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4 뮤직홀(10)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54 뮤직홀(10)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1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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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런던거리(출처=npr.org)

매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매춘은 ‘거대한 사회악 great social evil' 이었다. 글래드스톤 수상은 매춘을 ‘내 영혼의 가장 무거운 짐, the chief burden of my soul’ 이라고 하였는데, 매춘은 영국사회가 안고 있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된 문제였다.

산업혁명후의 영국은 과학기술의 발전, 해외식민지 개척과 국제무역 등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19세기 런던은 영연방의 수도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국제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철도의 발달, 박물관과 도서관의 건립 등 문화발전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런던에는 엄청난 인구이동과 이민의 유입으로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다. 농촌의 빈곤층은 물론이고 유럽의 빈국과 인도와 같은 식민지 이민자, 특히 대기근을 겪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폭발적 증가로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19세기 초반에 백만 정도였던 인구는 19세기 중반에 두 배로, 말엽에는 600만 명 정도로 늘어났고, 이는 삶의 모든 방면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거리는 사람과 동물이 쏟아내는 온갖 오물로 가득했고, 심지어는 부자들조차도 쓰레기처리에 쩔쩔맸다. 사람들의 인분과 도살장에서 나오는 쓰레기, 썩은 음식 등이 거리를 뒤덮어 악취가 진동했다. 사람들은 창문밖으로 요강을 쏟아냈는데, 가끔 재수없는 사람은 이 오줌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디즈레일리는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웨스트민스터 궁을 오가야 했다. 연어가 뛰놀고 백조가 날아다니던 템즈강은 시민들이 버린 오물로 검은 강이 되었다. 찰스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에서 템즈강에서 ‘ 보트가 미끄러져 갈 때마다 강물에 거품자국을 만들고 노를 저을 때마다 악취를 뿜었다’ 고 적고 있다. 1858년 6-7월 뜨거운 한여름에 템즈강의 악취는 최악에 달했다. 이를 대악취(Great Stink)라고 하였다. 위생시설이나 하수도 시설이 미비해서 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땅과 강이 그렇게 오염되는 동안 런던의 하늘도 까만 매연과 연기로 뒤덮였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석탄사용이 급증했고, 이는 공해를 유발했던 것이다.

말로 인한 폐해는 형용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말과 양, 돼지, 개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마굿간 청소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똥의 문제는 당시 런던은 물론이고 뉴욕, 파리 등 대도시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던 문제였다. 특히 마차가 대중교통수단이 되면서 19세기 말경에 말똥은 시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의 큰 사회문제였다. 이를 대말똥 위기(Great Horse Manure Crisis )라고 부른다. 1900년에 런던의 마차는 11,000대 정도였고, 말이 끄는 마차는 한 대에 12마리의 말이 필요했고, 매일 5만 마리의 말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거기다 물건을 운반하는 말도 가세하였다 . 말 한 마리가 하루에 평균 22파운드의 똥을 배설하였고, 거리에는 매달 2만 kg 이상의 말똥이 쌓였다. 오줌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말의 수명은 3년 정도였는데, 이들 시체가 거리에 쌓여 악취를 더했다. 뉴욕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오죽하면 1898년에 뉴욕 국제도시계획회의에서 말똥 문제가 중요한 국제적인 의제가 되었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이를 해결한 건 자동차였다.

인구증가는 일자리의 부족과 실업, 극심한 빈곤을 낳았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1820년 노숙자들을 위한 야간구호협회(Society for Affording Nightly Shelter)가 개설되었다. 성인남녀와 어린이 노숙자 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마룻바닥에 건초더미로 덮은 침대를 만들었다. 런던사람은 3박을, 외지 사람은 1주일을 묵을 수 있었는데, 외국인 노숙자도 많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문앞에 노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신발이 없어 맨발이었고 심한 동상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심한 환자는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구빈원안은 굶주린 어린이들의 비명소리, 배고픔에 지친 남성들의 신음소리, 침대를 차지하려는 고함소리가 뒤섞인 아비규환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구빈원마저 가득차면 못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구걸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아무 데서나 노숙을 해야 했다. 공원노숙은 불법이었지만 많은 노숙자들은 공원에서 지샜고, 경찰에 잡히면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다.

