이 풀러( Loie Fuller)와 같은 스타가 없다는 점이 달랐다. 저녁 공연후 10시 반이나 11시경부터는 댄스 홀로 바꾸어, 인근의 무랑 루즈처럼 캉캉 춤과 같은 대중춤을 출 수 있게 하였다. 1896년부터 1901년까지 대형 판토마임 발레를 제작하였고 191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숫자와 빈도는 1902년부터 현저히 감소하였고, 대신 발레리나보다 댄싱 걸을 활용한 레뷔가 많아졌다. 1910년에 경영자가 바뀌면서 발레는 사라진다.

올랭피아 (출처= alamy.com)

- 올랭피아 홀(1893-1913)

올랭피아(Olympia)는 중상류층 관객을 목표로 지은 고급 홀이었다. 올랭피아를 만든 조세프 올러(Joseph Oller)는 무랑 루즈, 누보 시르크(new circus)를 만든 유명한 엔테테인먼트 사업가였다. 화려한 외장, 샹들리에, 카페트와 칼러풀한 내부장식, 꽃으로 장식한 복도 등은 스펙터클을 선호했던 그의 기질을 반영한 것이었고, 로비, 발코니, 박스석 등 곳곳에 놓인 꽃은 동양적 판타지를 연출하였다. 관객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술과 담배,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관객들끼리 어울려 잡담을 했다. 거대한 프롬나드에는 매춘부들이 드나들었다. 카페 콩세르와 극장의 이중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프로그램은 폴리 베르제르처럼 노래, 춤, 기형쇼 등 버라이어티한 프로그램이었다.

무랑 루즈 캉캉 (alamy.com)<br>
무랑 루즈 캉캉 (alamy.com)

그렇지만 올러는 곧 뮤직 홀 경영에 싫증을 느끼고 1896년에 이솔라 형제에게 홀을 매각했다. 이솔라 형제는 폴리 베르제르를 누르기 위해 프로그램 고급화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콘텐츠를 구입하였고, 발레보다 레뷔와 오페레타에 더 치중하였다. 그렇다고 발레를 중단한 건 아니었지만 발레는 점점 레뷔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1914년 경 판토 발레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디베르티스망에서 판토마임 발레로

뮤직 홀 발레는 디베르티스망에서 유사 디베르티스망으로 이어서 판토마임 발레로 변한다. 단일요소가 복합요소로, 단순구조가 복합구조로 변한 것이었다. 디베르티스망과 판토 발레의 차이는 명확한 경우도 있었지만 애매한 경우도 있었고, 세 가지 형식이 선형적으로 변해간 것이 아니라 겹치기도 하였다. 판토 발레가 절정기에 달했던 1890년대 이후에도 디베르티스망이 많이 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판토 발레는 19세기 발레 닥시옹 시대에 등장한, 대중적인 발레 닥시옹의 한 형태였다.* 판토 발레는 기계적인 춤 위주에서 벗어나 리얼한 안무, 댄서의 자유로운 동작과 표정, 이들과 어울리는 의상과 세트를 사용하여 플롯을 더 잘 전달하고 재미를 높이려는 무용이다.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를 형성하는 혼종적 무용이었다.

- 디베르티스망

19세기에 발레의 장르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발레형식은 발레- 레뷔, 발레-오페레타, 발레-오페라, 발레와 노래등 여러 가지 장르가 혼합된 혼종적 형식이었다. 어떤 발레는 뮤지컬과 유사한 형식도 있었다. 디베르티스망은 이런 오락적 발레를 총칭해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디베르티스망은 플롯이 없거나 있다 해도 아주 짧고 단순한 1막짜리의 무용으로, 한 사람이나 몇 명의 댄서가 춤의 아름다움과 댄서로서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플롯이 전혀 없거나 마임이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었고, 간단한 플롯이나 마임화된 연기장면 등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댄스의 부속요소로 기능했을 뿐 핵심요소는 아니었다. 디베르티스망은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했고, 이를 위해 여성 댄서들은 타이츠와 타이트한 코르셋을 입고 출연했다. 이 때문에 다리를 보여주는 다리쇼(leg show)라거나 관능적이고 외설적인 쇼라는 비판도 많았다.

