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4) - 팬데믹이라는 패러다임?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4) - 팬데믹이라는 패러다임?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12.22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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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뒤셀도르프] 독일은 크리스마스가 1년 중 가장 큰 명절이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화려해진다. 그리고 온갖 특산물, 장식품, 먹거리들을 파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다. 야외지만 장이 서는 쪽으로 들어서려면 백신 패스와 함께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슈퍼마켓을 제외한 모든 상가들, 백화점 그리고 레스토랑, 카페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반 교통편인 전차와 버스, 기차도 모두 백신 패스가 있거나 매번 음성 테스트가 있어야 탈 수 있게 되었다. 백신은 강제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쯤 되면 강제 아닌 강제가 된 것이다. 코로나 히스테리는 점점 집단적으로 커져가고 이러다가 전 세계가 전체주의로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코로나 팬데믹 통계에 대한 의문들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제공=김윤정)
독일 뒤셀도르프의 크리스마스 마켓. (사진제공=김윤정)

나는 처음 코로나가 창궐하고 모든 미디어들이 미친 듯이 정보를 쏟아낼 때부터 들던 의문들이 있었다. 가장 처음에 들던 의문은 세계적으로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를 쏟아낼 때 대체 몇명이 검사를 한 중에 그런 숫자가 나온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검사를 많이 하는 나라는 감염자가 많이 나오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바이러스 환자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상황도 유례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임상심리학자/통계학자인 마티아스 데스메트(Mattias Desmet, 네덜란드 헨트대학 교수) 박사는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률이 극적으로 과대평가되었고 실제로는 치사율이 상당히 낮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언론에서 발표되고 있는 수치는, 기존의 의학적 문제와 관계없이, 사망한 노인은 거의 모든 코로나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코로나로 숨진 말기 암환자 같은 사망자를 코로나 사망자에 넣으면 그 숫자와 공포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거나 증상이 너무 가벼워 집에 돌아와 회복됐다는 것이다. 매일 미디어에서 발표하는 코로나 사망자의 90%는 해마다 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노인들처럼 지병 환자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코로나가 시작된 지 2년을 넘어가고 있으니 해마다 병으로 사망하는 지구인들의 통계와 2년간 얼마나 더 총 사망자가 늘어났는지를 비교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원래부터 사망자들은 있었고 아직도 전 세계 사망자들의 원인 중에 코로나는 거의 바닥 순위에 있다).

신기하게도 세계적으로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집단적 혼란과 불안으로 인해 판단력은 흐려지고, 드러나는 모순들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독일 빈터베르크 (사진제공=김윤정)
독일 빈터베르크 겨울풍경 (사진제공=김윤정)

 

아마도 현재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만큼 빠르게 세계에 영향을 미친 현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세계 인간의 삶은 아주 짧은 시간에 완전히 재구성되어 가고 있다. 이젠 집단적 공포를 넘어 사회적 공황상태인 것 같다. 거기에 넘쳐나는 입증되지 않은 정보들 속에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평소 자유를 외치면서도 통제에 익숙하게 된 듯하다. 이러한 사회적 통제가 우리들의 기본적인 안전을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때일수록 데이터가 무엇이고 팩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백신 접종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에 직면하지만 그 책임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과소평가되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차원

 

우리 사회가 바이러스로 인해 정신적으로 더욱 병들어 간다는 것도 큰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패러다임에 갇혀서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의 차원은 과소평가되고 있는 게 아닐까? 코로나 정책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젊은이들의 절박한 외침이 미디어에 정기적으로 등장하지만 외면당하는 듯하다. 그리고 같은 셧다운, 록다운이라도 이 상황이 청소년과 성인에게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청년에게 1년이라는 기간은 성인과 달리 대화하고 대면하며 부딪히는 데서 엄청난 심리적 발달을 체험하는 기간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고립의 시기를 겪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생생한 목소리로 온가족이 생계의 위협으로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고 싶다고 절규하던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르지만 그들은 그냥 쉽게 외면된다. 생계를 위협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불안이라는 최면에 걸린 나머지 코로나 히스테리에 함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한국 뉴스를 보니 코로나 하루 사망자가 사상 최고 80명을 기록했다며 그중에는 백신 접종자가 절반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더욱 3차 백신접종이 중요하다고 엄중하게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논리를 찾기 힘든 앵커의 저녁뉴스 오프닝 멘트였다.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고 사망할 수 있는데 하루 빨리 모두 3차 백신접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독일도 다르지 않다. 나름 전문가(의사)라는 사람이 기존 백신은 오미크론에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 빨리 부스터 샷(3차 접종)을 맞아야 한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이다.

