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거장의 유산 위에 새로운 길을 내는 법 - 보리스 샤르마츠
[칼럼] 거장의 유산 위에 새로운 길을 내는 법 - 보리스 샤르마츠
  • 더프리뷰
  • 승인 2021.11.0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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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샤르마츠 (c)Juan García (출처=wiki commons)
보리스 샤르마츠 (c)Juan García (출처=wikimedia commons)

[더프리뷰=서울] 정옥희 무용평론가 = 지난 10월 21일 독일 부퍼탈 소재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바우쉬(Tanztheater Wuppertal Pina Bausch; 이하 부퍼탈 무용단)의 신임 예술감독으로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무용계에서 화제가 되었다(더 프리뷰 10월 24일자 참조). 샤르마츠는 프랑스의 혁신적인 안무가 중 하나로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와는 거리가 먼 안무 스타일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자존심 센 무용단이 왜 샤르마츠에게 러브콜을 보냈을까, 그리고 그의 영입에 기대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샤르마츠의 궤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리스 샤르마츠는 가장 보수적인 무용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파리오페라발레학교 등에서 수학했으나 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낯설고 파격적인 작품을 만들며 안무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만든 작품은 <À bras-le-Corps(두 팔로 상대의 허리를)>(1993)이다. 디미트리 샹브라(Dimitri Chambras)와의 공동작으로,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출연한 그들은 사방으로 관객에게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서 서로 얽히며 움직였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관습적인 춤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움직임을 창발하겠다는 의욕은 그의 후속작을 관통한다.

첫 단독 안무작인 <Aatt enen tionon(주-목)>(1996)에서는 세 명의 무용수가 3단 철탑 구조물의 각 단마다 위치하여 고통스럽고도 괴이하게 움직였다. 수직으로 늘어선 무용수들이 각기 다르게 상체나 하체를 노출시키니 관객은 누구를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여 외설의 정도를 조절하게 된다. 관객은 수동적으로 앉아있지만 시선을 올리거나 내리는 것만으로 능동적으로 작품을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샤르마츠는 전통적인 극장 공연의 관습에서 벗어나 관객이 의미를 만들어나가게끔 하는 데 몰두했고, 이는 ‘농당스(non-danse)’라 불리는 경향의 일부가 되었다.

'Aatt enen tionon' (출처=borisscharmats.org)
'Aatt enen tionon' (출처=borischarmats.org)

농당스는 소위 ‘춤’이라 인식되는 전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춤 경향을 말한다. 신체적인 테크닉을 나열하는 대신 연극, 렉처, 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되며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이 두드러지는 경향으로, 샤르마츠를 비롯하여 제롬 벨(Jérôme Bel),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 조제프 나주(Josef Nadj) 등이 농당스 안무가로 일컬어진다. (물론 이들은 이러한 명칭을 거부한다.)

자비에 르 루아, 'self unfinished' (c)
자비에 르 루아, 'self unfinished' (c)Katrin Scoof(출처=xavierleroy.com)

샤르마츠는 이들 중에서도 비일상적인 공간의 힘을 중시했다. 전통적인 극장 무대보다는 지붕, 야외, 계단 같은 공간에서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박물관에 방점을 두었다. 그에게 박물관은 춤의 공간일 뿐 아니라 예술적 아이디어를 경험하는 공간, 나아가 안무 콘셉트이기도 하다. 2009년 프랑스 렌에 있는 국립무용센터(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 de Rennes et de Bretagne)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기관의 이름을 ‘춤 박물관(Musée de la danse)’으로 바꾸었다. 작품 창작과 예술가 레지던스가 이루어지는 안무센터는 보존의 장소인 박물관과 운동성의 예술인 춤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춤 박물관’이란 건물 및 기관의 명칭을 지칭할 뿐 아니라 유목적인 아이디어로 기능한다. 과거의 것들이 고정된 채 보관된 박물관이 현재 움직이며 사라지고 마는 움직임과 교차할 때 무용수와 관객들은 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아채게 되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라는 개념을 통해 춤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새롭게 사고하고자 한 그의 야심이 드러난다.

Musée de la danse
프랑스의 무용박물관(Musée de la danse) (출처=museedeladanse.org)

