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3 뮤직홀(9)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3 뮤직홀(9)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06 1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리 뮤직 홀 발레(2) - 전시주의
엑셀시오르 - 1967년 피렌체 (출처 : agefotostock.com)

발로 그란데, 그랜드 오페라

19 세기말 파리의 샤틀레, 게테, 포르트 생 마르텡 등 인기있는 상업극장에서는 스펙터클한 발레가 공연되었다. 쥐스타망과 마리퀴타도 이들 극장의 안무에 관여하였다. 스펙터클은 장르나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발레, 멜로드라마, 오페라, 연극에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에서도 유행했다. 1883년 에덴 극장에서 공연한 <엑셀시오르 Excelsior>는 이런 스펙터클의 정점에 있는 발레로서, 1881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고 파리에서 재무대화한 작품이었다. 출연인원 500여명에, 12번의 장면전환과 6막 11장에 달하는 작품으로, 뚜렷한 스토리는 없었지만, 역사와 알레고리를 사용하면서 문명과 야만,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문명의 승리를 그려낸 대작이었다. 이를 제작한 루이지 만조티(Luigi Manzotti)는 이 작품 이외에도 <시에바>, <스포트> 등의 대작을 만든 ‘발로 그란데(ballo grande- 그랜드 발레)’의 대가였다. 엑셀시오르는 이후 오랫동안 유럽을 순회하였다. 만조티의 또 다른 발로 그란데, <시에바>는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발레로 500여명의 출연진과 군대캠프, 천국과 지옥문, 난파선 등이 등장하는 화려한 세트가 압권이었다. <메살리나>에는 코끼리와 말 등 실제 동물이 등장하였다.

발로 그란데 이전에 프랑스에는 그랜드 오페라가 있었다. 1830년대 초, 루이 베롱(Louis Veron)에 의해 시작되어 1870년대까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화려한 세트, 미술, 오케스트라, 그리고 2막에 등장하는 발레 등 하나하나가 관객의 경탄을 자아냈다. 주제도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서 이에 걸맞는 거대한 장치가 필요했고, 길이도 4막 또는 5막이나 되었다. 거기에 파리 오페라 극장 자체가 스펙터클이었다.

전시주의

파리 뮤직 홀 발레도 이런 거대한 스펙터클의 연쇄속에 위치한 인간의 시각적 욕망의 표출이었다. 스펙터클의 연쇄는 시간만이 아니라 지리적 연쇄도 포함한다.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거대한 스펙터클의 국제적인 체인 또는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상업적 공간인 뮤직 홀은 오페라 발레보다 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스펙터클을 도입했다. 감당할 수 있는 비용과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도덕의 범위내에서 볼거리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전략이었다. 주제가 아무리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해도 스펙터클을 이길 수는 없었다. 롱기누스는 ‘ 웅대한 것은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황홀하게 하고, 경탄케 하는 것과 놀라게 하는 것은 대항할 수 없는 권세와 힘을 행사하여 듣는 이를 모두 제압’ 한다고 하였고,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을 마약이라고 하였는데, 파리 뮤직 홀 발레의 스펙터클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취제였다. 자극적이고 화려하고 관능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노출하는 것이 뮤직 홀 발레의 기본전략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발레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여성의 신체와 아름다움, 다양한 춤사위, 코르티잔(고급매춘부)의 출연, 곤충이나 동물을 동원한 기괴한 주제들 , 여성이 남성역할을 대신하는 앙 트라베스티 등 다양한 형태의 보여주기가 있었다. 이를 전시주의(Exhibitionism)라고 부를 수 있다.

전시주의는 가슴이나 성기와 같은 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노출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성도착적이고 일탈적인 행위를 말하는 심리학 용어로, 예술에서는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이나 코끼리 똥 등을 사용하여 검은 피부의 성모를 표현한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 안드레스 세라노의 < 예수의 오줌> 같은 일탈적이고 탈전통적 작품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 용어를 뮤직 홀과 같은 대중문화에도 적용하고 그 개념을 확장할 수 있다. 일반적인 전시주의의 속성인 일탈적이고 기괴한 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를 최대한 전시한다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뮤직 홀 자체가 온갖 버라이어티한 볼거리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보자면 강한 전시주의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발레는 특히 전시주의적 속성이 강했다. 전시주의는 오늘날의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공통적 성격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야말로 전시주의가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크리스 오필리, '성모 마리아' (출처 : moma.org)