20세기 초 수상을 지낸 헨리 캠벨 배너만 수상은 당시 영국에 1천3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에만 10만여 명의 거지가 있었다. 가난은 어린이에게 큰 재앙이었다. 1849년 런던시 보건통계에 의하면 5살 이전의 영아사망률이 33%였는데, 5명중 한 명의 영아가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전염병과 가난 등으로 죽어갔다. 노숙자와 거지도 엄청나게 많았다. 빈민과 이민자들이 모여살던 이스트엔드의 어린이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옷이 없어서 애들을 밖에 내보내질 못했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여러 어린이들을 마대천같은 걸로 둘둘 감아서 내보내기도 했다. 부모가 감옥이나 구빈원에 있거나 죽은 사람도 있었다. 부모가 일하는 동안에 어린이 돌보미 여성을 쓰기도 했지만 수입의 대부분을 그 여성에게 주고나면 남는 게 없었다. 때로는 돌보미 여성이 술에 취해 애들을 돌보지 않아서 동사하는 애들도 있었다. 폴란드, 프랑스,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까지 거지들이 몰려와 상황을 악화시켰다. (『Victorian London』).

굴뚝청소부 (출처=etinkerbell.wordpress.com)<br>
굴뚝청소부 (출처=etinkerbell.wordpress.com)

빈곤은 기상천외한 직업들을 만들어냈다. 샌드위치맨이라는 말은 찰스 디킨스가 만든 용어다. 가슴과 등에 홍보보드를 붙이고 거리를 걷던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에 공연 홍보용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보드맨이라고도 불리던 이들은 극히 적은 일당을 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고, 거리의 놀림감이었다. 애들은 이들에게 진흙을 던졌고, 마차운전수는 발로 걷어찼고, 경찰은 이들을 시궁창으로 밀어내기 일쑤였다. 좁은 비포장도로에서 마차의 흙탕물의 세례를 받는 일도 많았는데, 그 때마다 그들을 보호해주는 건 보드뿐이었다. 이런 황당한(현대인들의 시각에서) 직업들이 있었다. 치료용으로 거머리 잡기, 가죽공장에 팔기 위해 개똥줍기(pure finder- 개똥은 가죽을 깨끗하게 하기 때문에 퓨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됨), 하수구 뒤지기(tosher), 템즈 강변의 진흙탕 뒤지기(mudlark), 주로 몸집이 작은 4-5살 정도의 어린이가 하던 굴뚝청소(넓지 않은 굴뚝에 들어가기 때문에 굴뚝속에 갇히거나 질식사고가 발생하였고, 가끔 사망자도 발생했다. 주로 고아나 구빈원 출신의 어린이들을 시켰다), 마차나 사람이 지나기기 편하게 말똥이나 진흙을 청소하고 팁을 노리던 거리 청소부(crossing sweeper), 의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하기 위해 갓 매장한 시체를 몰래 파내기(resurrectionist) 등이 있었다.

봉제공은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고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주거환경은 열악해서 창문도 없는 한 방에서 온 가족이 기거했다. 런던 시민 3분의 1은 빈곤의 문턱에 있었다.

하수구 뒤지는 사람 (출처=smithsonianmag.com)<br>
하수구 뒤지는 사람 (출처=smithsonianmag.com)

