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가면을 벗으면 비극이어라
[공연리뷰] 가면을 벗으면 비극이어라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0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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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콘서트오페라 ‘가면무도회’
'가면무도회' 연주를 마치고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콘서트 오페라 '가면무도회' 커튼콜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1792년 3월 16일, 스웨덴의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국왕 구스타프 3세가 자신의 경호원이자 절친 요한 앙카스트룀 대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직전 점쟁이 안나 울리카 아르프비드슨이 국왕에게 미리 암살에 대한 경고를 했는데도 말이다.

이 엄청난 ·사건을 두고 많은 극작가들이 대본을 썼고, 그중 프랑스의 외젠 스크리브가 쓴 대본을 안토니오 솜마가 수정하고 베르디가 곡을 썼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나온 그랜드 오페라는 앞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 치하에 있던 이탈리아가 ‘왕의 시해’라는 주제의 공연을 허가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구스타프 3세>였던 제목을 <가면무도회>로 바꾸고 작품 배경을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 보스턴으로 옮기고 나서야 1859년 2월 17일 로마 아폴로 극장에 올릴 수 있었다.

지난 11월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콘서트 오페라 <가면무도회>가 공연되었다. 테너 김재형이 리카르도, 소프라노 서선영이 아멜리아, 그리고 바리톤 김기훈이 레나토를 맡았다.

무용수 성창용의 춤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베르디 작품 중 유일하게 남자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또 절대 악당이 없다. 레나토가 리카르도를 살해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리카르도는 죽어가면서도 레나토에게 사죄하고 또 자신을 죽인 레나토를 용서한다.

리카르도를 맡은 김재형의 노래를 들으면, 그가 정상급 기량과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기 흐르는 목소리, 성대의 탄성, 표현의 섬세함, 테너 주인공에게 필연적인 비장미까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다 펼쳐낸다. 사형장의 풀을 뜯으러 간 아멜리아를 따라가서 ‘나를 피하는 그대라도 영원히 사랑하리’를 부를 때나 3막에서 ‘영원히 그대를 잃어버린다 해도’를 부르며 작별인사를 고할 때, 금단의 선을 넘을 듯한 애끓는 고백에 그가 미워지기까지 한다.

리카르도 역의 테너 김재형(사진제공=예술의전당)
리카르도 역의 테너 김재형(사진제공=예술의전당)

김기훈은 타고난 레나토 같다. 그의 목소리는 충직하고 선한 느낌을 준다. 빛과 지옥을 오가는 레나토의 감정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히 드러난다. 김기훈은 리카르도와는 다른 색깔의 위엄과 낭만을 지닌 레나토를 보여주었다. ‘너구나, 내 영혼의 기쁨을 더럽힌 자’를 부를 때 오만가지 감정이 혼재된 복잡한 레나토의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분노와 배신감, 죽음보다 더한 치욕, 그러나 아내에게 남아있는 애틋함과 연민. 관객을 캐릭터의 생생한 감정으로 끌어들여 공감을 이끄는 능력이 대단했다. 23/24 시즌 미국 텍사스에서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역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빌런 김기훈도 기대된다.

바리톤 김기훈과 소프라노 서선영(사진제공=예술의전당)
바리톤 김기훈과 소프라노 신은혜(사진제공=예술의전당)

서선영 역시 최고의 아멜리아를 연기했다. 고뇌와 격정으로 무대를 흔들었다. 그녀가 죽음을 강요하는 레나토 앞에서 ‘마지막 소원’을 부를 때는 무거운 슬픔이 객석을 감돌았다.

울리카의 이아경.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무대를 장악했다. 울리카는 이아경이 국내 최고일 것이다. 아랫소리에 흉성을 많이 써서 기대했던 동굴 느낌은 나지 않았으나 또 다른 음산함을 자아냈다. 오스카 역의 신은혜는 발랄한 종달새처럼 무대를 누볐다. 톰의 이준석과 사무엘의 김철준도 제 옷을 입은 듯 어울렸다.

'가면무도회' 공연모습(사진제공=예술의전당)
울리카를 열창하는 소프라노 이아경(사진제공=예술의전당)

김광현 지휘의 강남심포니 연주도 드라마틱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현악기의 표현력이 인상적이었다. 노이 오페라 코러스 역시 수준 높은 합창을 들려주었다. 표현진의 연출도 눈여겨볼 만 했다. 리카르도의 유언을 듣고 후회하며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레나토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강남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김광현(사진제공=예술의전당)

사람들은 누구나 속내와 다른 가면을 쓰고 산다. 그들이 가면을 절대로 벗지 않고 명예와 품위를 지켰다면 이야기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로 끝났으리라. 가면이 벗겨져 민낯이 드러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피는 피를 부르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가면무도회’는 파국을 맞았으나 비극의 주인공은 용서의 메시지를 노래한다. 거장 베르디의 음악이 깊은 울림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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