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식 [‘내안의 물고기’ 동행기]-(5)
하영식 [‘내안의 물고기’ 동행기]-(5)
  • 더프리뷰
  • 승인 2021.11.1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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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여행 – 폴란드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내부(사진제공=하영식)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내부(사진제공=하영식)

[더프리뷰=부산] 하영식 작가 = 폴란드는 헝가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날씨는 포근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는 폴란드까지 침공한 것 같았다. 겨울철 폴란드는 어디든 눈이 쌓이고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 정상이다. 특히 바르샤바는 영하 20도가 보통인데 영상의 날씨로 입고 있던 두꺼운 코트가 민망할 정도였다. 헝가리에서 이른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바르샤바에서는 향후 부산과 폴란드의 국제교류와 유통을 위해 폴란드의 축제기획팀과 무용단체 예술감독과 대표를 만나 협의를 하고 의견을 나눈 뒤 공연장과 연습실을 방문한 후 한나절 만에 곧 바로 크라쿠프(Kraków)로 향했다.

밤에 도착한 크라쿠프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23년 전 크라쿠프와 가까운 시골 마을의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1년 동안 일한 적 있어 비 내리고 어두운 크라쿠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태양을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곳이 이곳이다. 거리는 이전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았고 사람들도 많이 다니지 않았다. 방학이어서 그런지 학생도시에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크라쿠프에서는 소금광산을 방문하고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할 계획이다. 모든 일정을 하루 만에 해치워야 하기에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소금광산으로 이동했다. 인류의 기원을 파고들기 위해 한국에서도 수천 킬로미터 털어진 크라쿠프까지 올 정도의 열정을 가진 줄은 몰랐다. 바닷가가 아닌 곳에 소금이 있고 그곳에서 소금을 퍼 날랐다니! 이유는 간단하다. 몇 백만 년 전의 크라쿠프는 바닷물 밑에 있었고 폴란드 전체가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난 뒤 소금이 남았고 또 그 위에는 산으로 뒤덮였다가 누군가에 의해 소금이 발견된 것이다.

소금광산 내부의 조각상(사진제공=하영식)
소금광산 내부의 조각상(사진제공=하영식)

자유노조로 유명한 바웬사의 고향 그단스크(Gdańsk)는 해안도시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소금을 생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수확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소금을 사왔을 것이다. 어쨌든 소금광산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로마시대 때는 제국의 병사들이 월급의 한 부분을 소금으로 지급받으면서 라틴어의 소금의 어근 ‘sal’에서 월급이라는 의미의 ‘salary’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소금이 귀한 유럽에서는 소금이 금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필수품이었다. 심지어 소금이 화폐를 대신해 물물교환이 이뤄지기도 했다. 소금을 가지면 부를 독점하게 되고 권력까지 가지게 됐다. 생선과 육류의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물의 맛을 조절하는 데 필수적인 물질인 소금은 중세시대 때는 왕에 의해 직접 관리되었다. 우리가 향하는 비엘리츠카 소금광산도 왕의 보호 아래 있었고 왕에게 수입의 3분의 1을 납부했다고 전해진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 소금을 캔 광부들만 해도 수천 명이었다.

입구에는 아침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광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모여들었다. 최소한 세 시간은 걸어야 한다는 말에 신발 끈을 다시 한 번 질끈 동여매고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반드시 안내원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주의가 있었고 혼자서 낙오돼 길을 잃으면 언제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지하 400미터나 되는 곳에서 길을 잃으면 영영 지상으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지하에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색이 모두의 표정을 지배했다. 일행이 된 술에 취한 영국인들조차도 처음에는 자기네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큰 소리로 웃더니 안내원의 말을 들은 뒤부터는 웃음소리가 싹 가셨다.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제법 먼 거리를 걸었다. 그것도 몇 백 미터 지하에서 끝도 없이 계속 걸었다. 지나가는 주위에는 광부들이 자신들의 생활상을 조각한 지점이 나왔는데 마구간을 묘사한 조각이었다. 또 다른 지점에 다다르니 왕이 방문한 모습을 조각해놓은 것이 보였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지하교회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니 큰 공간이 나왔다. 지하에 만들어진 교회였다. 소금이 많이 몰렸던 곳으로 그곳을 집중적으로 파낸 뒤 교회를 만든 것 같았다. 주위는 모두 소금인데 소금바위를 깎아서 벽에는 벽화처럼 성서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조각들을 새겨놓았다.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조각상들을 새겨놓았고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제작된 것처럼 보이는 조각상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각상이었다. 역시 폴란드 사람들이 숭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임을 그곳에서도 보여주고 있었다.