그런 가운데 술집만이 홀로 번창했다. 술은 이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낙이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유럽의 두 가지 마약을 그리스도교와 알콜이라고 하였는데, 영국의 폭음은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술집이다..... 거리는 비좁은데다 바닥에는 흙탕물이 질척대고 공중에는 악취만 가득했다. 조그만 상점이 많지만 취급하는 상품이라곤 잔뜩 쌓아놓은 어린애밖에 없는 듯, 늦은 밤인데도 문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아이가 득시글거리고 안에서는 비명만 가득했다. 지역이 전체적으로 황량한 가운데 번창하는 곳은 술집밖에 없는 듯, 술집마다 아일랜드 출신 하층민만이 온 힘을 다해서 떠들어댔다. 큰 길에서 이리저리 갈라지는 골목과 마당에는 조그만 집이 다닥다닥 달라붙으며 늘어섰는데 , 어떤 집이든 술에 취한 남자와 여자가 불결한 구덩이에서 뒹굴고 몇몇 집은 흉악하게 보이는 사람이 현관문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떠나는 자세가 어딜 보나 좋은 의도로 건전한 일을 하러 가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플로라 트리스탕의 런던여행기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 1803-1844)은 <메피스>라는 소설을 쓴 소설가이자 여행작가 등 다채로운 경력의 페미니스트였고,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에 관심이 많은 사회주의자로, 생시몽의 사상을 공부했고 푸리에 등과 교유프랑스의 여성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권익향상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집단적 힘을 키워야 한다고 하였다. 분열되면 약하고 합치면 강하다, 힘은 숫자에서 나온다, 25년여 동안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단결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하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로 유명한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트리스탕이 먼저 주장한 말이었다.

트리스탕은 네 번에 걸쳐 영국을 방문했고, 1839년 네 번째 방문경험을 『런던 여행기』라는 책으로 발간한다. 그녀는 의회, 감옥, 빈민촌, 정신병원, 펍 등을 방문하면서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대해 조사하였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활동에 많은 장애가 있었고, 그래서 때로는 터키 남자로 변장하고 잠입하기도 했다. 그 여행기에는 영국사회의 처참한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에게 런던은 괴물도시였다. 영국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이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반면 자신의 눈으로 보고 쓴 것이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당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아일랜드 거주지의 믿을 수 없는 불결함 ,오물로 가득한 거리, 코를 찌르는 악취, 말리려고 거리에 걸린 넝마, 집밖에 나와 진흙탕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 창문도 없는 오두막집. 이런 극단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녀가 본 영국의회, 입헌군주제의 모델인 영국의회는 품위가 없었다. 의원의 연설에 졸거나 웃거나 다른 의원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영국학자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영국의 사법체계를 비판한다. 여성과 어린이를 사고파는 포주나 인신매매범은 8-10일간의 구류에 처해지지만 물건을 훔친 가난한 여인들은 한 달간 유치장 신세를 지는 불합리를 고발한다.

공장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충격적이었다. 환기도 되지 않는 컴컴한 방에서 옷감과 광물의 분진 등을 마시면서 12-15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 특히 놀라운 건 웨스트민스터 가스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열기속에서 용광로에 불을 때는 20여명의 노동자들을 보고 경악했다. 마치 붙타는 석탄위에 올라앉아 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뜨거워서 트리스탕은 곧 자리를 떠 큰 돌위로 올라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런 열기속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였고, 일이 끝나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더러운 작업복을 던지고 녹초가 된 채로 널부러졌다. 그들 대부분은 몸관리를 못해 7-8년이 지나면 죽는다고 하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노예무역보다 더 지독한 노동착취에 시달렸다. 식인풍습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가공할 장면이었다. 반면 경주에서 돌아온 말들은 곧바로 깨끗이 씻겨져 깨끗한 마굿간으로 간다. 왜 사람들도 따뜻한 물로 씻고 따뜻한 방에서 편안한 침대에 누워 살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공장노동자를 노예에 비유하였다. 과거의 노예는 인격을 인정받지는 못했어도 주인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어서 적어도 죽지는 않을 정도의 보장을 받았지만, 영국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트리스탕은 노동자들을 동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표현하였다. 동물은 주인이 내일 먹을 사료와 건초를 준비해 놓지만 노동자들은 이마저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플로라 트리스탕(출처=위키피디아)

