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새로운 해석, 그러나 삼손의 상징성이 아쉬웠다
[공연리뷰] 새로운 해석, 그러나 삼손의 상징성이 아쉬웠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2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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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c)piljoo(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c)piljoo(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지난 10월 7-1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의 <삼손과 데릴라>가 공연되었다. 1980년 국내 초연 이후 무려 41년 만의 공연이었다.

2014년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연출을 맡았던 아르노 베르나르가 이번 <삼손과 데릴라>로 또 한 번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홍보 때부터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의 프러덕션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을 나치시대 독일 거주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바꾸었고, 1938년 유대인 대규모 약탈사건인 ‘수정의 밤’이나 1945년 드레스덴 폭격을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했다. 무대는 히틀러가 좋아했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축물을 옮겨와 연출의도를 잘 살렸고 조명도 아주 현대적으로 사용했다.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c)piljoo(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그러나 결정적으로 삼손의 상징성 묘사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왜? 구약의 삼손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대립하고 있었다. 삼손은 신의 사람으로서 머리카락에서 엄청난 힘이 나오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한 번도 자르지 않는다. 삼손의 존재만으로도 블레셋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삼손은 적국 여자의 유혹에 빠져 신이 내려준 거룩한 사명을 팽개치고 파국을 맞는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어리석기로 톱3에 들 만한 인물이다.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그런데 베르나르가 묘사하는 삼손의 시대는 삼손 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시기다. 유대인은 그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뿐이다. 결정적으로 삼손의 비밀인,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힘이 등장하지 않는다. 머리카락도 짧다. 데릴라에게는 힘의 비밀을 말해주나 그 비밀이 객석에 공유되지 않는다. 무대 뒤로 들어가 비밀을 말하고 무대 뒤에서 잡혀간다. 관객은 총성으로 삼손이 잡혔다는 것을 알 뿐이다. 데릴라가 비밀을 듣고 나와 삼손의 재킷을 벗긴 후 소리 지르는 것을 보아 재킷에 힘의 근원이 있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원작의 삼손은 다시금 머리카락이 자라나 힘이 생기고, 하나님의 사명을 마지막으로 완수하기 위해 블레셋인들의 신전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삼손은 그저 신께 기도할 뿐이다. 삼손의 원수는 동맹군의 폭탄이 갚아준다. 삼손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역사의 산 증인으로 삼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엔딩에서는 무대에 동맹군의 폭탄 투하 영상이 삽입되었는데, 현대 오페라는 앞으로 이러한 영화적 연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 같다.

연출자는 데릴라를 헤픈 여자가 아니라 부유하고 도도하며 프로파간다적인 여인으로 그려냈다고 하는데 의상 말고는 원작의 데릴라와 다른 점을 특별히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2막에서 데릴라의 연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사랑이여, 내게 힘을 주소서’나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를 부를 때, 풍성하고 낭만적인 그녀의 소리는 삼손 뿐 아니라 객석에도 황홀함을 전달했다. 이 노래를 듣고 데릴라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할 남자는 없으리라.

시대적 배경이나 무대는 현대적으로 바꾸었으나, 가사는 그대로 두었기에 관객들이 다곤 신을 히틀러로 생각하게끔 하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그다지 조화롭다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유대인 회당에서 미스 독일 선발대회를 열어서 체조를 시킨다거나, 나치스가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부분들은 꽤 디테일한 연출을 했다. 그러나 1막과 3막이 모두 나치들이 유대인을 괴롭히는 설정이다 보니 무대가 조금 지루한 느낌도 들었다.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데릴라를 노래한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의 노래와 연기가 좋았다. 삼손을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가 빛났다. 나치스 대장(다곤 신전의 사제)을 맡은 베이스 이승왕도 명료한 발성이 돋보였다. 이렇게 좋은 성악가들을 볼 때마다 기쁜 마음이 든다.

주인공 삼손은 테너 국윤종이 맡았다. 국윤종은 2막에서 사랑에 매달리는 바보 남자가 될 때에 가장 어울리는 미성을 가졌다. 여자에게 굴복해서 결국 신의 사명을 버리는 어리석은 삼손의 모습을,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며 신께 부르짖는 잊힌 영웅의 처절함을 그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 공연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화제를 모으고 무대에 집중하게 만드는 새로운 연출 시도는 좋게 보인다. 설득력이 다소 약했지만, 무대 창작자들의 과감한 시도와 변화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국립오페라단의 행보에는 계속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코로나 시대에 좋은 연출가와 스태프들을 모셔와 양질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어려운 시도를 반드시 관객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국립기관의 역할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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