뮤직 홀 발레에서 전시주의의 핵심적 수단은 여성의 신체였다. 기획자는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우선 집단 스펙터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코르 드 발레, 군중신, 타블로가 있었다. 또 하나의 전략은 반나에 가까운 최대한의 신체노출과 댄서가 추는 섹시한 춤이었다. 캉캉, 외설춤(danses lascives), 유혹춤(seduction dance)과 다양한 종류의 캐릭터 댄스가 있었다. 성적 매력과 사회적 지명도를 구비한 고급매춘부, 즉 코르티잔을 마임이나 댄서로 기용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매춘부가 출입할 수 있도록 큰 프롬나드를 지어 남성 관객들을 유혹했다. 이러한 일련의 스펙터클, 성을 활용한 상업성은 런던보다 파리가 훨씬 강했다.

시설

스펙터클의 일차적 조건은 화려한 시설이었다. 에두아르 마르샹은 폴리 베르제르의 경영을 담당하자마자 고급극장에 버금가는 공연장을 목표로 시설의 개보수에 착수했다. 객석을 로비의 높이에 맞게 올렸고, 박스석과 발코니석을 보수했다. 오케스트라석의 벤치를 개별의자로 바꾸었고 갤러리에는 새로운 바를 설치했다. 전기램프는 잘 가려서 보이지 않도록 하였고, 벽에는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거울을 달아 밝은 빛을 반사하게 하였다. 관객은 자유롭게 객석과 프롬나드, 갤러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카페 콩세르적 분위기는 과거보다 약해졌다. 폴리 베르제르는 이렇게 해서 화려한 뮤직 홀로 거듭난다. 시설이 관객에게 주는 인상은 대단히 큰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극장과 초라한 극장이 주는 차이는 대단하다. 그랜드 오페라의 개척자, 루이 베롱도 파리 오페라 극장의 경영을 맡은 뒤 가장 먼저 착수한 일도 시설의 개보수였다.

카롤리나 오테로(출처 : 위키피디아)

무대와 의상

뮤직 홀은 일반 극장처럼 크지는 않았고, 세트나 기계장치에 대한 투자도 적었다. 카지노 드 파리는 윙도 없었다. 발레에만 사용하기 위해 굳이 무대를 넓힐 필요도 없었다. 그 대신 디자인과 의상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파리의 유명한 디자이너와 직공들에게 디자인을 부탁하였는데, 이들은 의상에 특히 신경을 썼다. 대중들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의상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중년부인들의 관심이 컸다. 댄서들의 의상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오테로를 예로 들면 비단, 새틴, 스팽글, 구슬장식,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의상에 최고급 구두, 가발, 악세서리 등으로 치장하고 등장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갖 장식을 하고 출연하였다. 이 화려한 발레리나들의 의상 덕분에 중년부인 고객이 늘어났고, 경영자들은 이를 최대한 이용했다. 디자이너나 의상제작자도 덩달아 유명해졌고 이들의 이름이 팜플렛에 게재되었다. 오늘날 연예인들의 유행창조현상처럼 뮤직 홀 출연자들의 의상과 패션, 보석 등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신기술은 무대를 바꾸었다. 전기조명과 컬러조명이 도입되면서 더욱 밝아지고 화려해졌다. 특수효과도 많이 사용되었다. 폴리 베르제르의 1893년작 <연꽃>에서 첫 번째 타블로의 폭풍장면은 진짜 천둥과 번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두 번째 타블로에서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스펙터클은 더 장관이었다. 수천 개의 유리조각으로 많은 수정커튼이 무대조명과 함께 금속줄에 걸려 있었다. 실제 비와 수정 커튼을 포함하는 스펙터클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마르샹은 몇 달만에 이를 회수했다. 그들은 특수효과의 사용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고, 검증된 것만을 사용하였다. 수정커튼은 1892년 런던 알함브라에서 공연된 <알라딘>에 사용되어 갈채를 받은 것이었는데,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도시풍경과 시골풍경이 교차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무대가 더욱 화려해졌고, 대신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마을사람들이 무대로 뛰쳐나와 싸움이나 결투를 구경하거나 결혼식이나 축제에 참석하는 장면도 큰 장관이었다. 역사물에서는 군중신도 스펙터클이었다. 왕의 행차나 군인들의 행진같은 거창한 행진장면을 자주 재현하였는데, 이런 장면에서는 연극적 타블로를 삽입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많은 댄서와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스펙터클을 구성하고 화려한 색채감과 동작을 보여주었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묘사하는 일도 있었는데, 거기서 결혼식 장면, 마을 축제 , 행진 장면 등을 보여주었다. 빅토르 위고의 80회 생일 때 벌였던 6시간의 행진장면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판토 발레의 구성요소