- 술과 매춘

그녀가 더욱 분노한 건 매춘여성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여성은 남성들의 오락의 대상이었다. 트리스탕은 안전을 위해 남성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펍에 들어갔다. 많은 남성들이 와서 술을 마시고 파트너를 만난다. 트리스탕은 남성들이 고안한 ‘오락’에 분노한다. 펍에서 야하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화려한 옷차림의 남성들이 프랑스 산 와인, 하바나산 시가를 피우면서 어울리고 있었다 . 자정이 되자 단골손님들이 입장한다. 상류층 귀족들이다. 진 팰리스의 열기는 뜨거워지고 4시가 지나자 그 열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돈많은 귀족들은 음란한 쇼를 보여주는 여성들에게 50-100기니의 어마어마한 팁을 뿌린다.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천만원 내외의 거액이다. 그 중에서도 남성들이 가장 좋아했던 ‘오락’은 매춘여성들에게 술을 먹이는 ‘스포츠’였다. 여성들에게 식초와 후추, 겨자를 섞은 술을 먹인다. 그러면 여성들은 경련을 일으키면서 쓰러지고 손님들은 재미있다고 낄낄대고 웃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쓰러진 여성에게 술잔을 던진다. 트리스탕은 한 아름다운 아일랜드 여성을 보고 가슴아파한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서 매춘부가 아니었다면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자태를 지니고 있는 기품있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두 시경에 들어왔는데, 세 시간후에 만취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손님들은 그녀의 어깨와 아름다운 가슴에 술잔을 던졌다. 펍의 종업원은 그녀가 마치 쓰레기 같다고 욕을 해댔다. 트리스탕은 인간이 이보다 더 타락할 수 있을지 탄식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온갖 수모를 다 겪는 이들 여성들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고 쓰고 있다. 영국인들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결여되어 있었고, 마치 로마시대에 검투사들의 싸움 때 시민들이 아무런 동정을 하지 않은 것처럼 런던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여성을 콜리세움에 등장한 동물처럼 여겼다고 썼다.

이런 사건도 쓰고 있다. ‘ 어떤 장사꾼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이게 그가 관계한 매춘부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스커트를 머리위까지 올린 다음 묶고 회초리로 때린 다음,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를 거리에 던진다. 숨을 쉴 수도 없고 고통으로 기진맥진한 여성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영국인들은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연루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Flora Tristan, Utopian Feminist』).

런던의 매춘

19세기 런던의 매춘여성의 숫자에 대해 경찰은 25,0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실제로는 80,000명 정도였다. 매춘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봉제나 모자제조 등의 일을 하면서 밤에만 부업처럼 매춘을 하는 여성들, 주부매춘, 밤에는 '보통의 매춘부(common prostitute)'로 일하다가 낮에는 세탁이나 재봉일을 하는 여성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매춘은 여성직업중 가장 수입이 많았고, 또한 네 번째로 많은 직업이었다. 그 중 4분의 1이 18세 미만의 청소년이었다. 도스토예스키는 1862년에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거리를 지나다가 엄마들이 12살 가량의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 남성들의 손을 잡아끄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매춘부가 되는 원인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여성의 직업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직업이 있다고 해도 저임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단기고용이거나 계절적 고용이 많았다. 공장노동자, 봉제공, 하인, 청소부, 노점상 출신등 모두 특별한 기술이 없고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여성들, 심각한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던 계층과 고아나 고아에 가까운 여성, 결손가정출신,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온 여성들이었다. 두 번째로는 환경적 요인 때문이었다. 남성들과 같이 일하는 작업환경속에서 강간 등의 범죄가 많았다. 봉제공이나 공장노동자 같은 경우는 남성들과 같이 늦게까지 일하면서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컸고, 하인들도 신분상의 차이와 계급적 불평등으로 인해 성폭행을 자주 당했다. 이들은 쉽게 남성들의 폭력을 거절하지 못했고 성폭력을 당한 뒤에는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편 일은 적게 하면서 수입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발적 매춘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원인은 일자리 부족과 경제적 곤경 때문이었다. 매춘은 여성들이 기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모가 어린이를 사창가에 팔아넘기거나, 남편이 아내에게 매춘을 권유하는 사례도 있었다.

