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2) - 스승의 작고를 애도하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2) - 스승의 작고를 애도하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11.03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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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완순 무용원 앞에서 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육완순 무용원 앞에서 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더프리뷰=서울] 이 세상에 너무나 명확한 진실이 있다면 ‘누구나 죽는다’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어떤 죽음도 익숙하지 않다. 할 일을 멋지게 하고 살만큼(?) 살다 가는 사람들의 죽음도, 그리고 너무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에 가는 사람들의 죽음도, 죽음은 늘 뜻밖의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가야 하는 길이라는 걸 알지만 지인들의 죽음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으로 한동안 가슴속을 휘젓는다. 떠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예고 없이 말 없이 그 순간을 맞이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저 받아들이는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리고 죽음을 목도하고 사유해도 좀처럼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육완순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올해 나는 스승 두 분을 보내드리며 선생님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애도한다.

지난 7월 23일 작고하신 육완순(1933-2021)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쯤 ‘사랑하는 윤정’이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시던 선생님과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는 오래 전 프랑스 아비뇽 축제에서 선생님과 함께 같은 호텔방을 쓰며 공연들을 보고 아비뇽의 거리에서 햇살 받으며 로제 와인을 마시던 그날의 따스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선생님과 연습실 또는 극장에서 뵙는 것하고는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선생님을 가까이 보며 조우하던 추억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잠이 많은 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호텔방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선생님께서는 이미 화장과 머리까지 다 하시고 나가실 준비를 하고 계셔서 젊은(?) 나는 늘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었다. 나는 겸연쩍어 “선생님은 아침잠이 없으시죠?” 했더니 선생님의 돌아오는 답변은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나는 원래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란다. 평생을 매일 그 아침잠의 습관과 싸워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걸로 아침을 열지”라고 하셨다. 하긴 그 옛날 이대 연습실에서 아침 첫 레슨 시간이 7시여서 새벽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학교로 가던 길을 기억한다.

언젠가 오랜 공백을 깨고 선생님께서 공연을 하신다는 연락이 왔었다. 작품 고민을 많이 하시던 중에 유럽 무용의 흐름이 어떤 것 같으냐며 당시의 시류에 관해서 진지하게 물어 오셨다.

나는 선생님께 요즘 흐름과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보다도 선생님은 마사 그레엄 테크닉의 진수를 보여 주셨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있었듯이, 선생님을 가장 선생님답게 보일 수 있는 작품을 하시는 게 가장 멋질 거라는 주제 넘는 조언을 드리기도 했었다. 오히려 선생님의 형식을 더욱 형식화해서 주제를 표현하시는 것이 더욱 컨템포러리할 거라고 말이다.

공연을 보러 와주신 스승님들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공연을 보러 와주신 스승님들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나는 올해 초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공연 준비를 위해 선생님의 무용원(육완순무용원)에서 연습을 했었고 선생님은 가끔 사무실을 오가시며 연습중인 우리들을 지켜보시기도 했다. 연습 마지막 날은 맛있는 팥빵이라고 손에 쥐어 주시며 사진을 찍자고도 하셨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공연장을 찾아 주셨고 응원을 보내 주셨었다. 그리고 다시 재공연 연습을 위해 찾은 육완순무용원은 선생님의 부재 속에서도 선생님의 사진들과 소품들이 그대로 있었고 연습실 유리문 밖에서 가끔 지켜보시던 선생님이 여전히 계시는 것만 같았다. 하찮은(?) 사물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사라진다. 나는 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뒤 그들이 남긴 유품들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과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맞는 것인가?

나의 멘토이셨던 아트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그렇게 선생님의 빈 자리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데 뜻밖에 나의 유럽 유학시절부터 멘토이며 스승이셨던 아트 하우헤 선생님이 지난 10월 5일 세상을 떠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트 하우헤(Aat Hougée, 1945-2021)는 10월 5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갑자기 나타난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의 열정과 춤에 대한 지원은 전 세계 수많은 무용 예술가와 교육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아트의 혁신적인 예술교육 철학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하였고 그의 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그의 경이로운 업적에 감사하며 애도하는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한다. 또한 그의 파트너 올가 포나(Olga Pona)와 딸 주나 하우헤(Djuna Hougée)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라는 부고를 나는 공연 막바지 준비로 한창 바쁘던 중에 받았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동안은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에 오기 한 달 전 쯤에 처음으로 영상통화를 하자고 해서 우리는 영상으로 얼굴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스트리밍 공연으로 나의 작품을 보시고 섬세하게 피드백도 남겨 주셨었다. 한번 꼭 다시 러시아로 오라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그것이 선생님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주변 모든 고인들과의 마지막 순간은 늘 그랬다. 전혀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어설프게 만나고 헤어졌었다.