전통적 발레 닥시옹에서는 춤의 비중이 마임보다 더 컸다. 이런 경향은 완전한 판토 발레로 이행되기 전단계인 유사 디베르티스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판토 발레로 넘어가면서 마임이나 연기가 댄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Parisian Music Hall Ballet』) 이런 경향은 댄스와 마임, 스타 발레리나와 마임 아티스트 사이의 힘의 균형까지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마임이 중요해졌다는 건 발레가 더욱 대중적이 되고 출연자도 대중연예인이 더 중요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프로그램의 배치와 순서 등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댄스와 판토의 순서는 매우 유동적이었고 표준화된 건 없었지만, 대개 판토마임으로 시작하여 앙상블 댄스와 타블로로 끝나곤 하였다. 이는 알함브라와 같았다.

툴루즈 로트렉, '에밀리엔느 달랑송과 마리퀴타'(nga.gov.au)<br>
툴루즈 로트렉, '에밀리엔느 달랑송과 마리퀴타'(nga.gov.au)

- 주제

뮤직 홀 발레의 주제는 흥미롭고 오락적인 내용들, 즉 대중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된 주제는 사랑과 로맨스였다. 벨 에포크의 시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불르바르 극장의 발레, 정치.사회적 문제를 벗어난 즐거운 로맨스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가들은 로맨틱 코메디를 가장 많이 다루었다.

판토 발레로 바뀌면서 점점 더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사랑, 동화의 형식을 빈 로맨스, 이국적 판타지, 목가적 풍경 등을 소재로 하였다. 여기에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갈등의 문제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신화나 역사를 주제로 한 발레도 많았다. 1870-1912년 사이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는 세 편의 신화를 제재로 한 발레를 만들었을 뿐이었지만, 뮤직 홀에서는 많은 역사발레를 창작하였다. 특히 인기 있었던 인물은 나폴레옹이었고, 이외에도 <마담 보나파르트>, <마담 말부르크> 등이 제작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여기서는 앙 트라베스티가 출연하지 않고 남자 주인공을 전부 남성댄서가 맡았다는 점이었다. 남성성의 상징인 영웅이나 투사를 여성이 연기하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슬랩스틱 코메디나 코메디물도 빠질 수 없었다.

이국적이거나 특이한 주제들, 예를 들면 동물이나 곤충을 다루는 기괴한 내용도 있었다. <메뚜기>라는 작품은 그물에서 빠져나온 메뚜기가 인간을 물고 핡퀸다는 내용으로 피날레는 빈대들의 춤으로 끝난다. <성 요한의 파리>라는 발레는 부잣집 딸을 사랑하는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거지가 나타나 소녀의 강요된 결혼을 막고 소년과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거지가 파리떼의 여왕이라는 황당한 설정이다. 동물에 대한 발레도 있었다. <꼬끼오Cocorico>라는 발레는 암탉과 요리사와의 관계를 그린 작품으로 댄서들이 암탉으로 분장하고 출연하였다. <토끼>는 토끼와 사냥꾼의 관계를 묘사한 발레였다.( 『Parisian Music Hall Ballet』)

시사적 주제나 현대적 주제들도 다루었다. 마르샹과 마리퀴타가 협력했던 1890년대 이전까지의 뮤직 홀 발레는 주로 낭만발레, 이국적 판타지, 동화 등이었지만, 영국 뮤직 홀 발레를 보고 온 뒤에 마리퀴타는 관객들이 대중들의 삶이나 도시의 모습, 시사적 주제에도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 마리퀴타는 파리의 모습, 시민들의 삶의 모습들을 뮤직 홀 발레에 담기 시작한다. 20세기 초반에는 스포츠도 많이 다루어졌다. 뮤직 홀 발레가 다루지 않은 것은 주식시장의 폭락, 경기침체나 사회적 격변과 같은 사회적 혼란상이었다. 오페라나 오페레타, 무랑 루즈의 무도회, 사라 베르나르의 작품 등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뮤직 홀 발레는 현실도피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대중오락이었던 것이다.

