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3) - 예술에 부여되는 상이란?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3) - 예술에 부여되는 상이란?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11.29 1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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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결국 누군가 보아 주는 시선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에는 관객이 찾아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제 삼의 어떤 시선으로부터 인정받는 ‘상’이라는 것은 의미 있고 기쁜 맘으로 축하해 주고 축하 받을 일이다. 그런데 그 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스포츠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결과로 상이 주어지지만 예술 분야라는 것은 그렇게 명확한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주관적인 의견들이 모아져서 객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수상을 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부조리함을 안고 간다. 그래서인지 노벨상조차도 뒷말들이 나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상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수상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관심을 가져준다.  

상에 대한 단상들

나에게 최초의 상은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로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 집 분위기는 공부를 잘해서 타던 언니의 우등상은 중요한 상이었고 내가 받은 상은 별로 가족 사이에서 회자되지 않았고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프로젝트로 지원금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하던 시절 독어로 무슨 편지들이 왔는데 뒤늦게 열어보니 내가 주정부에서 주는 푀르더룽 프라이스(Förderung Preis) 무용부문에 노미네이트가 되었으니 관련 자료들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아이를 키우며 내 현실이 너무도 나의 용량 초과로 달리던 시절이었고 독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쩌다 그 시기도 놓치고, 결국 그 상은 그냥 나와는 인연이 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닻을 내리다>라는 작품으로 받은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6)은 내가 작품을 하면서 온전하게 나에게 상금이 나오는 최초의 상이어서 영광스럽기보다는 그 상금이란 것에 솔직히 의미를 느낄 만큼 진심으로 기뻤다. 늘 공연을 하거나 또 학교 강의를 나가거나, 뉴욕 연수를 가는 동안 말도 안 통하는 나라 독일까지 오셔서 아들을 키워주신 엄마를  내가 받은 상금으로 여행시켜 드릴 수 있었기에, 고백하건대 그때는 그야말로 참 일차원적인 이유로 기쁨이 컸던 것 같다. 평생 내가 가는 길을 지원해 주신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일로 받은 상금으로 여행을 시켜 드릴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술의전당이 지원 제작하는 무용 <베케트의 방>으로 <몸>지에서 주는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받았는데(2007년) 그것은 정말 내가 기나긴 시간 올인하며 연구하고 미친 듯 집중했던 작품이었기에 진심으로 기쁜 상이었다. 상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당당하게 받을 수 있지, 하고 아주 잠깐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인터뷰>로 2018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춤비평가상 작품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 나는 지원금에서 계속 떨어졌고 누군가는 그럴 나이가 됐다고도 했다. 물론 나는 내가 받지 못했을 때 왜 내가 아니고 그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 내가 받았을 때 누군가는 열심히 준비했지만 내가 받은 만큼 배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떨어지고 받아야 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싶었다. 

2018년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가상 시상식 (사진제공=김윤정)

아무튼 그렇게 지원금은 다 떨어지고 하지 말라는 싸인들이 나를 푸시하던 현실에서 나는 그야말로 아무 지원 없이 한 시간짜리 솔로를 했고 그 과정은 만만치 안았었다. 지원금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때는 운명적으로 내가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나의 솔로는 꼭 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으로 묵묵하게 공연을 했다. 정말 고독하게 작업을 했고 나 자신과의 싸움과 타협을 오가면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전혀 예상치도, 기대도 못하던 그 상은 나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상은 어누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또 다른 차원의 내가 내 자신에게 부여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름 모든 상은 나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주었다.

최근에 나는 모 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작품 대상이라는 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뮤지컬, 연극, 콘서트, 무용, 국악)에서 각각 추천을 받아 후보작을 선정하고 그중에 각 분야별로 최우수상을 주고 시상식 날 대상을 주는 상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다른 분야는 내가 자세히 알 수가 없기에 무용부문을 보면서 든 의문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선의로 나를 추천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무용부문의 후보들은 정말 이상한 조합이었다. 예술가의 이름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무가의 작품 제목이 같이 거론되었는데 네 편의 후보작 중 나를 포함한 두 개인 무용단의 올해 초연된 작품들과 그리고 여러 해 전에 만들어진 작품과 안무가, 그리고 매년 열리는 경연 형식의 페스티벌 자체가 후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최우수상은 지난해에 했던 그 페스티벌에게 주어졌다.(올해는 그 페스티벌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결코 내가 받지 못한 상에 대해 왜 내가 아니냐고 묻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예술에서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의견들이 모여서 적절하게 타협을 보고 합의된 작품 또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란 걸 알지만 후보작들의 조합 자체가 불합리하다 보니 이게 공정한 경쟁이 되는 것인가 부터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누군가 상을 받으면 그게 자격이 되는가? 하고 작품적으로 개인적인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불합리적인 것은 작품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신력 있는 언론사에서 주는 문화대상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것이라면 누가 봐도 적당하게(?)라도 상식적인 어떤 체계는 있어야 한다. 세상은 절대 공정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조리함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적어도 상은 주최측에도 수여자에게도 영광스럽고 행복한 축제가 아닌가!

2021을 빛낸 안무가상 시상식(사진제공=김윤정)
2021을 빛낸 안무가상 시상식(사진제공=김윤정)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전문무용수지원센터에서 주는 ‘2021년을 빛낸 안무가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물론 나를 아끼는 분들의 추천과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작품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 무대라는 세상에 계속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상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한다. 그리고 끝까지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함께 한 마음으로 함께 해준 무용수들과 모든 스태프들, 지속적인 관심을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한다. 한병철의 최근 신간 <리추얼의 종말>에서 보면 타인의 시선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이라는 시선에 감사한다.