아트 후헤 선생님 (사진=아트후헤 페이스북)
아트 하우헤 선생님 (사진=아트 하우헤 페이스북)

아트 하우헤는 198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CNDO(Center for New Dance Development)를 설립했고, 그후 CNDO를 아른험(Arnhem)으로 옮겨 EDDC(European Dance Development Center)를 설립하면서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에도 그 분교를 두었었다. 메리 오도넬 풀커슨(Mary O'Donnell Fulkerson, 1946-2020)을 부교장으로 받아들여 함께 일했다. 흘리프 스바바르스도티르(Hlif Svávarsdottir)가 예술감독으로 있던 아르테즈 댄스아카데미(ArtEZ Dance Academy)로 합병되기까지 EDDC를 감독하셨고 ArtEZ에서 은퇴한 후 러시아로 건너가 시베리아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여생을 보내셨다.

아트 하우헤 선생님이 세운 EDDC 는 당시 기존의 교육 방식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콘셉트의 커리큘럼과 제도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학교 운영방식으로 유럽에서 가장 실험적인 학교였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안무가들과 학생들의 탐구와 실험의 온상이 되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정해 놓은 기존의 커리큘럼에 학생들을 맞추기 보다는 다양한 예술가들(공연예술가, 작곡가, 연주자, 디자이너, 비디오예술가, 사상가)이 현장에서 느끼는 관심사를 탐구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가르치도록 했다. 학교는 밤낮으로 24시간 연중 무휴로 열려 있었고 스튜디오와 녹음실, 복도, 학교 야외공간과 실내공간, 그리고 학교 극장도 예술가들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다. 학교의 모든 공간은 학생들의 발표의 장으로 학교 전체 공간을 쓰게 했다. 나는 언젠가 학교 화장실에서 공연을 하던 학생의 작품이 떠오른다.

아른험 예술대학 타과 학생들과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권장되어 음대에서 온 다양한 장르의 연주가들이 참여하는 이박삼일 연속 즉흥잼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년 세계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는 졸업생들을 불러모아 공연을 하는 페스티벌도 열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주관 하에 열렸던 것이다.

EDDC에서 아트 선생님의 첫 인상

나의 유학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EDDC에 들어갔을 때 동양인 학생은 내가 처음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관심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는 학기가 시작되도록 집을 구하지 못해 미국에서 온 학생 몇몇하고 학교 스튜디오에서 여러 날을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의 개성 강한 모습들에 압도되기도 했고 학교 시스템도 너무 낯설어서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

독일에 오신 아트 선생님과 (사진제공=김윤정)
독일에 오신 아트 선생님과 (사진제공=김윤정)

요즘은 너무나 대중화되어 있지만 당시는 처음 접해 보는 펠든크라이스, 필라테스, 몸 인지법, 움직임 구성법, 접촉즉흥, 알렉산더 테크닉, 릴리즈 테크닉, 해부학적 릴리즈 테크닉 등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닌 나였지만 거의 모두가 생소한 수업들이었다. 그리고 음악 수업은 녹음실과 편집실에서, 조명 수업은 극장에서 일대일 수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낯선 환경에서 내가 기억하는 아트(평소 내가 사용하는 호칭 그대로)의 첫 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학교에 적응하는 반년 동안 내가 보아 온 아트는 늘 학교에 제일 먼저 나와서 학교 주변을 정리하고 학생들의 공연이 끊임없이 있던 학교 극장에서도 늘 한 구석 자리에 앉거나 극장 주변을 정리하곤 하셨다. 그런 모습에서 나는 그를 성실한 학교 수위 아저씨(Haus Meister)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학교 사무실에서 일을 보시기도 하고 수업을 참관하시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 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학교 카탈로그에도 수업을 맡은 선생님들 위주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아트 하우헤라는 이름의 교장과 늘 조용하게 학교 주변을 정리하고 다니는 인물을 동일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를 회상해 보면 학교 정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맞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남자 선생님과 남학생이 학교 복도에서 스스럼없이 키스를 하는 것도 문화충격이었고, 모든 상황이 낯설고 낯선 유학 초년생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외부에서 안무가가 와서 오디션을 해서 작업을 하고 투어를 가는 커리큘럼에 내가 뽑혀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블루단짜 무용단이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서 석 달간 머물며 작업을 했었다. 연습이 끝나고 이탈리아, 영국, 독일, 네덜란드로 순회공연을 가는데 아트 선생님이 동행하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 더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에서 나의 첫 안무 작업을 끝냈는데 반응이 꽤 좋아서 두 번째 작품부터는 정식으로 지원금 지원서를 주정부에 내기로 했다. 그때 아트와 탄츠하우스 극장장 베르트람 뮐러(Betram Müller)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콘셉트를 써주었는데 내 영어 실력으로 지원서를 내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아트의 집 거실, 빽빽하게 쌓인 책 더미 속에서 우리는 작품 이야기를 나눴고 아트는 집중해서 나의 의도를 들어주고 글을 써주신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인 기획서를 다시 베르트람 뮐러가 마지막 점검해주는 과정을 거쳤다.