- 마임과 연기

판토마임 발레는 춤이 있는 장면과 춤이 없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춤이 없는 장면은 크게 1) 제스처와 판토마임 2) 연기 3) 타블로 등 세 가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야기의 존재는 필수였다. 마임은 19세기 판토 발레의 기본적 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전문적 마임 아티스트를 스카웃하는 경우도 있었고, 댄서보다 더 유명한 마임 아티스트도 있었다. 마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 마임에 사용되는 제스처는 인습적인 동작으로 보편적인 기호와 같은 기능을 하였기 때문이다. 대중들을 위해 개발된 코드화된 마임이 있었고,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판토마임으로 시작한 것도 마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임은 발레단의 발레기술보다 더 매력적이었고, 그들의 제스처와 연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두 명의 남녀 주역 무용수가 공연을 이끌어가지만 판토 발레에서는 마임 아티스트를 별도의 주역으로 사용한다. 주역이 세 명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남자 주역도 여성이 하는 앙 트라베스티를 적용하였기 때문에 세 명의 여성이 이끌어간 것이었다. 이는 또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1897년 올렝피아에서는 <사르다나팔레, Sardanapale>라는 유사역사물을 공연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춤보다 연기장면이 더 많았다. 앗시리아의 군주 사르다나팔루스가 바알 신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 의식을 거행하다가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고 납치하여 궁으로 데려온 후 그녀를 위해 춤을 추는데, 반란이 일어나고 군중들이 궁으로 난입한다는 줄거리다.

바로 다음해 올렝피아는 <네로>를 제작했는데, 이 역시 춤보다 연기가 많은 발레로서, 네로에 의해 벌어지는 젊은 연인들의 이별, 기독교인들의 수난, 로마의 화재 등을 묘사한 발레였다.

- 타블로

타블로는 타블로 비방과 같은 형식도 있었지만 발레에서는 춤과 타블로가 결합된 형식이었다. 타블로는 낭만발레와 불르바르 연극에서도 많이 등장했다 . 뮤직 홀 타블로는 퍼레이드, 앙상블 댄스, 마임 등의 끝에 등장하여 강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런 배치도 알함브라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타블로가 종결부에만 배치된 건 아니었고, 때로는 처음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변에서, 1883>라는 작품은 여성 어부들이 조용한 해변에서 잠자는 타블로로 시작한다. 상황이나 작품전개의 흐름 등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배치했던 것이다. 타블로는 섹시한 느낌을 주도록 기획되었다.

툴루즈 로트렉의 무랑 루즈 포스터(출처 : pinterest.cl)

특별한 두 번의 타블로가 있었다. 하나는 폴리 베르제르에서 1893년 초반에 제작한 <무지개(l'arc-en-ciel>라는 춤으로 무랑루즈의 댄서 제인 아브릴(Jane Avril, 1868-1943)이 기용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무지개 동화가 삽입된 디베르티스망으로, 7 명씩 두 그룹이 7 개의 무지개색 옷을 입고 등장하여 만화경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다가 동작을 멈추고 무지개를 그려내는 타블로였다. 제인 아브릴은 댄서가 아니었다. 매춘부였던 어머니와 헤어진 갖은 고생 끝에 21살에 무랑 루즈에서 춤을 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이후 자르뎅 드 파리스라는 메이저 카페 콩세르에서 활약하다가 1895년, 27살에 무랑 루즈의 주역무용수로 다시 들어가 파리의 밤무대를 주름잡는다. 이처럼 댄서가 아닌 배우나 마임 아티스트가 인기를 얻은 것도 판토 발레의 특징이었다.

또 하나는 1893년 후반기에 만든 <연꽃, Fleur de Lotus>으로 인도가 배경이었다. 주인공과 요정이 등장하여 주인공이 여동생을 찾아 몇 시간이나 걸어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있는 호수에 당도한다. 호수에는 물의 요정 페리스들이 있었고 잠자는 하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페리스들은 꽃에게 다가와 목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벌거벗은 꽃은 호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한다. 긴 머리를 묶어서 땅에 떨어뜨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이어서 타블로 자세를 취한다,

대부분의 발레의 끝은 타블로로 끝났다. 이를 대단원(Apotheosis)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의 끝부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타블로가 그 예다.