매춘여성들의 삶은 가혹했다. 매년 만5천 명에서 2만 명 가량이 질병과 신체적 혹사로 사망했다. 가난과 질병은 그들의 운명이었다. 매춘을 시작하면 대부분 3-4년 후에 죽었고 7-8년을 견디는 여성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많은 여성들이 병에 걸려 병원에서 죽어갔다. 입원이 안 될 경우에는 짐승 우리와도 같은 곳에서 약, 음식, 치료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죽어갔다. 개가 죽으면 주인이 보살펴주지만 매춘부들은 누구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도 쓸쓸히 죽어갔다. 매독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건 행운이었다. 병원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는 매춘부가 훨씬 많았다. 치료약은 수은이었다. 그러나 수은은 치아를 녹이고 탈모를 유발하는 독성이 강한 약이었다. 1910년대에 살바르산(Salvarsan)이 발명되기 전까지 매독은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구빈원 (출처=history.extra)

치료를 끝내고 퇴원해도 딱히 돌아갈 곳이 없는 여성들은 다시 매춘의 길로 돌아가야 했다. 매독은 매춘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 일반인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는데, 약 20%의 성인이 걸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슈만, 슈베르트, 폴 고갱 , 보들레르 등이 매독으로 죽었고 모차르트, 베토벤, 니체, 톨스토이도 전염된 적이 있었다.

매춘은 매독만이 아니라 임질 등 다른 성병확산의 큰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의학은 아직 이들을 적절히 치료할만큼 발달하지 못했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 치료에까지 작용했다. 매독의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학적 견해가 있었지만, 임질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임질에 걸린 남성에게 부인과의 잠자리가 괜찮다고 말하는 의사도 있었다. 런던에는 성병치료를 위한 격리병원(lock hospital)이 있었는데, 이를 의대생 교육용으로 사용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고, 특히 여성환자들의 인권침해와 차별, 매춘여성들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빈발했다. 성병은 하느님이 내린 형벌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병원에서는 매춘여성들에 대한 윤리교육도 이루어졌다.

매춘부가 된다고 모든 경제적 곤경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매춘으로 버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매춘은 남성들의 여가패턴하고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낮에는 바느질이나 세탁일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많은 여성들의 꿈은 매춘을 통해 돈을 벌어 커피 하우스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매춘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군인이나 선원들의 막사, 사창가, 거리 매춘이었다. 그러나 거리는 많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신체적 위험, 경찰단속, 불안한 치안, 술, 질병, 범죄 등에 노출되기 쉬웠다. 1888년 잭 더 리퍼의 살인사건은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매춘여성들이 살해된 사건이었다. 항구나 해변 등 남성들의 활동이 많은 지역에 매춘이 성행했다. 뮤직 홀, 플레저 가든, 극장, 카페, 페니 개프 등은 매춘부들의 주요한 집결지였고, 극장은 전통적으로 매춘이 많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런 오락공간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었다.

공연과 매춘

여배우들의 매춘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있었고, 극장은 손님을 찾는 데 좋은 공간이었다. 요한 하위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매춘부들은 교회를 손님찾기에 좋은 장소로 여겼다고 하였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시당국이나 왕실에서 매춘을 제도적으로 관리했고, 교회나 부자들이 건물을 관계당국에 임차했고, 여기에는 건물에 붉은 등을 달아 공창임을 표시하였다(위키피디아). 신성한 하느님의 전당인 교회에서 매춘이 있었다니, 의아하게 들리지만 아마도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거리처럼 위험하지 않고, 부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교회는 이를 은밀히 용인하면서 한계상황에 처한 여성들에 대한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었을까?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가 매춘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었다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뮤직 홀은 프롬나드를 설치하여 노골적으로 매춘부 출입을 장려했다. 극장관객을 유인하고 술과 음식을 팔기 위한 수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극장에서의 매춘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가부키에서 남자배우만 출연하게 된 이유는 미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여성들의 매춘과 이어진 남성 동성애 등의 문제 때문이었다. 나중에 에도막부는 가부키 극장을 전부 유곽이 밀집해 있던 요시와라(오늘날의 아사쿠사)로 강제이전함으로써 연극과 매춘은 더욱 가까워지고 이들은 에도의 이대 악소로 불리게 된다.

