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분열된 자아를 가진 동시대인의 초상 - ‘인간의 목소리’
[공연리뷰] 분열된 자아를 가진 동시대인의 초상 - ‘인간의 목소리’
  • 이민희 음악평론가
  • 승인 2021.12.2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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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공연 장면 (c)최인호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인간의 목소리' 공연 장면 (c)최인호

[더프리뷰=서울] 이민희 음악평론가 = 무대 위에 한 명이 등장해 극을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는 음악이나 시, 연극 등이 다채롭게 융합된 무대예술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유형의 작품 중 유명한 것으로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된 장 콕토(Jean Cocteau)의 연극 <목소리 La Voix Humaine>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내용으로, 신경질적이고도 복잡한 주인공의 마음이 그리움과 분노, 그리고 체념을 넘나들며 격렬하게 전개된다. 이 모노드라마에 풀랑크(F. Poulenc)가 1958년 음악을 붙인 모노오페라 <목소리>는 콕토의 원작과 동일하게 진행하되, 단 한 명의 소프라노를 오케스트라가 반주한다. 풀랑크는 합창이나 중창 대신 말과 노래를 넘나드는 독특한 선율 그리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달콤한 무드까지를 아우르는 특유의 음악을 통해 원작을 입체적으로 재해석했다.

초연 이후 모노오페라 <목소리>는 종종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 반주로 무대에 올랐으며, 특히 국내에서는 1995년 서울오페라앙상블이 피아노 버전으로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이와 같은 형태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경우 모노오페라 <목소리>는 한 명의 성악가와 한 대의 피아노만을 필요로 하는, 소극장오페라의 전형이자 지극히 ‘간소한 작품’으로 이해되었다.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공연 장면 (c)최인호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인간의 목소리' 공연 장면 (c)최인호

2021년 11월 12일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에서 관객을 만난 <인간의 목소리>는 연출가 조은비가 진행 중인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의 일환으로 피아노 반주에 한 명의 성악가, 그리고 여기에 한 명의 무용수가 더해진 형태로 공연됐다. 이는 관객이 모노드라마 전통의 이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봐야 했음을 의미한다. 무대 위에 움직이는 두 개의 상(像)이 극 안에서 1인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그 둘이 각기 다른 존재이되 서로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는지 등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것이다.

무대 위에는 몇 사람이 있었을까?

막이 오르면 어스름 안에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하고, 이어 무대 왼편 가장자리에서 성악가가 노래를, 무대 중앙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동작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용수가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악가의 목소리는 그의 육체와는 분리된 채 그저 음향으로 존재하며, 무용수의 추상적인 몸짓을 위한 배경음악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악가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면서 피아니스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성악가와 무용수, 총 두 명의 인간이 서 있다.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공연 장면 (c)최인호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인간의 목소리' 공연 장면 (c)최인호

둘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악가를 텍스트의 전달자이자 주체로, 그리고 무용수를 그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는 부수적인 도구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성악가가 오페라의 주인공 엘(Elle)의 시점에서 연기와 노래를 행하면, 무용수는 텍스트의 상황이나 감정에 맞추어 몸을 움직인다. 성악가가 “더 이상 살 수가 없더라”는 가사를 읊조리면, 무용수가 움직임을 멈추고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몸으로 표현하거나, 가사에 맞추어 ‘우는 연기’를 하는 식이다. 따라서 무대 위에는 피아니스트와 성악가가 만드는 ‘음악’과 그 음악의 내용물로 추정되는 ‘감정’ 그리고 이 음악이 만들어낸 효과에 해당하는 ‘감정의 변화’가 서로 뒤섞인 채 펼쳐진다. 관객이 작품을 보고 느낄법한 감상과 그로 인한 감정의 동요까지를 통합해 제시하는 셈이다.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공연 장면 (c)최인호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인간의 목소리' 공연 장면 (c)최인호

