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춤으로 생을 축약하다 - 대구시립무용단 ‘i tube’
[공연리뷰] 춤으로 생을 축약하다 - 대구시립무용단 ‘i tube’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1.12.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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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일부 (c)KUNST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장면 (c)KUNST

[더프리뷰=대구] 하영신 무용평론가 = 대구시립무용단(예술감독 김성용)의 제80회 정기공연작 <i tube>가 지난 12월 9일과 10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펼쳐졌다. 동반하는 예술들로 세계의 절단면을 만들고 생으로 환원되는 춤을 전개하는, 여느 때처럼 미감적으로도 의미론적으로도 충족적인 작품의 열연. 이번에는 춤에 관한 메타적인 물음도 첨언한다.  

사유계가 확진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욕망이 생활세계는 물론 예술계를 침식한 지도 오래다. 그 반영관계에서 무엇이 선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협업’ ‘융복합’ ‘컬래버레이션’ ‘학제간연구(學際間硏究, interdisciplinarity)’ ‘피처링’ 등등 각계가 각자의 필요와 상황에 걸맞은 단어로 혼종(混種,hybrid)의 등장을 반겨 시대적 당위로 세운다. 그런데, 출현하는 모든 혼종들은 전부 타당한가? 무엇이든, 아무것이든 작품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은가? 그럴 리가. 니체 이래 현대의 사유들이 진리의 자리에 ‘생성’을 세우지만 모든 개별자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삶은 그 유지와 작동이 불가능하다. 예술적 경험도 마찬가지. 동시대적 감수성이란 시절의 특이성으로 지목될 어떤 콘텐츠에 관한 공동의 수용능력이다. ‘동시대의 춤’으로 해석되는, 포스트모더니티를 담지하여 다분히 혼종적인 컨템퍼러리댄스는 어떤 미학적 가르마를 통해 춤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일까.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일부 (c)KUNST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장면 (c)KUNST

현대의 예술, 해체의 간극에서 실재를 출현시키기   

신을 붙들든 의식과 사회구조 심층에 천착하든 인간은 현상 너머를 추구하는 존재. 프로이트가 의식 아래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선언한 이래 구조주의자들이 언어학·인류학·정신분석학·사회학·미학 등 각 분야에서 문명을 지탱하고 있는 체계를 밝혀내었고 그 뒤를 이어 후기구조주의자들은 그 체계의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 실재(the Real)를 호출한다. 실재의 소환은 기존 시스템을 해체시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예술의 구분과 장르적 경계는 그래서 와해되고 있다.   

해체는 무작정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해체철학의 요체가 ‘다시쓰기’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해체주의의 원어 ‘déconstructivisme’의 번역어를 ‘탈구축 脫構築’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 상징계가 감춘 무의식적 전제들 혹은 상징계 사이로 누수된 실재를 재인(再認, recognition)하고 다시금 조립하여 새롭거나 진정한 해석으로 전도시키는, 해체는 의미론적 구축 작업이다. 

대다수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예술로써 그들의 사유를 증빙한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데리다 외에도 바르트 Roland Barthes가 사진, 들뢰즈 Gilles Deleuze가 문학과 그림과 영화와 현대음악 등을 통해 실재의 출현을 이야기했다) 예술은 본디가 표면 아래 깊이, 현상 아래 실재를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로고스의 체계로 정박시킬 수 없는 파토스의 펼침, ‘빨강’이라는 기표가 지시하지 못하는 무수한 실체적 빨강들을 펼쳐보이는 것, ‘사랑’이라는 기표가 함축하지 못하는 무진한 사랑의 사태들을 실연해 보이는 것. 생활세계 언어의 사슬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대상의 질적 층위들을 포착하는, 예술은 항상 일상을 초과하는 국면과 강도(剛度, intensity)에의 도전으로써 실체 혹은 실재를 펼쳐내는 일이었다. 

