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길을 잘못 든 여인에게 다른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공연리뷰] 길을 잘못 든 여인에게 다른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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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지난 12월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가 올려졌다. 지난 2014년에 이은 아르노 베르나르의 연출이다. 베르나르는 지난 10월 국립오페라단의 <삼손과 데릴라> 연출을 맡아 현대적 배경으로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세련된 감각으로 무대를 구성하는 능력, 과감히 군더더기를 빼버린 지루할 틈 없는 전개가 베르나르의 특징이다. 

La Traviata. 이탈리아어로 ‘타락한 여인’이라는 뜻이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 아가씨 La dame aux camélias>는 베르디의 음악을 입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1853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코티잔(courtesan)이 실존하던 시대, 베르디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류층의 매춘부인 코티잔이 고결한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따라서 베르디는 시대적 배경을 백 년 전으로 바꾸어야 했다. 국립오페라단의 연출을 맡은 아르노 베르나르는 동시대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 베르디의 의지를 반영해, 보다 현재와 가까운 1950년대로 배경을 설정했다.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아르노 베르나르의 연출은 흡사 영화 같았다. 장면마다 효과적인 미장센, 그리고 주인공에게 부여한 확실한 서사는 객석의 몰입도를 높였다. 파티 장면에서 사람들이 스톱 모션으로 있는 가운데 주인공 두 사람만이 움직이는 장면들이나 알프레도가 폭력적으로 비올레타에게 돈을 뿌리는 장면, 또 비올레타가 오지 않는 알프레도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엔딩에서 베르나르는 한 여인의 고독함을 일관성있게 표현했다.   

알레산드로 카메라의 무대 디자인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이미지로 시각효과를 극대화했다. 1막의 사선으로 놓은 파티 테이블, 2막의 붉은 장미가 가득히 깔린 사랑의 장소, 그리고 3막 엔딩은 과거의 전성기와 대조를 이룬 어둡고 황량한 비올레타의 집으로, 비올레타의 상황에 관객이 이입하도록 도왔다.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이 작품은 많은 베르디의 오페라처럼 여주인공이 원톱 주연이다. 소프라노 김성은은 비올레타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냈다. ‘아, 그이였던가’에서 진실한 사랑이 다가옴을 깨닫는 여인을 연기하다가 제르몽과의 만남에서는 번민 끝에 희생을 결심하는 강인한 비올레타를 보여주었다. 맑고도 화려한 음색, 적절하게 사용하는 호흡이 좋았다.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테너 김우경은 사랑에 빠진 청년 알프레도를 잘 표현해냈다. 비올레타를 사랑한 만큼 배신감으로 흑화하는 장면에서는 연출자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났다. 연출자는 “궁극적으로는 클래식한 작품이겠지만 강한 폭력성을 지닌 스토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메이킹 필름에서 밝혔다. ‘어느 행복한 날에(Un di Felice, Eterea)’를 부를 때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고백하던 알프레도는, 3막에서는 바닥에 쓰러진 비올레타의 얼굴에 돈을 뿌리며 모욕을 준다. 

양준모의 제르몽 역시 베르나르의 해석과 함께 좀더 냉철하고 잔인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만이 아닌, 돈과 연관된 현실을 생각하며 사회적 약자인 여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이기적인 제르몽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런 모습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양준모는 현실적인 중산층의 아버지로서의 당위성을 십분 보여주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이기적인 제르몽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허영과 향락을 누리던 여인이 진실한 사랑을 꿈꾸었지만, 세상은 그녀를 과거로부터 놓아주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여인에게 다른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코티잔들이 그랬던 것처럼, 짧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는 아주 뒤늦게 왔다. 연인들의 이중창 ‘사랑아, 파리를 나와 함께 떠나’는 기쁨으로 가득했으나 여인에게 시간은 남지 않았다.

창밖의 거리는 축제의 물결로 떠들썩했으나 타락한 여인(라 트라비아타)은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외로웠던 여인의 시간에 알프레도와의 진실한 사랑이 위안이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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