그 시기는 아트 선생님이 자신의 콘셉트가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며 과감하게 학교를 떠나려던 시점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형식을 배우기 이전에 스스로 형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가도록 하는 콘셉트의 학교를 만들었지만 이미 그 자체가 또 다른 정형이 되어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학교는 아르테즈(ArtEZ)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경계가 없고 무엇이나 가능한 모든 형식이 합쳐져 버렸기에 지금은 오히려 소울백의 시대가 온 것 같다”고 하셨다.

학교가 통합되면서 나는 거기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정교수 월급보다 높은 강사료에 너무 놀랐었다. 프리랜스 강사는 그 시기에 다른 일을 못하고 강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시간 외에 준비하는 시간도 고려한 보수라고 했다. 강사로 온 예술가들이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트의 꾸준한 설득과 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 정책이었다.

아트는 학교 퇴직 후 그의 제자 중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던 자샤 발츠(Sasha Waltz)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당시 독일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던 그녀는 자기가 없어도 뻗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며 자기는 자신의 능력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있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내 곁에서 거의 무보수(?)로 몇 년간 일을 봐주셨다. 그리고 러시아 안무가 올가 포나와 사랑에 빠지셨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 남은 인생은 한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사랑을 택하겠다며 러시아로 떠나셨다. 러시아에서도 올가 포나 무용단을 위해 헌신하시면서도 간간히 탄츠메세의 콘텐츠도 만들어 주시고 웹사이트를 맡아 일을 하시기도 했다.

탄츠하우스에서 (사진제공=김윤정)
탄츠하우스에서 (사진제공=김윤정)

그 후로도 내가 독일에서 젊은 작가 해외연수 장학금을 받아 미국 팜스프링스의 스키드모어 칼리지에서 연수를 받고 있을 때 마침 아트는 뉴욕 외곽에 있던 자신의 농장에 계셨었는데 수업이 없는 주말에 나를 픽업하러 와 주셨다. 아트는 일 년에 두 번은 이 농장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으시면서 러시아의 추운 겨울 대신 그곳에서 보내곤 하셨다. 그야말로 대자연 속의 농장이었는데, 오래전 아주 헐값에 사셔서 집 두 채와 스튜디오, 그리고 사우나까지 지어서 EDDC 프로젝트로 매년 학생들이 머물면서 작업과 공연을 하게 했었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고 우리는 한 마음으로 미국의 상황을 비판했고 아트는 그 즈음에 농장을 팔기로 결심하기도 했었다.

아트와 내가 늘 의견이 투합한 건 아니었다. 같은 공연을 보고도 의견은 가끔 엇갈리곤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부분을 토론하기를 즐겼다. 나와 다른 의견은 나에게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또 나의 생각의 폭을 넓혀 주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국이 월드컵 경기에서 처음으로 4강 진출을 하던 때였는데 어린 아들 유진이를 데리고 응원하러 간다고 하니 아이에게 애국심을 키워주기 보다는 자기 문화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셨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는지 아느냐면서 말이다. 축구경기 하나 보러 가는데 너무 거창한 말씀 같았지만 사실 그 말씀은 울림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독일에 오신 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독일에 오신 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김윤정)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아트와 함께했던 추억들은 끝이 없다. 러시아의 영하 30도 추위 속에서 내가 객원 무용수로 출연했던 올가 포나의 <Waiting>이라는 작품도 나에게는 뇌리에 박혀 있다. 그 작품으로 올가는 러시아 최고의 영예인 골든 마스크 상을 받았고 2002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에 초청 받기도 했었다. 무용가들의 언저리에서 헌신적으로 묵묵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아트 하우헤, 그의 인생 여정 속에서 한 페이지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행복했다.

인생은 만남이 전부다. 너무나 소중한 만남들을 우리는 과소평가하거나 사소하게 여기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 아름다운 가치와 소중한 순간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표현하려면 이미 때늦어 있다. 매순간 하고 싶은 말과 감정들을 표현하고 살아야 한다. 내일, 아니 한 시간 뒤, 십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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