- 댄스

뮤직 홀 발레의 춤은 크게 클래식 발레와 캐릭터 댄스로 구성되었다. 클래식 발레의 핵심은 짧은 주역무용수들이 추는 독무, 즉 바리에이션으로 플롯과 관계없이 주역의 댄스 기량을 자랑하는 코너였다. 당시에는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거나 이탈리아인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발레리나들이 기량이 높았다. 이들은 그 대표적인 댄서는 리나 캉파나(Lina Campana)였다. 캉파나는 이탈리아의 튜린에서 교육을 받은 뒤, 폴리 베르제르와 올렝피아, 게테와 에덴 등 상업극장, 런던의 알함브라 등을 오가면서 공연하였다. 바리에이션만이 아니고 파드 되나 앙상블 댄스도 관객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군무는 그렇지 못했다.

캐릭터 댄스는 클래식 발레중에서 성격이 독특하고 강한 발레를 말하는 것으로 민속 무용, 민족무용, 소셜 댄스 등을 말한다. 오래된 과거의 사건이나 중동, 아시아 지역 등 이국의 춤을 활용한 민족무용이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인 <프리네>에는 고대 아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그리스 등의 민족무용이 들어가 있다. 농부, 꽃, 수확 등을 주제로 한 민속무용도 있었다. 이 밖에 농부, 꽃, 수확 등을 주제로 한 민속무용도 있었다.

캉캉, 외설춤( Danse Lascives= lascivious dance), 유혹춤 등의 관능적 춤 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페라 발레와 대중극장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오페라 발레에서는 1830-1900년대에 목욕하는 장면, 캉캉 등 육감적 춤 등이 등장하였고, 불르바르 극장과 영국 뮤직 홀에서도 외설적 춤들을 추었는데, 이들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뮤직 홀 발레와 오페라 발레는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가 있었다. 뮤직 홀 발레는 대중의 욕망에 맞추어 전시주의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볼거리와 흥겨운 음악, 오락적 이야기, 섹시한 의상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춤을 반드시 전문댄서에게만 맡긴 것이 아니라 대중연예인 등에게 맡겨서 관객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훈련받은 전문적 댄서보다는 마임연기가 탁월한 배우, 미모를 갖춘 여성, 대중적 스타를 동원하였다.

툴루즈 로트렉, '캉캉 춤'(출처 : pinterest.com)

<황금그물>이라는 작품은 기사, 땅주인, 양치기 등 지나가는 행인을 자신의 동굴로 유혹하여 그물에 가두는 유혹녀에 대한 발레였다. 포획된 남자는 유혹녀의 발밑에 잠들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아마디스라는 젊은 남자가 이 남자를 구하려 눈길을 뚫고 거미동굴에 도착한다. 유혹녀가 유혹하는 춤을 추지만 이를 이겨내고, 이 남자를 깨워 동굴입구에 다다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거대한 황금거미가 기다리고 있다. 아마디스는 이 황금거미를 찌르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유혹녀의 발밑에서 잠들고 만다.

스펙터클로서의 여성

- 누드

뮤직 홀 발레는 여성과 여성의 신체, 그리고 그들의 신체동작을 상업화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파리 뮤직 홀에서 두드러진다. 신문은 포스터 등에 등장하는 발레리나들의 가슴과 다리, 그리고 거의 반누드 상태의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는 허구였고 누드는 없었다. 발레와 판토마임이 외설스런 장면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이를 센세이셔널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는 도덕이나 윤리, 사회적 시선 때문이었지 기획자들의 생각은 이보다 더 에로틱한 몸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최대한 신체를 노출시킬까에 골몰했다. 발레는 루이 베롱의 그랜드 오페라 이후부터 환락의 궁전, 성, 여성등과 동의어로 여겨져 왔다. 마이어베어의 그랜드 오페라 <악마 로베르>에 등장하는 ‘수녀들의 발레’에서 시작된 관능적인 춤은 그 이후 많은 오페라 발레에 등장했다. 특히 목욕하는 장면, 옷을 벗는 장면도 여러 작품에 나오는데, 이런 것들이 뮤직 홀 발레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목욕하는 장면을 설정하는 건 자연스럽게 여성의 신체를 노출시키기 위한 의도적 설정이었다. 폴리 베르제르에서는 <해변에서>, <목욕하는 여인> 등을 제작했고, 이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올렝피아에서도 <브라이튼>, <여자 목욕탕> 등을 제작하였다. 여성의 신체노출 장면은 이야기의 내용과 관계없이 점점 많아졌고, 터키의 목욕탕도 등장하였다. 바다, 호수,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댄서는 옷을 벗도록 연출하였다.