광산 내부의 지하교회(사진제공=하영식)
광산 내부의 지하교회(사진제공=하영식)

지하 몇 백 미터 지점에서 소금바위에 자신들이 믿는 성인들을 조각해놓고 시시때때로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표현물이라고 어떤 사람은 비꼬겠지만 나는 나약한 본성이 아니라 풋풋하고 따뜻한 인간성을 보여준다고 변호하고 싶다. 지하 400미터, 갈 데까지 간 세상의 끝,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들의 모습인 인간의 상을 새기고 그 상에다 절하고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순적인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 때는 지금처럼 전깃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횃불이나 촛불을 사용했을 터인데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조각들을 만들어냈는지 감탄만 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조각품들은 지금까지도 원형상태로 잘 보존돼왔다는 사실이다.

소금광산 내 성모 마리아상(사진제공=하영식)
소금광산 내 성모 마리아상(사진제공=하영식)

지하 400미터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상으로 탈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혼자 나갈 수는 없었다. 일행을 따라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에는 식당도 만들어져 있었고 카페도 있었다. 그럼에도 몇 시간이 지나니 지상이 그리워졌다. 엘리베이터로 지상으로 올라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차라리 걸어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걸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하는데 과연 왔던 길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수많은 갈림길을 걸어왔는데 어느 길이 위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한 길만 잘못 들어도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서 유령이 될지도 모른다. 갱도를 옮겨 다니다 폴란드 사람들이 나를 본다면 유령이라고 기절초풍해서 쓰러질 것이다.

온갖 상상이 들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입구로 나의 발걸음은 옮겨지고 있었다. 서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겁에 질린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 번씩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는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만 탈 수 있었다. 이를 본 외국인들은 자신의 차례가 언제 올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내려온 걸 후회한다는 빛이 역력하게 서려 있었다. 행운인지 우리 일행은 빨리 올라올 수 있었다. 지상에 올라와 박물관 밖에 나오니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광산내부의 관광객들(사진제공=하영식)
광산내부의 관광객들(사진제공=하영식)

소금광산을 나와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발길을 돌렸다. 아우슈비츠는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잡아서 집단적으로 수용해놓고 거의 매일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씩 집단학살을 자행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금도 당시의 건물들을 고스란히 보존해놓고서 당시 유대인들이 남기고 간 유품이나 자료들을 정리해서 전시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해 죽어갔다. 이제는 겨울철이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내가 여기를 최초로 방문한 해는 25년 전이다. 바르샤바에서 러시아 비자와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켓을 기다리던 중 크라쿠프를 방문했다. 얼어붙은 겨울날이었는데 서너 시가 되니 벌써 해가 져버렸고 방문객은 서너 명이 전부였다. 모두 둘러보지는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서 나와 버렸다. 추운 겨울날 어두운 오후의 수용소에 덩그렇게 홀로 수용소 야드를 돌아다니는 자신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져 그만 나와 버렸다. 당시의 춥고 외로웠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는 겨울철에 많은 방문객들이 보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역시 이런 슬픈 곳에는 많은 사람들은 모여야 힘이 나는가 보다.

