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5) - 인생의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5) - 인생의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2.01.10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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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나만의 의식
쾰른 대성당 (제공=김윤정)
쾰른 대성당 (사진제공=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2021년이라는 숫자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2022 년이 되었다. 나는 지키지도 못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어제의 나에게 젖어 있는 타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고자 하는 작은 다짐으로 새해를 맞았다. 우리는 매년 12월 31일 밤에는 쾰른 대성당(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는다. 동방박사 3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해 13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완성된 중세 고딕 건축물인 쾰른 대성당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4개의 종을 포함해서 11개의 종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진자운동을 하는 엄청난 무게의 오래된 종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 년에 딱 한번 제야에만 이 종들을 울린다. 그야말로 아득한 시간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신비하고도 웅장한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함몰되어 가는 내 몸과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다 보면 오르간 연주와 성가합창, 그리고 향 내음 속에 진행되는, 오랜 시간 반복되었던 미사 의식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는 에고를 내려놓고 성스럽고 엄숙한 분위기에 결속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과 조연

삶은 나로부터 존재하고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되는 소설 같지만 시기에 따라서 내가 아닌 제삼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관찰자로서 내 인생의 주인공 같지만 어떤 시기는 나는 조연이고 주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이면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이미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을 했거나 또는 어떤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현세에 남아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강렬하게 또는 부드럽게 내 안에 남아, 잊힌 듯하다가도 언제고 불쑥 기억 속에서 존재를 내민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 속에서는 엄청난 스토리의 중심에 있겠지만 내 인생 속에서는 별 의미 없이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 역시 누군가의 삶에는 존재감 없이 잠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날 문득 내 인생에 잠시 주인공으로 들어왔던 옛 친구를 떠올려 본다. 

친구의 단편소설이될뻔햇던 이야기가 떠오르는 갈대
친구의 단편소설이 될 뻔했던 이야기가 떠오르는 갈대 (사진제공=김윤정)

문학소녀였던 내 친구 이야기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여중 여고시절 단짝처럼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시절만큼은 그녀가 내 인생에 주인공이던 시절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먼저 다가선 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 친구의 엄마는 앞을 못 보셨고 자신은 사생아라고 했다. 여중시절 어린 나에게 사생아라는 단어는 얼마나 낯선 단어였던지…. 너무나 순수하고 또 아름다웠던 그 친구의 입술 사이로 나온 사생아라는 그 단어의 첫 기억은 강렬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고 집에 와서 그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그게 뭐냐고 직접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나름 문학소녀였다. 우리는 방과 후 남아서 매일 저녁 시를 쓰고 바꿔서 읽고는 했다. 그리고 서로 느끼는 것들을 나누고 공유하며 함께했다. 학교 수위 아저씨의 마지막 업무는 우리에게 이제 교문을 닫아야 한다는 걸 알려 주시는 일이 되어 버렸을 정도였다. 늘 어스름하게 지는 해를 보면서 우리는 하교길까지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때 그 여린 감성으로 쓴 시들은 지금은 도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그때는 제법 진지했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독자였고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뭔가를 썼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는 단편소설을 쓸 거라고 했다. 늘 그녀는 나보다 무엇이든 한발 앞섰다. 단편소설이라니, 당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장르였던 것이다. 친구는 먼저 나에게 쓰고자 하는 단편소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갈대와 바람에 관해서 쓰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은 변덕스럽거나 지조 없는 여자들을 갈대에 빗대어 말하지만 갈대는 언제나 바람만을 따라다니는 가장 지조 있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글은 끝내 읽어볼 수가 없었다. 나의 생각에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뻔했던 갈대와 바람의 이야기는 아마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예상치 못했던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악역의 등장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는 악역도 등장하는 것이다. 