 
지원금이란 또다른(?) 상을 생각하며

나는 독일에서 몇 년 동안 지속적인 지원금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때마다 주변의 예술가들로 부터 부러운 소리를 들었지만 그다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작업에 몰두했었다. 그런데 나를 부러워하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 나에게 어떤 깨달음의 여지를 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중심은 무겁게 땅을 향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그의 춤 속에 담긴 미학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의 예술적 재능은 그야말로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난 듯 느껴질 정도로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가 내가 다니던 EDDC(European Dance Development Center)에 강사로 왔고 학교의 지원을 받아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오디션을 보고 뽑혀서 드디어 그의 작업에 무용수로 함께하게 되었다. 베를린으로 가서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충격과 슬픔을 준 동생의 교통사고와 죽음으로 급하게 나는 한국으로 가야 했고 그 시간만큼은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블랙아웃의 시간이었다. 어찌어찌 그와 함께하기로 했던 프로젝트를  취소했다. 사실, 당시 그리고 그 다음은 내 기억에 남아있지를 않다. 

그 후로 꽤나 시간이 지났고 어느 날 내가 세 번째 지원금을 받아서 공연을 올리느라 한창 바쁘던 중 그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자기는 뒤셀도르프에서 지원금 신청에 매번 떨어졌고 그래서 베를린으로 갔는데 쉽지 않다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지원을 받느냐, 축하한다며...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이 얼버무리며 한국에서 하는 국제공연축제에 그를 연결해 주었고 그는 그 축제에서 공연을 했었다. 지금은 다행히도 그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다방면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내가 지원을 받는 동안 내가 보기엔 너무 재능 있는 어떤 사람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때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그 예술가의 능력 외에도 다른 많은 변수들이 작용한다는 부조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어딘가 내가 조금 이익을 보는 듯하면 정당한 사회 같고 내가 손해를 보면 온갖 이유로 부당한 사회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받으면 정당하고 내가 못 받으면 뭔가 비리가 있는 것 같은 게 인간의 심리인 것 같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것조차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를 중심으로 판단되는 주관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럴 때 나는 옛 기억을 되살리며 나 자신을 반추한다.

노벨상을 거절한 역대 작가들

(여행중에 찍은 사진)2016년 스웨덴 스톡홀룸 노벨상 수상자들이 묵은 그랜드 호텔 의 노벨상 데스크(사진제공=김윤정)
노벨상 수상자들이 묵은 스톡홀름 그랜드 호텔의 노벨상 데스크. 2016년 여행중에 찍은 사진이다.(제공=김윤정)

노벨상을 다양한 이유로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거부한 이들로는 러시아의 시인이며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와 프랑스의 작가/사상가인 장-폴 사르트르(1905-1980)가 있고, 노벨평화상을 거절한 레둑토(베트남 정치가, 1911-1990)가 있다. 그 외 1938-1939년에는 독일 과학자 3명이 히틀러의 지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활동했던 시기는 제정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급박하게 변화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가운데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을 작품에 조금씩 반영하면서 소련작가동맹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스탈린이 죽고, 그는 창작 의욕을 되살려 유일한 장편소설인 <닥터 지바고>를 썼고 소련작가동맹으로부터 정부를 비방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는 엄한 처벌을 받을 처지였다. 1957년 그의 소설 <닥터 지바고> 원고가 해외로 몰래 반출되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이듬해인 1958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결국 소련 정부의 압력과 작가동맹의 비판에 파스테르나크는 수상을 거부하고 만다.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수상 거부 사건이었다. 이후에 그는 더 이상 장편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가 있다. 사르트르의 수상 거절은 당시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노여움을 샀다. 그 이유로 해서 이후 20년 동안 프랑스 작가에게는 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1964년 <말 Les Mots>을 출판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이유는 노벨위원회의 평가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도 잘못이며, 그러한 방식은 부르주아 사회의 습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간은 하나의 실존적 존재로, 모든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실존은 바로 주체성이라는 주장을 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후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집필 활동을 중단했다. 

사르트르는 그전에도 이미 194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바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길거리에서 전해 듣고는 즉석에서 인터뷰를 했고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수상 거부 이유를 설명했고, 이는 곧바로 전 세계에 톱 뉴스로 전파되었다. 당시 빗속에서의 인터뷰 사진도 역사적 장면의 하나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삶의 모습과 상관없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실존주의에 있어서 사르트르의 이름은 영원히 잊히지 않았고 지금 까지도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1973년 노벨평화상을 거절한 베트남의 정치가 레둑토가 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공동 수상자로 노벨평화상이 결정되자 수상을 거절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파리에서 미국 측 헨리 키신저를 상대로 여러 해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그는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다. 동시에 서방 세계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이유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도록 제 삼자에게 권력을 주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런 부조리한 시스템에 항복하는 것”이라던 나의 파트너 베안트의 냉소 섞인 말도 떠오른다. 

가끔은 너무나 명확해야 하고 결과가 명확해지는 것들이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생이, 그리고 삶이 명확해지는 것인가? 확신, 신념, 그리고 결과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위험한 결말인가.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무겁게 만드는 형식인가? 

나는 단지 예술가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좋은 취지의 상을 받으면서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이런저런 상에 관한 상념들을 맥락 없이 떠들어 봤다. 

서울 체류를 마치고 돌와온 뒤셀도르프에서 (사진제공=김윤정)
2개월간의 서울 체류를 마치고 돌와온 뒤, 뒤셀도르프 우리 집 마당. 2021년 11월.(사진제공=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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