<네 예술에서의 에밀리엔느 , Emilienne aux Quat'z'Arts>, <프리네>, <로렌차> 등의 작품에서는 예술의 이름으로 옷을 벗도록 요구하였다. <네 예술에서의 에밀리엔느>는 ‘네 예술의 무도회 Bal des Quat'z'Arts’를 패러디한 작품이었다. < 에밀리엔느>에도 여러 번의 옷벗는 장면이 있었다. <프리네>는 고대 그리스의 코르티잔인 프리네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여기서도 누드장면이 등장하였고, <로렌차>는 르네상스 시대의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조각가가 누드모델을 써서 조각을 만드는 발레였다. 이들 누드 모델들은 타블로 자세를 취했다.

- 앙 트라베스티

젠더바꾸기(Travesty)가 유행했다. 영웅, 화가, 조각가, 상인, 은행원등 남성역할을 여성 발레리나들이 맡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등장한 역은 군인이었다. 장교, 검투사, 전사 등의 역할을 여성들이 담당했다. 젠더바꾸기가 뮤직 홀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모든 프랑스의 극장과 발레에는 수십년 동안 이 관행이 있었다. 오페라 극장 발레도 낭만 발레이후 점진적인 여성화 경향이 진행되었다. 낭만주의의 여성성은 발레리나를 스타로 만들어나갔고,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대신 남성 무용수들은 감소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이런 경향이 점점 강해졌고 남성무용수들은 거의 춤을 추지 않았고, 단순한 장식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에 파리 오페라의 루이 베롱은 발레를 여성들의 쇼로 만들었다. 풍만한 가슴과 섹시한 다리를 가진 발레리나들이 남성 주인공을 담당하고 스타가 되는 것은 당시의 유행이었다. 여성이 남성역할을 하면 아무래도 더 노출하게 된다. 관객들은 이를 바란다. 여성 두 명이 나와 동작을 맞추면 분장한 성별과 관계없이 더 에로틱하게 보인다.

리안 드 푸기(위키피디아)

- 코르티잔

19세기 프랑스에는 세 계급의 매춘부가 있었다. 가게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연인에게 물건을 받고 몸을 팔던 여공(grisette), 성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일반적 의미의 매춘부(lorette), 그리고 고급 매춘부(grandes horizontales), 즉 코르티잔이었다. 코르티잔도 매춘부를 의미하지만 사창가의 일반적인 창부와는 다른 고급 매춘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황진이와 같은 기생이었다. 쟝 콕토는 이들을 ‘ 파리의 게이샤’라고 표현한 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이란(花魁)이었다. 일본에도 일반 게이샤와 고급 매춘부인 오이란의 구별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코르티잔은 패션, 의상, 보석, 문화와 예술,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유명인사로서, 오늘날의 연예인에 가까웠다. 유명한 코르티잔이 되는 것은 출세의 한 방편이었고, 큰 돈을 버는 코르티잔도 있었다. 그래서 코르티잔이었던 사라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딸도 코르티잔으로 키워, 생계를 의탁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딸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세기 말 파리에는 코르티잔 출신의 3대 미인이 있었다. 에밀리엔느 달랑송 (Emillienne d'Alencon) , 리안 드 푸기 (Lianne de Pougy, 1869-1950), 라 벨 오테로 (Carolina Otero, 1868- 1965)였는데, 이들은 뮤직 홀 발레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이들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행한 청소년 시절을 겪은 뒤 코르티잔이 되어 엔터테인먼트계에 진출하거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을 하다가 코르티잔이 된 여성들이었다.