초기의 뮤직 홀 발레는 대부분 디베르티스망이었다. 파리에서는 1870-1910년 사이 수백 편이 제작되었는데, 구조가 탄탄하지 못하고 단순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구성되었으며 댄서들의 기량도 아마추어처럼 미숙하였다. 따라서 발레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폴리 베르제르는 초기 15년 동안 60편의 디베르티스망을 창작하였다. 처음에는 특별한 인기가 없어서 다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처럼 취급되었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매력없는 프로그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다른 프로그램이 몇 주씩 공연했던 데 반해 불과 몇 일만에 종료하고 다른 디베르티스망으로 교체되기가 일쑤였다. 디베르티스망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그 형식의 변화와 과감한 스펙터클의 도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선정성이었다. 폴리 베르제르는 첫 번째 작품 <바다와 암탉>이나 <스핑크스>부터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장면들을 삽입하였다. 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려 하였고, 프로그램에서도 여성의 신체를 최대한 노출시키려는 전략을 취했다. 군무단원들의 신체노출, 마지막에 등장하는 앙 트라베스티 등이 모두 남성관객을 유인하려는 전략이었다.

카지노 드 파리 쇼(gettyimages.ae)

- 유사 디베르티스망 발레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여러 노력 끝에 발레는 판토마임 발레로의 길을 찾는다. 그 도중에 이 두 형식의 차이가 구분하기 어려운 중간적 형식이 나타난다. 이것이 18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유사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like) 발레였다. 이는 1막의 짧은 길이, 단순한 구조 등이 디베르티스망과 유사했지만 코믹하거나 진기한 이야기, 판타지, 동화, 이국적 세팅 등 보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추가되었고, 타블로나 마임 등이 삽입되었다. 판토 발레로 가는 전단계였지만 디베르티스망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밝은 톤으로 바뀌었고 의상과 세트가 더 화려해졌다. 이 춤 역시 경쟁이라도 하듯이 되도록 여성의 신체를 노출하려 했다. 폴리 베르제르의 <해변에서 (Sur la Plage)>라는 작품은 수영복차림의 댄서들의 타블로로 시작한다. 이국적 주제는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기에 매우 적합한 주제였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술탄제국, 일본 등을 제재로 하여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리고 점점 대형 스펙터클로 변해갔다. 유사 디베르티스망 발레는 1890년대에 큰 인기를 모았지만, 점점 스펙터클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면서 더 규모가 큰 판토 발레로 바뀐다.

- 판토마임 발레, 이야기와 혼종의 힘

1890년대에 들어와 1막짜리 디베르티스망이 2-3막의 긴 발레로 바뀌고 스토리와 마임이 들어간 버라이어티한 춤으로 변한다. 이렇게 혼종적인 발레가 되면서 기존의 디베르티스망보다 훨씬 재미가 강화된다.

이야기가 삽입되자 발레의 구성요소나 구성방식도 달라진다. 단순한 구성에서 복잡한 구성으로, 단순한 춤에서 마임, 연기, 음악이 혼합되면서 혼종적인 댄스로 변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건물의 골조나 신체의 척추와 같아서 전체를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면 여기에 많은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할 수 있다. 마치 골조위에 창문을 내고, 벽을 만들고 거기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야기는 스펙터클을 창조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언어에 장식을 입히는 것이다.

이야기의 또 다른 효과로는 평면적 장면을 매우 입체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구성요소들이 위아래로, 옆으로 이동하면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입체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구별되지 않던 요소들이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요철과 굴곡을 만든다. 어딘가에 잠복해 있던 요소들이 세상밖으로 나온다. 판토 발레에 음악이 들어가고 마임이 추가되면 발레의 전반적인 구조가 바뀌고 동작은 화려해진다. 무미건조하던 발레가 연극적 무용으로 바뀌고, 역동성이 생성된다.

파리 오페라 발레(출처=operadeparis.fr)

또 이야기는 구조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단편적인 요소들이 총체적이고 통일된 형태로 결합됨으로써 더욱 구조가 튼튼해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 뿔뿔이 흩어졌던 요소들을 이야기라는 뼈대가 중심이 되면 요소들간의 균형과 비례, 통일성을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의 기능은 분산된 요소들을 통합하는 기능, 그리고 여기에 장식을 추가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모든 예술이 이야기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에서 이야기가 갖는 힘은 이야기 자체의 재미보다는, 전체 구조를 견인하는 힘이고, 그것이 연출의 능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에 말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춤의 단점이다. 관객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임이 추가된 것이다. 마임 역시 댄스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꾸어놓는다. 이야기가 있는 발레, 즉 드라마 형식을 띤 춤으로 변하면서 마임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판토 발레를 ‘마임화된 드라마, mimed drama' 라고 표현한다. 판토 발레는 판토마임으로 시작되어 앙상블 댄스가 이어지고 타블로로 종료하는 순서를 취했다. 판토 발레에서 마임은 발레단의 발레기술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또한 제스처와 연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점점 이야기와 마임이 중요해지면서 판토 발레는 댄서가 아닌 사람들의 역할이 커졌고, 그래서 전문적 마임 아티스트를 고용하거나, 코르티잔같은 섹시한 여성을 내세웠다. 비록 긴 마임이라 해도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판토 발레는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과 관광객을 위한 오락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기술도 사용되었다. 1882년에 제작된 <나일강의 기원>이라는 작품에는 커튼이 열리자 해변을 표현하기 위해 작은 동굴이 나타났는데, 여기에 전기조명이 사용되었다. 물의 사용은 자주 있었지만 전기조명은 처음이었다. 음악은 더욱 극적이었다.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하지 않고 변화있는 멜로디를 사용했다.