백신이 코로나 종식의 돌파구처럼 외치던 전 세계의 정책은 백신을 맞은 사람들도 코로나에 걸리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면서 어느덧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이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백신을 맞고 사망한 사람들 또는 후유증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은 큰 이슈가 되지 않으면서 범세계적으로 모두가 백신을 맞을 것을 종용한다. 더불어 백신을 만든 회사들과 나라간의 계약서에 백신으로 인한 어떤 문제도 영원히 책임질 수 없다고 명시된 부분을 언론에서 말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백신 회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차후 어떤 문제가 있어도 영원히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3차 접종을 서둘러 맞으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건강과 면역력을 믿는 개개인의 생각은 철저하게 무시되며 정책적으로 백신을 맞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이런 상황을 독일의 나치시절과 비유한 마티아스 데스메트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 본다.

“불과 몇 십 년 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문명인인 독일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미친 일(나치의 유태인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심리학자들에게 지금 까지도 연구되고 있는 중요한 테마이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일종의 최면에 의한 집단정신병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일련의 전제조건이 있는데, 집단정신병의 전조는 인구가 분리되는 상황의 발생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사회적으로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기 보다는 지금처럼 작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대인들처럼…. 센스 메이킹이 부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어떻게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이 전제되어야 한다.

처음에 바이러스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혀 세상의 모든 미디어는 갑자기 강박적으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은 최면과 유사한 것을 형성한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한 가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작은 것 하나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수술을 해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최면에 걸리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집착하지 않아도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잃는다. 이것은 글로벌 전체주의에 대한 요점에 도달하는 집단형성 정신병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일단 이런 일이 발생하면 불안이 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나서 리더가 개입하여 이 순간을 포착하고 그가 리더로 확인되면 그것은 사실일 필요가 없으며 군중은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백신으로는 현재의 난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이 위기는 건강 위기가 아니라 심오한 사회적, 문화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정부는 이미 예방접종 후에도 각종 조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근 기사에서 보면 이스라엘이나 영국과 같이 백신접종을 매우 일찍 시행한 국가들이 이상하게도 여전히 심각하게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모든 유망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백신은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조건화와 전체주의가 가져오는 맹목은 그것을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희생양으로 사용될 것이며 그들을 침묵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전체주의 과정에서 두려운 전환점이 올 것이다.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해야 하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괴물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빈터베르크 (사진제공=김윤정)
독일 빈터베르크 (사진제공=김윤정)

내가 지나치게 편집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2020년 초에 누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전체주의의 과정은 이야기의 최면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것은 다른 이야기에 의해서만 깨질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현 코로나 조치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감히 공개적으로 이야기 를 해야만 한다.

과학적 이성과 비판적 사고가 요구되는 학계에서도 공감대와 코로나 대책을 비판하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2005년에는 소위 ‘복제 위기’가 과학계에서 발생했었다. 과학적 사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여러 위원회는 과학적 연구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의학통계학 교수인 존 요안니디스(John Ioannidis)는 출판된 연구가 대부분 잘못된 이유를 발표했다. 2016년 다른 연구 그룹은 의학저널 <네이처>에 게재된 <재현성: 오류의 비극>이라는 연구를 게재한다. 나 자신도 많은 연구 결과의 불안정한 과학적 근거를 잘 알고 있다.

독일 아헨 (사진제공=김윤정)
독일 아헨의 크리스마스 마켓 (사진제공=김윤정)

 

한나 아렌트는 이 과학자들이 어떻게 의심스러운 과학적 참고자료를 선언했는지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급은 사라지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악화되었으며,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안절부절, 좌절과 허무가 뒤따랐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중은 매우 특별한 심리적 특성을 발달시킵니다. 사회를 괴롭히는 모든 두려움은 ‘대상’(가령 유대인)과 연결되어 대중이 그 대상과 일종의 정력적인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사회적 조건화 과정 위에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헌법적 조직, 즉 전체주의 국가가 배치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심리적 고통, 무감각, 감소하는 사회적 유대는 사회에서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공포의 대상인 바이러스의 출현에 따라 사람들은 공포와 불편함을 그 무서운 대상(예를 들면 비백신자)과 강하게 연관시킨다. 한편, 모든 언론에서는 함께 살인적인 적과 싸우라는 끊임없는 외침이 나온다. 이야기를 대중에게 더 가깝게 전하는 과학자들은 엄청난 사회적 힘을 받는 대가로 보상을 받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 국가는 인구의 모든 사회적 유대를 단절했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에서 종종 본의 아니게 부모를 정부에 신고한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전체주의는 총체적인 통제에 너무 집중하여 자동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서로를 염탐하고 비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다수에 대해 감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그 제한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를 잘 돌아볼 수 없다. 초기 전체주의의 많은 다른 특징들에 더하여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러한 현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날 바이러스는 전체주의의 기반이 되는 공포를 조성한다. 과연 백신의 발견과 후속 백신 접종 캠페인이 그 두려움을 완화하고 전체주의의 발아를 종식시킬 수 있을까?“

(이 칼럼의 내용은 더프리뷰의 편집방향과는 무관한 필자 개인의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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