샤르마츠가 기획하고 연출한 <20 Danseurs pour le XXe siècle (20세기를 위한 20명의 무용수)>(2012)은 대표적인 춤 박물관이다. 2012년 레 샹 리브르(Les Champs Libres)와 2013년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서 공연된 이후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 하노버 오페라 극장(Staatsoper Hannover) 등에서 공연되었다. 주로 미술관에서 공연되었으며, 극장에서 공연될 때에도 무대 이외의 로비나 복도 등의 공간을 활용했다. 발레, 모던댄스, 포스트모던댄스, 스트릿 댄스 등 20세기의 다양한 춤 장르를 대표하는 무용수 스무 명이 미술관 곳곳에서 개별적으로 춤을 추면 관객들은 마치 미술관의 전시를 관람하듯이 걸어 다니며 이들의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무엇을 어떻게 볼지 결정하고, 공연자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공연자가 제시하는 특정 동작을 배우기도 한다. 공연마다, 관객마다 다르게 경험하고 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수행적인 접근을 통해 관객은 공연자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며 무용수 몸에 내재된 춤의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샤르마츠의 또 다른 작품인 <Flip Book(플립북)>(2008)은 춤의 역사를 메타적으로 다루는 그의 안무적 특징이 드러난다. 학생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머스 커닝험 사진집 <Merce Cunningham: Fifty Years(머스 커닝험의 50년)>에서 영감 받은 작품으로, 이 책에 실린 사진과 글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플립 북’이란 책의 낱장을 휘리릭 넘기며 각 장에 그려진 그림들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놀이이다. 커닝험의 사진집은 플립북이 아니다. 하지만 샤르마츠는 책의 앞표지 사진부터 뒤표지 사진까지 수백 장의 사진을 순서대로 연결시킴으로써 커닝험이나 사진가 데이비드 본(David Vaughan)이 의도치 않았던 방식으로 커닝험 춤에 새로운 움직임을 부여했다. 커닝험 춤의 제스처만을 재활용하여 우연히 발견된 움직임을 끌어낸 <플립북>은 그의 말대로 ‘가짜 커닝험’이자 ‘메타-커닝험’인 이벤트인 것이다.

보리스 샤르마츠, 'Flip Book' (출처=borischarmatz.org)
보리스 샤르마츠, 'Flip Book' (출처=borischarmatz.org)

여기서 <20세기를 위한 20명의 무용수>와 <플립북>은 샤르마츠가 피나 바우쉬 센터의 수장으로 임명된 이유를 드러내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거장의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이에 짓눌리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춤을 새로운 맥락에서 바라보는 샤르마츠의 안무 특징은 부퍼탈 무용단이 간절히 원하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성문화된 움직임 어휘와 고전 레퍼토리에 기반을 둔 발레단과는 달리 현대무용단은 창립 안무가의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작품을 보존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피나 바우쉬는 2009년 암 판정을 받은 후 불과 닷새 만에 사망했다. 갑작스런 사망 탓에 무용단의 향후 방향이나 유산 보존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을 전혀 세울 수 없었다. 이후 부퍼탈 무용단에서 예술감독이 여럿 교체되며 난항을 겪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학에서 과거 유물을 원형 그대로 보존(preservation)할 것인지 아니면 현대에 맞춰 복원(restoration)할 것인지 논쟁하듯, 부퍼탈 무용단에서도 바우쉬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파와 새로운 창작을 이어가야 한다는 혁신파가 갈등해왔다. 바우쉬와 오래 활동했던 무용수들은 기존 레퍼토리를 고수하길 원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새롭게 나아가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피나 바우쉬(출처=PinaBauschFan 페이스북)

부퍼탈 무용단은 ‘대담한 미학을 지닌 국제적 예술가’인 샤르마츠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우리의 20세기 무용유산을 탐색하고 고취시켜줄 누군가”가 되어주길 희망했다. 샤르마츠 역시 보존과 창작 사이의 균형점을 탐색하지만 자신의 역할이 창작임을 인지하고 있다. “물론 피나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레퍼토리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21세기를 만들어갈 창조적 자유를 찾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에 의미 있는 행동을 취할 기회를 가지는 데에 방점이 찍힐 것이다.”

그런데 샤르마츠의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탄츠테아터나 피나 바우쉬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 그가 덜컥 독일을 대표하는 무용단을 이끌게 된 것은 여전히 파격적이다. 심지어 프랑스인 아닌가. 샤르마츠는 독일인 어머니와 독일계 유태인 아버지를 두었으며 독일 문화에도 친숙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부퍼탈 무용단에 흡수되어 봉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감독직을 ‘프랑스-독일 협력 프로젝트’로 내세운다. 자신이 주로 활동해 온 오-드-프랑스(Hauts-de-France) 지역과 부퍼탈이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NRW) 지역을 잇는 공식적인 협력을 통해 유럽의 문화교류를 강화시키려 한다. “왜 피나 바우쉬의 작품과 내가 탄츠테아터에서 착수하게 될 미래의 작품들을 일부는 프랑스의 것으로도 새롭게 상상하진 않는가?”라고 되묻기까지 한다.

샤르마츠는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한다. 프랑스 국립무용센터를 맡을 때 ‘춤 박물관’의 개념을 내세웠다면 부퍼탈 무용단에선 ‘지형(terrain)’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부퍼탈 무용단이 시급히 구체적이고도 상징적인 기반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자 “지붕이나 벽에서 벗어나 녹색의, 도시의, 안무적이고, 예술적인 지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지형은 루르(Ruhr) 강을 통해 철강과 석탄을 나르던 지리적인 공간이자 프랑스와 독일 간의 예술적 교류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잊지 않는 샤르마츠가 거장의 유산 위에 낼 새로운 길이 궁금하다.

부퍼탈의 피나 바우쉬센터인 샤우슈필하우스(c)Frank Vincentz (출처=wikimedia commons)
부퍼탈의 피나 바우쉬센터인 샤우슈필하우스(c)Frank Vincentz (출처=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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