19세기 초반 뉴욕에서는 아예 극장에 매춘부들의 전용출입구를 설치하였다. 파크 극장은 1798년에 건설된 뉴욕의 첫 극장으로, 1806년에 존 제이컵 아스토르(John Jacob Astor)가 인수했다. 그는 아예 매춘부를 위해 3층 발코니에 지정출입구를 지정하고 손님과 약속할 수 있는 특별 공간을 설치했다. 그러자 바워리, 차탐 , 올림픽 극장이 이를 모방했다. 10여년 동안 이 시설은 모든 극장에 설치되어, 공연 개막 한 두시간 전에 매춘부들의 입장을 허용하고 손님과 만날 수 있도록 하였고, 바에서 술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허름한 극장에서 매춘여성들은 더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복도나 바에서 손님을 물색하였다. 이들은 관객의 4분의 1정도를 차지했다. 극장근처에는 집창촌이 있어서 남성들이 편리하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런 비도덕적 행위들이 증가하자 엘리트 지식인층 관객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시의 외곽으로 극장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No Applause』, 39)

드가, '발레 댄서' (출처=artsy.net)

- 발레와 매춘

영국에서 여배우가 탄생한 건 1660년 찰스 2세의 지시에 의해서였는데, 이 때부터 여배우는 매춘부와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져 왔다. 19세기 파리에서는 귀족들이 발레리나를 정부로 두는 것이 유행하였고, 그래서 그 시절 발레리나는 매춘여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발레극장의 뒷무대에서는 돈과 권력과 매춘이 뒤섞였고 귀족, 부유한 사업가, 예술가, 고위관리 등이 서로 무용수들을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17세기에 창단된 파리 오페라 발레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창단된 전문발레단으로 지금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공연기획자들은 여성을 장사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19세기 중반에 파리 오페라 극장의 극장장 루이 베롱은 발레를 여성들의 쇼로 만들었고, 수준이 낮은 발레리나들은 매춘부로 만들었다. 풍만한 가슴과 섹시한 다리를 가진 발레리나들이 남성 주인공을 담당하고 스타가 되는 것은 당시의 유행이었다. 19세기에 이 발레단의 춤무대는 젊은 여성들의 성적 착취의 공간이었다.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릴 적에 발레단에 입단하여 고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견습생으로 출발하여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뒤에야 장기계약이 가능했다. 그러는 동안 단역에 출연하였고, ‘작은 쥐 petits rats’로 불린 초라한 행색의 어린 발레리나들은 사회적.성적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아보네(abonnés)라고 불린 부자후원자들은 공연 때문이 아니라 발레리나 때문에 정기회원이 되었다. 그들은 매우 힘이 있어서 발레리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어떤 배역에 출연시킬 수도 있었고 해고할 수도 있었다. 발레리나의 어머니들은 이들이 후원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었고 매니저처럼 행동하면서 딸들을 관리했다. 가난했던 발레리나들에게 후원자들은 소녀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구원자였다. 파리 오페라 극장(샤를르 가르니에 극장)에서는 이들 후원자들을 위해 별도의 출입구를 설치했다. 극장이 적극적으로 매춘을 중개했던 것이다. 발레리나는 미와 우아함, 그리고 청순미의 상징이다. 그러나 19세기 파리 오페라 발레의 댄서들은 매춘이 또 다른 직업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발레리나라도 매춘의 의혹을 지울 수는 없었다.

발레리나들은 한 사람의 후원자와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남자와 동시에 관계를 맺었다. 자존심이 강한 발레리나는 권력, 돈 그리고 사랑을 위해 남자들을 만났다. 무용의 방(foyer de la danse)이라는 별도의 공간도 만들어서 후원자들을 머물게 했다. 이 방은 무대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발레리나들이 몸을 풀고 연습하는 장소였지만 이들 후원자들이 출입하면서 브로커를 만나고 인사하고 사업을 논의하는 , 매우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었다. 제2 제정시대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무대뒤로 자주 방문을 하였고, 그곳에 그의 전용룸이 있었다.

영국의 뮤직 홀에도 매춘부들이 출입할 수 있었고, 이들을 위한 프롬나드가 설치되었다. 여기서는 술을 팔았고, 매춘여성과 이들을 찾는 남자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프롬나드는 영국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이는 남자 지식인들과 ‘ 뮤직 홀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발레도 개입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남녀의 신체적 접촉이 발생하는 춤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었고, 발레 역시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뮤직 홀 전쟁의 배경에는 술과 매춘, 남성과 여성 지식인 사이의 페미니즘 논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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