판토마임 발레의 등장은 뮤직 홀 프로그램 구성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 동안에는 여러 가지 짧은 넘버들, 예를 들면 오페레타, 판토마임, 디베르티스망 등을 혼합하는 방식이었지만 이를 긴 스토리를 가진 하나의 발레로 바꾼 것이다. 이는 발레에 재미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높였다. 경영자들에게도 큰 희망이 되었다. 대중성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예술성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는 건 안무가들이었다. 당시 발레 안무가들은 대중극장 또는 상업극장과 오페라 극장을 오가면서 창작을 했다. 마담 마리퀴타는 유능한 발레리나였지만 상업극장에서 활약하다가 폴리 베르제르에서 활동했고, 나중에는 오페라 코미크의 발레 미스트레스가 된다. 그녀의 마지막 뮤직 홀 발레 , <몽마르트르>는 뮤직 홀과 오페라 코미크에서 공연된 작품이었다. 이는 곧 뮤직 홀 발레의 예술성이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마담 마리퀴타의 전임자 앙리 쥐스타망도 1860년대에 파리 오페라 발레의 발레 마스터를 지냈고, 1889년부터 1905년까지 파리 오페라 발레 마스터 조셉 한센은 알함브라에서 활동했다. 이들의 발레 스타일이 뮤직 홀과 오페라 극장에서 다르기는 했겠지만 , 클래식 발레의 기초가 뮤직 홀에서 발휘되었을 거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관객

파리 뮤직 홀 경영을 혁신한 사람은 1886년에 폴리 베르제르의 경영자가 된 에두아르 마르샹(Edouard Marchand)이었다. 그는 홀을 리모델링하고 티켓 가격을 인상하고, 연극과 서커스 등으로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관객층을 돈많은 중상류층으로 바꾸었다 . 뮤직 홀 발레의 관객은 상인, 관광객, 귀족 등 중류충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자들이 적었던 건 2프랑의 입장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층민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폴리 베르제르는 홀과 프롬나드 입장에 2프랑, 오케스트라 석이 3-7 프랑, 4-5석의 박스석이 24-40프랑이었고 올랭피아는 홀과 프롬나드가 3프랑, 오케스트라석 3-6프랑, 박스석은 50프랑 정도였다. 카지노는 약간 쌌다. 홀과 프롬나드는 2프랑이었지만 오케스트라 앞좌석은 4-5프랑이었다. 이런 가격들은 오히려 순수예술 극장보다 더 비싼 가격이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2프랑이었다. 다만 파리 오페라는 가장 좋은 좌석이 17프랑이었다는 점이 뮤직 홀과 다른 점이었다. 상업극장은 1프랑이었다. 1890년대 1프랑은 현재가격으로 약 13달러, 15,000원 정도니까 뮤직 홀 입장료가 3만원 정도였던 셈이다.

창작자

대본작가들은 순수문학 전공작가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불르바르 연극 출신의 대중적 작가들이었다. 안무가 역시 뮤직 홀과 불르바르 극장을 오가면서 작업하였다. 이들은 상호 교류하면서 서로의 창작작업에서 도움을 주고 받았는데, 이는 모두 대중적 연극이라는 점에서 공유할만한 프로그램과 작가, 창작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무용인

외국인 예술가에 의존했던 영국의 뮤직 홀과 달리 프랑스에는 많은 탁월한 무용인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댄서 겸 안무가 조세프 한센은 알함브라, 러시아, 벨기에 등에서 활약한 프랑스 출신의 국제적인 무용인이었다. 그러나 안무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무용가들이 많았다. 이들은 런던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창작을 하였는데, 그만큼 이탈리아 발레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발레 기술도 매우 높아서 많은 발레리나들이 이탈리아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탈리아 안무가로는 에기디오 로시(Egidio Rossi), 알프레도 쿠르티(Alfredo Curti), 카를로 코피, 유제니오 카사티, 코피가 은퇴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은 루시아 코르마니, 엘리제 클레르크 등이 있었다 .

쿠르티는 당시 폴리 베르제르와 올랭피아를 소유하고 있던 이솔라 형제와 계약을 맺고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파리에서 활약했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는 폴리 베르제르의 전작품을 안무하였고, 1900년부터 1902년, 1904-1905년, 1906년과 1910년에는 올랭피아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쿠르티는 같은 기간에 영국의 알함브라에서도 안무를 하였고 이를 다시 올랭피아에서 다시 무대화하였다. 이처럼 이탈리아 안무가들은 영국, 프랑스를 오가면서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라 스칼라에서 훈련을 받은 클래식 발레 출신이었다.