이 중에서 드 푸기와 오테로는 라이벌이었다. 드 푸기는 17살에 해군장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파리로 도망쳐 댄서가 되고 코르티잔이 된다. 리안 드 푸기는 애인 중 한명의 이름을 딴 예명이었다. 나중에는 동성애자가 되었다가 수녀가 되어 스위스에서 일생을 마친다. 반면에 오테로는 스페인 출생의 댄서로 어렸을 적부터 발레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특별히 무용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대로 춤을 출 뿐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가혹한 성폭력을 당해 파리로 도망친다. 우연히 한 후원자가 나이트클럽에서 댄서로 취직을 알선해주었지만 밤에는 극장뒤로 찾아오는 손님들과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다. 이 때부터 부유한 후견인들의 도움으로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댄스로 파리의 명사들을 매혹시킨다. 그러자 그녀의 예술을 관리해줄 매니저가 등장하고, 미국 투어를 기획하여 성공한다. 파리로 돌아온 오테로는 매니저와 결별하는데, 그러자 매니저는 자살한다. 그녀는 스페인풍의 이국적인 춤사위와 어마어마한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의상, 에로틱한 자태로 10여년 동안 폴리 베르제르를 대표하는 댄서가 되고, 국제적인 스타가 된다. 유럽 전역과 미국을 순회하면서 엄청난 인기와 부를 쌓았고, 웨일즈 왕자, 세르비아, 스페인, 러시아 등지의 고관대작들과의 염문을 뿌린다. 남성들은 오테로를 차지하기 위해 결투를 하기도 했고, 6명이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테로는 40살 경에 재산이 2천5백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심각한 도박중독에 빠져 모든 것을 잃고 나중에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치매에 걸려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드 푸기와 오테로는 춤에서만이 아니라 보석에서 큰 라이벌이었고, 그들의 보석은 파리의 큰 화제였다. 어느 공연 개막일에 리안 드 푸기는 모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보석을 걸치고 등장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실제로 그녀는 몇 킬로 밖에서도 반짝거릴 정도의 진짜 다이어몬드를 걸치고 등장하였다. 관객은 탄성을 질렀다. 다음에 등장할 오테로의 보석을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오테로가 등장했다. 그녀는 몸에 아무 보석도 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뒤를 따르던 하인의 온 몸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코르티잔이 뮤직 홀 발레에 등장한 데에는 여성을 이용하려는 상업성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 판토마임 발레의 연극적 성격과도 관계가 있었다. 남녀 주역 무용수, 즉 전문댄서가 주인공이 되는 오페라 발레와 달리 뮤직 홀의 판토마임 발레에서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성역할을 하는 여성댄서, 즉 앙 트라베스티의 여성댄서와 여자 주인공역의 프리마 발레리나, 마임역의 여성이었다. 나폴레옹이나 네로와 같은 역사적 인물의 경우에는 남자댄서가 남자주인공을 맡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여자가 남성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마임역은 전문적인 댄서가 아니라 배우나 전문 마임 아티스트가 담당했다. 남녀 댄서도 클래식 발레의 바리에이션을 춘 것이 아니라 캐릭터 댄스나 대중춤을 추었다. 그러니까 스타 발레리나라고 해도 이들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마임과 발레를 같이 하는 댄서도 있었지만 마임은 전문 마임 아티스트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매우 인기가 있어서 여러 극장에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마임을 다양한 분야에서 스카웃하기 시작했고, 코르티잔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클레오 드 메로드(출처: stagebeauty.net)

1890-1910 년 사이 파리에는 코르티잔들이 전문댄서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아름다움과 명성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이들 세 명의 코르티잔 이외에도 , 파리 오페라 극장, 폴리 베르제르, 런던의 알함브라 등에서 활약한 댄서 클레오 드 메로드(Cleo de Merode)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댄서 겸 배우로, 역시 코르티잔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춤이나 연기기량보다 미모로 더 인기를 얻은 배우였고, <프리네>와 <로렌차>는 그녀를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프리네는 그리스 시대의 코르티잔이었다. 마담 마리퀴타가 폴리 베르제르에서 알프레도 쿠르티는 올렝피아에서 경쟁하듯이 제작하였다. 드 메로드를 출연시켜 의상과 신체의 노출등에서 선정적인 연출을 시도하였다. 나체처럼 보이는 복장으로 등장해서 관객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사실은 엷은 핑크색 옷이었다. <로렌차>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각 벤베누토 첼리니를 모델로 한 발레로 마지막 장면에서 드 메로드는 아름다운 몸을 드러냈다. 이는 그녀가 이미 조각의 누드모델로 출연한 적이 있어서 이를 모방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1890-1900년대의 파리 역시 여체의 노출과 선정적인 연기로 관객을 유인하는 마케팅을 전개하였다 . 런던의 <외설의 90년대>와 흡사하였지만 런던보다 훨씬 외설적이었다.