독일군에 의해 분류되고 있는 유태인들(출처=wiki media commons)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올 때마다 항상 인간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물고기처럼 인간들은 왜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학살을 자행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걸까. 우월감을 드러내야 행복함을 느끼나. 붓다처럼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왜 다른 사람들을 해하면서 자신이 존재를 드러내려 하나. 일본 오키나와와 대만에서 본 물고기들보다도 못한 존재가 인간들인지 모른다는 반문도 해본다. 거대한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한 인간들이 아직도 전쟁터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일을 일상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물고기보다 못한 인간들! 어쩌면 물고기들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내게 다음과 같은 항의의 서한을 보낼 것 같다. “형편없이 수준 낮은 인간들을 어떻게 감히 우리처럼 고상한 물고기들과 비교를 한단 말인가!”

수용소에 있는 죽음의 캠프(extermination camp) (출처=
수용소에 있는 죽음의 캠프(extermination camp) (출처=annefrank.org)

아우슈비츠는 몇 번인가 혼자 방문했는데 이제는 일행과 함께 방문하는 것이 달라진 나의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달라져야지. 철조망을 몇 겹으로 쌓아 담을 만들어놓고 수십만 명을 학살했던 수용소를 벗어나니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곧 이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유대인 플랫폼(Juden Rampe)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서 죽어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은주 감독이 살풀이춤을 추기를 원했다. 하지만 수용소측은 정중히 거절했다. 수용소를 항상 성스러운 곳으로 보존하기 위해 일체의 공연이나 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게 수용소 측의 입장이었다. 대신에 추천받은 곳이 바로 ‘유대인 플랫폼’이었다. 그곳에는 덩그러니 당시 유대인들을 실어 날랐던 가축용 객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이곳은 2차 대전 중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이 실려 와서 기차에서 내렸던 곳이다. 수천 명을 모아놓은 뒤 즉석에서 가족들과 분리시켰다. 물론 모두 학살당할 사람들이었다. 나치 군인들은 곧 바로 사형할 사람, 대기 시켜놓고 일을 시킨 뒤 서서히 죽일 사람 등으로 분리하고 배치했다. 물론 사형시킬 사람은 나치군인들만 알았다. 당시의 사진을 보니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본능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낀 유대인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가족들과의 강제적인 생이별, 고함치는 모습, 나치 군인들의 협박과 폭력, 욕설, 군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비는 모습... 모든 일이 그 장소에서 일어났다. 말이 통하지 않고 폭력만 난무하는 곳, 항의하면 바로 총살시키는 현장이었다.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기 전 모였던 최초의 장소에서 신은주 감독이 하얀 한복(소복)으로 갈아입고 곱게 단장한 모습으로 죽어간 수백만 유대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살풀이춤을 추기 위해 섰다. 준비해 온 음악이 흐르자 한국 여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시 유대인들을 실어 나르던 객차 옆에서 한국의 무용가 신은주가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그 장소에서 우리 한국의 무용가가 살풀이를 춘다.

살풀이를 추는 신은주 감독(사진제공=하영식)
살풀이를 추는 신은주 감독(사진제공=하영식)

아직도 떠나지 못한 원혼 있으면
부디 한국 여인의 살풀이춤 보시고 위로 받으소서.
객차 옆에서 선로 위에서 객차 밑에서 객차 뒤에서 원혼이 이끄는 대로 춘다.
흰 저고리 흰 치마 흰 버선발의 선녀가 죽어간 수백만 영혼 달래려 나래짓한다.
눈 감고서 눈 뜨고 하늘로 손 휘젓고 땅 아래로 손 뻗치며 나래짓한다.
흰 버선발로 피 흘렸던 땅 짓이겨 그날의 짙은 피 향기 조금씩 지워 보낸다.
천천히 숨 고르며 뛸 때마다 죽어간 영혼들 덩실덩실
구천 떠돌던 영혼 모두 일어나 함께 춤춘다.
바람이 불자 흰 새들이 날아오른다.
원혼이 환생한 새들이 하늘 끝으로 사라진다.
머나먼 한국에서 온 아리따운 선녀가 하얀 춤추니 하늘이 울고 땅이 운다.

곱디고운 우리 춤 보시고 부디 위로받고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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