앙리 쥐스타망

파리 뮤직 홀 발레의 가장 중요한 안무가는 프랑스인으로, 앙리 쥐스타망( Henri Justamant)과 마담 마리퀴타(Mariquita)였다. 이들은 뮤직 홀과 불르바르 연극에서 활약한 대중연극인이자 오페라 코미크에서 고전 발레를 안무한 순수예술가이기도 했다 . 쥐스타망은 보르도 출신의 댄서로 리용, 마르세이유에서 안무를 했고, 브뤼셀의 모네극장에서 발레 마스터를 역임한 뒤 1860년대부터 파리에서 활동하였다. 불르바르 극장에서도 안무를 하였고, 1868년부터 69년까지 1년 동안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발레 마스터를 역임하였는데, 1년만에 결별한 사유가 댄서들의 미숙한 기량과 처우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파리 오페라와 결별한 뒤 메이저 상업극장의 안무를 도맡았다. 마르샹은 그를 폴리 베르제르에 영입했다. 쥐스타망은 불르바르 극장에서 매우 스펙터클한 대중적 발레를 안무해서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샹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담 마리퀴타

19 세기말- 20세기 초 폴리 베르제를 파리의 가장 유명한 뮤직 홀로 만들었고, 상업극장과 오페라 극장에서도 뛰어난 안무능력을 발휘한 최고의 무용가였다. 마리퀴타는 창의적인 안무능력도 출중했지만, 발레리나로서도 탁월한 기량을 갖추고 있어서, 파리 오페라 극장에 출연하였고, 포르트 생 마르텡 극장에서는 쥐스타망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타고난 댄서로서 어릴 적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전발레에서부터 이국춤, 대중춤 등 다방면의 춤에 정통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나 발레리나가 되었고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하지만, 국립극장의 엄격한 분위기에 실망하고 두 달만에 퇴단한다. 이 때부터 다양한 형식의 발레안무를 시작한다.

세기말의 풍경 (출처=steampunk.wonderhowto.com)

그녀는 1871년에 폴리 베르제르에서 댄서로 활동하다가 안무가로 발탁된다. 이 때부터 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많은 작품안무를 하게 되는데, 폴리 베르제르만이 아니라 오페라 코미크에서부터 불르바르 극장에 이르는 많은 극장의 안무를 요청받는다. 1880년만 보더라도 샤틀레 극장과 게테 극장의 발레 미스트레스와 뤼 블랑쉬의 안무를 맡는다. 1890년에 쥐스타망의 뒤를 이어 폴리 베르제르의 발레 미스트레스가 되어 1890-1904년 사이의 모든 작품을 안무하였고, 1898-1918년까지는 오페라 코미크의 발레 미스트레스를 맡는다. 이는 그녀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결과이자 무용경력의 정점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뮤직 홀 작품 <몽마르트르>는 오페라 코미크의 발레와 유사했다. 이는 곧 뮤직 홀 발레가 대중적이고 선정적인 작품만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 발레에 못지 않은 예술성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한다. 두 번이나 런던 알함브라의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일정이 맞지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동작을 끌어가는 힘과 창의성을 갖추고 있었고 관리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중극장에서는 스펙터클한 안무를, 국립극장에서는 점잖고 절제된 안무를 했다. 이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 무용의 흐름과 문화적 상황을 고려한 창의성이 늘 안무에 나타났다.

* 발레 닥시옹과 판토 발레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것이라는 주장에서는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 판토 발레는 댄서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을 가지고 개인적 제스처로 표현하는 것이고, 발레 닥시옹은 ‘포지션’과 스텝 등 발레 특유의 언어로 표현하는 발레 (『Pantomime : The History and Metamorphosis of a Theatrical Ideology』, 464)다’. 판토 발레는 마임이나 연기와 같은 특수한 동작을 사용하여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는 발레이고, 발레 닥시옹은 발레특유의 스텝과 포지션 등을 사용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형식은 다른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판토 발레가 18세기에 탄생하여 19세기에 발레 닥시옹으로 흡수되었다는 주장과, 판토 발레는 발레 닥시옹 이후에도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주장들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는 듯하다.

한편, 낭만발레 초기의 <지젤>같은 작품을 발레-판토마임(판토-발레가 아니라)으로 부르는데, 이는 판토마임 발레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발레 판토는 발레가 판토마임보다 더 중시되는 형식이고 판토 발레는 판토마임이 더 중시되는 것, 즉 예술발레와 대중적 발레의 차이인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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