그 심화를 위해 예술은 그간 장르 충족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매체로써 감행할 수 있는 갖가지 실험을 수행해왔다. 그 첨점(尖點)을 말하자면, 문학은 오랫동안 서사를 지배해왔던 선형(線形, lineal)적이고 인과적인 이야기 구조를 폐기하고 동일한 주체로 그려지던 인물 캐릭터를 해체하였다. 연극은 문학의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서사를 진행하면서 그 간극에 신체성을 채웠다. 음악 역시 선율과 화성이라는 드라마로부터 탈구하고 12음계의 재현으로서의 조성을 작파하여 사운드의 체계로 진입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재현의 굴레를 벗어던진 미술은 인상파 이후 각종 유파의 의지를 통해 재현으로서의 형상을 해방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춤이라면 발레나 미국의 모던댄스 혹은 각종 민족무용으로 고착된 기교들을 버리고 행위와 몸짓을 탐색한다. 심지어는 안무라는 조형적 고안을 폐기하고 즉흥을 통해 즉각적이고 현장적인 소통의 과정을 전개시키기도 한다. 왜? 그리하여 무엇을? 예술이 오랜 기간 각고의 숙련을 통해 완성해온 나름의 메소드들을 청산하고 난독(難讀)을 토로하는 대중과 소원해지면서까지(예술산업적 측면에서 소위 상품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여전히 재현적 코드를 지닌 작품들이다) 드러내고 펼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를 현전(現前, presence)시키기. 한마디로 현대예술들은 매체의 물질성(corporeality)을 전개시키며 그 존재론적 기술(記述)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사건의 전개와 그에 따른 감정이입이 아니라 실존의 사태를 충격하기, 역능의 상태를 감각케 하기. 고로 현대예술은 춤적 체험으로 수렴 가능하다 말할 수 있다. 연극이 신체성을 확장하거나(피지컬 시어터) 미술이 신체를 자신의 경로로 삼거나(퍼포먼스) 음악이 리듬을 강화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대 예술의 장르 접변성은 신체를 매개로 전개된다.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일부 (c)KUNST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장면 (c)KUNST

실재의 충혈적 사태, 몸성의 춤작가 김성용
  
그러나 막상 종합예술의 전형인 무용예술작품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 물질성을 전개시키는 현대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춤 역시 몸성(corporeality. corporeality의 또 다른 번역어는 ‘신체’다. ‘신체’는 통상 의식과 분리된 물질로서의 ‘body’로 한정되기 때문에 ‘의식을 담지한 신체’로서의 진행인 춤에 있어서는 ‘형상을 이루는 전체’를 지시하는 심신일원론적인 단어 ‘몸’으로 번역하기를 제안한다)을 전사(傳寫)한다. 하지만 배경으로 국한되었던 미술과 음악 역시 현대적 감도에서의 매체적 독자성을 발현하며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니, 장치는 운동성을 갖고 음악은 리듬의 강화 혹은 주파수로의 전환으로 어떤 생명성(liveness)을 확보하며 춤의 지위를 위협한다. 시너지 효과는 섬세한 조율에서 비롯하는 바 어긋나면 몸이 가장 큰 손해를 본다. 몸성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원천적인 생명성이지만 중력과 조도(照度)의 제약을 받으니, 개입하는 다른 매체들의 운위가 현란해지면 쉽사리 매몰되기도 하는 허약한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근자의 무용작품들에게 종종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춤적’인가? 과해지면 자칫 장치의 움직임은 설치미술로, 조명이나 영상의 움직임은 비주얼아트 혹은 아트무비에 귀속한다. 타장르에 잠식당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하여 일상과 연극적 행위에 복무하는 무용작품들 앞에서 추어올려진 생명력으로서의 춤의 행방을 물어야 하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자주 만난다. 그 자신의 존재론적 층위에 접면하지 못한 춤은 각별히 위험하다. 여흥과 사유 모두 예술의 층위이지만 말초적 감각물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을 뿐더러. 춤의 스펙터클(구경거리)화는 몸의 대상화라는 문제로 직결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몰이해에서든 장르 요소 간 조율 실패에 기인하든 스펙터클로 전락한 작품들은 자주 발견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렇다. 

김성용은 춤적·존재론적 보증이 가능한 작가다. 대구시립무용단으로의 부임작 <군중>(2018)으로부터 <DCDC>(2019)와 <The Car>(2019)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기공연작에서 그는 서사와 조명과 오브제와 음악 등 여러 요소들의 현대성에 더불어 작품을 직조하면서도 춤의 본성을 소실하지 않았고, 영상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던 팬데믹 시절 매체 전환적 위기 국면 속에서도 최대한의 춤적 감응을 확보해내었다(<존재-더 무비>(2020)와 <무엇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2020)). 그가 베어낸 세계 안에서 서른 여 명의 무용수들은 춤으로써 실존의 다양한 국면들을 농후하게 펼쳐낸다. 신작 <i-tube> 역시 그러하다.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일부 (c)KUNST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장면 (c)KUNST

환유된 세계와 익명적 주체들, <i-tube>

철제 지지대를 두른 거대한 투명 관이 무대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갈빗대가 보이도록 횡렬로 놓인 튜브는 감옥 혹은 상징계의 그물망을 연상시키며 세계를 환유한다. 그 안에 최초의 주체 i가 있다. 아이에게로 향하는 리드미컬한 여자의 독백(영어)이 부유하면서 작품은 개시된다. 여자의 말과 조응하지 못하는 i, 그는 일상, 모성, 생의 어떤 근원으로부터 박리된, 대문자로는 표기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다. 튜브 내부 여기저기로 자리를 옮겨본들 어디도 자신의 자리가 아니다. 그 우왕좌왕을 눈부신 조명이 따라다니며 노출시킨다. 심인(心因)적 구조에든 사회적 장치에 의해서든 포획된 채 감시받고 노출되는, 온전한 1인칭으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초상.  