무대 위 두 명이 동등한 개체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극 중 ‘그녀’를 성악가가 연기하고, ‘그’나 다른 인물, 혹은 물건 등을 무용수가 연기하거나 묘사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를테면 성악가가 “당신도 알거야 가끔씩 우리가 침대에 누워서 당신 가슴팍에 내 머리를 대고”라는 가사를 노래하며 무용수에게 넌지시 기대는 장면에서는 성악가가 ‘그녀’로 무용수는 ‘그’로 보인다. 성악가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흰 가루를 뿌렸으며, 무용수는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풀어헤쳤다는 점도 기억에 남는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조가 무대 위 독립된 개체로서의 두 인간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목소리>의 음악은 짧은 단위로 조의 중심(tonal center)을 이동시키며 음악의 속도 그리고 화성의 색채 등을 계속해서 바꾼다. 이런 가운데 종종 규칙적인 리듬을 가진 춤곡 풍의 음악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무용수는 팔을 흔들거나 스텝을 밟으며 ‘전통적인 의미’의 춤을 추곤 했다. 특히 관객은 이런 장면들에서 무대를 편안히 응시하며 극 내내 흐르던 숨막히는 긴장감에서 벗어났고, 마치 오래된 살롱에 들어선 것 같은 아련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보수적인 의미의 춤곡과 그에 대한 춤추기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공연 장면 (c)최인호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열린 '인간의 목소리' 공연 장면
(c)최인호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을 반영하는 분열된 자아

이처럼 <인간의 목소리>에서는 무대 위 성악가와 무용수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성악가의 숙련되지 않은 ‘몸의 움직임’이 무용수와 비교되어 시각적으로 묘한 불일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즉 관객은 종종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호흡을 갖는 두 개의 상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잔존하는 균열을 느껴야 했다. 다만 이런 상황이 극의 소재 및 연출과 결합됨으로써 오히려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을 반영하는 새로운 시선을 유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목소리>는 풀랑크 시대에 사용했던 유선 전화기의 벨소리를 피아노로 흉내내며, 통신 오류의 일종이었던 혼선(混線) 상황을 그린다. 극 초반에 성악가가 “슈미트 박사라는 사람은 없어요. 0.8이예요 0.7이 아니고요”라는 대사를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것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다. 이날 공연에서는 이런 낡은 기술 위로 21세기의 테크놀로지와 환경이 자연스럽게 결합됐다.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전화기 불빛은 누가 보아도 네모난 스마트폰의 형상이었고, 무대 가득 커튼처럼 늘어진 전화선들은 사실상 데스크톱 컴퓨터를 분해했을 때 마주할 수 있는 지저분한 전선다발 같았다. 

극 안에 쇼팽(F. Chopin)의 에튀드 <겨울바람>(Op. 25, No. 11> 그리고 드뷔시(C. Debussy)의 플루트 독주곡 <시링크스 Syrinx>와 유사한 음악이 등장하되 음정과 화성이 기묘하게 변형된 채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런 음악들은 전화기를 통과한 소리들이 본래의 정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열악해지고 또 변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런 소리조각들은 미디어를 거친 정보가 오염되었고 어딘가 조작되었음을 특유의 괴기스럽고도 생경한 음향으로 암시한다. 

결국, 테크놀로지를 상상케 하는 무대 연출과 소리 장치 덕분인지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무대 위 ‘두 명의 인간’은 변조된 정보가 떠다니는 21세기의 통신 환경 속 자아와 초자아, 혹은 누군가와 그 누군가의 복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연결된 망 안에서 나와 다른 대상의 연결을 꾀하기도, 익명인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기도, 나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발동시키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 그렇게 성악가와 무용수는 어느 정도의 균열과 뒤틀림을 숨기지 못한 채 서로를 반영하거나 대조하고, 혹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조종하는 동시대인의 초상(肖像)이 된다. 

그래서 “기억나니 그 일요일, 베르사유에서 그 메시지도”라는 가사와 함께 일렁이는 불빛처럼 팔을 흔드는 무용수의 ‘춤’은 작은 종이를 통 안에 넣고 태우는 행위 같기도, 풍선인형이 개업식당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같기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가상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며 공허한 밤을 보내는 현대인의 기약 없는 열정같이도 보인다. 디지털 미디어가 ‘나’와 타인을 연결시켰지만 동시에 세계로부터 고립시켰음을, 외로움에 사무친 그녀의 대사와 절규가 말해주는 것이다. 90년 전 탄생한 모노톤의 목소리가, 21세기 미디어 환경 속 다중적이고 분열적인 목소리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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