- 새로운 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무용이 외설적이거나 저속한 건 아니었다. 폴리 베르제르는 사실 프랑스 대중춤의 본거지였다. 많은 유능한 댄서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새로운 형식의 춤들을 선보였다. 마치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새로운 대중가수와 연예인이 등장하여 새로운 노래와 예술을 소개하는 것과 같았다. 이 중에서도 로이 풀러는 매우 재능있는 무용인이었고, 그로 인해 폴리 베르제르는 더욱 확고한 대중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관객층이 중류층이었지만 , 귀족, 왕족, 예술가, 지식인도 많았다. 그 원인은 춤이었다. 대중춤이라 해도 새로운 춤, 특이한 춤, 새로운 스타가 발굴되면 관객층이 달라졌다. 로이 풀러(Loie Fuller, 1862-1928)는 그런 춤꾼이었다. ‘모던 댄스의 개척자’, ‘ 하늘의 수많은 별들속에서 빛나는 태양’ 이라고 불린 스타였다. 풀러는 미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보드빌, 벌레스크, 서커스 등에 출연하여 춤을 추었는데, 자신만의 자연스런 춤과 즉흥춤을 개척했다. 특히 긴 치마를 입고 추는 서펀타인 댄스에 능했는데, 이 춤이 유명해진 건 단순한 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단 스커트에 형형색색의 조명을 입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댄서이자 조명디자이너였다. 그녀는 자신의 춤과 조명기술을 인정받기 위해 1892년에 파리로 떠난다. 곧 폴리 베르제르에서 데뷔하는데, 여기서는 불춤(fire dance)을 춘다. 그녀는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춤을 창안하여 아르 누보 댄서로 인정을 받는다. 파리에서도 조명과 춤을 결합한 환상적 댄스는 계속된다. 그녀가 즐겨 사용한 칼라 조명은 뮤직 홀 조명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플러는 나중에는 ‘ 조명의 여신’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로이 풀러, 서펀타인 댄스 (출처 : publicdomainreview.com)

미디어로서의 뮤직 홀

텔레비전과 영화가 탄생하기 전, 동서양의 모든 극장들은 오늘날의 텔레비전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극장에는 사람이 모이고, 출연자와 관객 사이에 언어와 이미지를 통한 상호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극장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장터이자 문화의 전파자였고, 유행의 진원지였다. 마치 오늘날 연예인이 유행을 창조하는 것처럼 과거의 극장은 의상, 미용, 노래 , 정보 등을 확산하는 미디어였다. 가부키에서는 19세기 초반에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이 낭비풍조를 조장하고 잘못된 유행을 전파한다고 하여 대대적인 규제를 한 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의상이 당시 뉴욕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런던의 주류업자들은 뮤직 홀을 와인과 샴페인의 홍보에 이용하였고, 파리의 뮤직 홀은 의상과 보석 등 여성문화를 전파하는 미디어였다.

당시 파리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는 랜돌프(Landolff)부부였다. 이 부부는 3대 홀의 상당한 분량의 의상을 디자인했을 뿐만아니라 국립극장과 상업극장, 심지어는 발레리나들로부터 개별적으로도 주문을 받았다. 클레오 드 메로드는 폴리 베르제르의 <로렌차>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인센티브로 랜돌프 부부의 의상을 요구할 정도였다. 폴리 베르제르는 1896년에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뮤직 홀이 패션쇼를 보여주는 매스 미디어였던 것이다.

파리 뮤직 홀 발레의 쇠퇴

1860년대 이후의 영국과 프랑스의 뮤직 홀 발레는 매우 소홀히 다루어졌다. 대부분의 관심은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이 조직한 발레 뤼스에 집중되었다. 고전발레와는 다른 대중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가 예술발레를 독점했던 1870년대 후반부터 발레 뤼스가 샤틀레 극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1909년까지 프랑스의 발레는 공백기였다는 주장들이 강하게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국 뮤직 홀처럼 프랑스의 뮤직 홀 발레도 예술발레의 공백기를 잘 메꾸어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발레의 창작이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상업극장, 뮤직 홀 등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리 오페라만이 예술발레를 독점했다거나 상업극장이나 뮤직 홀 발레의 수준이 낮다는 주장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랜드 오페라는 1870년대에 사양길을 걷는다. 거대한 제작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관객들의 취향이 변한 것이다. 오펜바하도 그랜드 오페라 제작에 뛰어들었다가 큰 빚을 지고 말았다. 그랜드 오페라가 그랬던 것처럼 발로 그란데 역시 제작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엑셀시오르> 이후 <아모르>, <스포트> 등의 대작이 연이어 나왔지만 밀라노 이외의 다른 극장에서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엑셀시오르>는 춤의 연극적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가받았지만, 발로 그란데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뮤직 홀 발레도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이야기가 있는 판토 발레는 거대한 세트와 특수효과 등에 많은 비용이 들었고, 대중들의 기호가 레뷔로 이동하면서 1905년경부터 쇠락하기 시작한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