튜브는 세계의 개폐(開廢)를 구사한다. 횡렬할 땐 사건들을 전개시키고 종렬하면 심리적 공간감을 투사하는, 튜브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체계 혹은 그것이 내면화된 심리의 안과 밖, 안으로부터는 탈주를 밖으로부터는 진입을 꿈꾸는 혹은 그 경계에 매달려 오도 가도 못하는 주체의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끝없이 순환시키는 이 세계 전체상을 함축한다. 튜브로 가시화된 세계의 내부와 표면과 외부에서 서른 둘 i들이 따로 또 같이 생의 일면들을 실연한다. 지지대에 매달려보고 위태롭게 올라서보고 내부 벽면에 부딪혀 미끄러지고, 세계를 작동시키거나 세계 안에 갇히거나 세계 밖을 배회하는, 어떤 장면은 지금 바로 누군가의 입장이고, 누층된 장면들의 총합으로의 작품은 전(全)시간적 생 그 자체가 된다. 

숙련된 몸들이 증폭시킨 생명력이 즉물적으로 전율을 일으키는 정동(情動, affect)적 위력이 지극할 때의 춤이 발현하는 힘. 대구시립무용단 단원들의 춤적 역량은 능히 몸적 소통으로서의 춤 체험을 가능케 했었다. 40주년을 앞두고 무용단으로서 무용단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었던 작품 <DCDC>는 모두에게로 열린 무대였다. 흡사 마당놀이처럼 연행자들과 더불어 신명이 지펴진 관객들로 열기 충천했던 막후의 로비는 강렬한 몸성의 구가로 정평이 나있는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의 그것과도 같았다. 팬데믹 비대면 시절에 처하여 영상을 경유해야 했던 작품들을 열외하고, 김성용에 의한 작품들에는 능란한 무용수들을 충분히 춤추게 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달뜨게 만드는 방점들이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구심으로 김성용과 DCDC의 작품들은 단체 역사상 여느 때보다도 열렬한 ‘춤’ 작품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일부 (c)KUNST
대구시립무용단 제80회 정기공연 '아이튜브' 공연 장면 (c)KUNST

이번 작품은 그러한 연혁을 이탈한다. 유리관 속 행위들을 우리는 안경,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본다’. 나의 생으로 축약 가능한 생의 면면들이지만 촉각되지 않으므로 작품은 나와 간극을 갖고 대상화된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보기, 영화적 경험. 그리고 ‘그’의 목소리, 내레이션. 무용수의 발화(發話)가 아니므로 그것은 분명 음악의 영역이다. 음악이 음가(音價)를 버렸으니 실험적인가. “굴 속에서 나는 꽤 오래 잤나보다…”로 시작한 문장들은 춤의 장면들을 꽤 잘 번안한다. 문학적이다. 화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일상으로부터 탈구되어 새삼스럽게 온 감각으로 과도하게 세계를 체험하게 된 카프카 소설 속 인물들처럼 집요하게 분열적이다. 무용수들의 행위와 꽤 잘 들어맞는다. 그게 문제다. 문학적 성취가 있는 게. 작품과 아귀가 맞는 게 도리어 문제다. 감상은 어쩔 수 없이 이원화(二元化)되고 언어를 초과하여 곧바로 몸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춤의 힘은 감가(減價)된다. 춤의 위력을 믿는 자의 입장에선 아쉬운 지점이다. 

그러나 인정하건대 이 분석은 미시적이다. 혼종적 작업은 대부분 양가(兩價)적이거나 가치충돌적 지점을 갖기 마련이다. 아마도 필자가 아쉬워하는 그 지점은 누군가들에겐 춤의 추상성을 덜어 작품에의 이해를 도왔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작품들에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춤적’인가? <i tube>를 말하자면 결단코 그러하다. 팽팽히 수위를 채운 각각의 요소들은 춤의 세계가 되어주었고 그 바탕에서 모든 행위가 춤으로 수렴하였으니 이를 춤 아니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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