유난히 창백한 피부에 예민한 눈을 안경 안으로 늘 굴리며 학생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수학 선생님과 우리들의 인연은 참으로 끈질겼다. 여중 시절 그 수학 선생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게 관심을 가져 주셨다. 유독 내 친구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었는데 아마도 그 어린 나이에 혼자 자취를 하는 친구였기에 더 특별할 수도 있으려니 했었다. 우리가 인문계 여고로 가게 되었을 때 수학 선생님도 우리가 가는 여고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전했다. 순간 친구가 파랗게 질리는 얼굴로 그제서야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혼자 사는 친구의 방을 불시에 찾아가고 친구가 집에 없을 때도 들어가서 친구의 일기를 훔쳐보고 훈육을 하는가 하면 어느 날 다짜고짜 친구를 데리고 산부인과를 다녀오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여고에 가서도 수학 선생님의 스토킹은 집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어떻게 그 선생님이 여고로 그렇게 갈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지할 가족 하나 없이 그 어린 나이에 선생님 이란 절대 권력의 비상식적 행동에 반기를 든다거나 반항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엄마라도 내 물건, 내 소지품을 정리해주는 것도 싫던 그 시절, 자신의 공간에 선생님이라는 타인이 그렇게 불시에 들락거리며 일기장까지 훔쳐보는 일을 당하는 친구의 학교생활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힘든 지옥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벗어나는가 했는데 같은 학교로 전근을 한다는 수학 선생님 소식에 친구는 무너졌다. 우리는 그냥 예민한 자기만의 세상이 있던 아주 평범한 사춘기 계집아이였을 뿐이었는데…. 결국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얼마 다니지 못하고 친구는 가출을 했고 시골의 먼 친척집에 피신하다시피 가 있었다. 

수학 선생님은 갑자기 모두가 수업중인 시간에 나를 불러내어 바로 그날 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면 퇴학이라고 했다. 그 친구를 위한다면 당장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퇴학이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에 나는 겁먹은 얼굴로 친구가 있는 곳으로 선생님을 안내했고 그렇게 들이닥친 선생님의 마지막 말은 단호했다. 넌 이미 퇴학됐어. 마지막으로 네 꼴이 어떤지 보러 왔다고 했다. 당황하는 나에게 친구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는 얼굴로 응답했다. 선생님은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나를 이용해서 그 먼 길을 다녀온 것이다.

그 시절 아이들이 재미삼아 서로 해보는 앙케트 질문지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라는 질문에 수학 선생님 이름을 적었다가 며칠 뒤 불려가기도 했었다. 하필이면 또 모두가 수업중인 시간에 조용하게 나를 불러내어 정적이 도는 학교 뒷마당 나무 아래 벤치에 앉혀 놓고는 나는 너를 예뻐하는데 너는 내가 왜 싫은 거니? 하고 묻는 그녀,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대답을 못하는 나에게 네 친구를 왜 퇴학시켰느냐는 것이겠지? 하면서 시작하는 말도 안 되는 선생님의 변명들은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 수학 선생님은 왜 그래야 했을까? 내 친구에 대한 그녀의 집착 어린 애증은 왜 그런 결론으로 치닫게 됐을까? 어른이 되어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을 해도 도를 넘던 그녀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용서가 잘 되질 안는다. 그런데 그 시절은 이상하게도 말이 안 되는 일들은 참으로 많았다.

친구는 늘 나보다 모든 것이 빨랐다. 그러니까 그 어린 나이에 거의 혼자 살았고 나보다 공부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다. 그녀는 나보다 첫 생리도 빨랐고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렀지만 늘 소녀에서 숙녀로, 그리고 여성이 되어가는 모든 의식을 나보다 먼저 치르고 그 첫 경험을 늘 담담하게 들려주던 친구는 같은 나이지만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를 꽤나 잘해 전교 상위권에 있던 친구는 그렇게 퇴학을 당하고,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친구를 찾아가 보았다. 친구는 결국 시골에서 어찌어찌하여 의지하던 남자친구와 살게 되었고 아이도 낳았다. 친구는 반가워하면서도 자신은 일부러 라디오도 티비도 없이 산다고 했다. 밖의 세상을 알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친구의 남자는 너무나 착하고 친구에게 잘해주는 따뜻한 사람이란 인상을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다녀가고 나면 아이 아빠는 죄책감에 술을 많이 마신다고 했다. 나는 나름 나의 삶도 역동적이었고, 더 이상 그 친구를 찾아가지 않기로 했었다.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비맞은 튤립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비 맞은 튤립 (사진제공=김윤정)

너는 어디에?

어느 날, 핸드폰도 없던 이화여대 대학원 시절 수업이 끝나고 교정을 나오는데 정문 앞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무작정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나는 너무 반갑고 놀라운 나머지 쓰러질 뻔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를 도시 안에서, 그것도 나의 바운더리 안에서 볼 수 있다니 세상 밖으로 나온 친구가 너무나 낯설기도 했고 반가웠다. 우리는 어느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시켰다. 그런데 그녀가 던진 첫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애 아빠가 죽었어. 내 기억에 자살로 받아들여진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그는 한창 빛나던 그녀가 자신 때문에 인생이 피지 못했다는 것을 늘 자책하곤 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거의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내 인생에 주인공 같았던 그 친구는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 짙은 여운을 남긴 채로 퇴장을 했다.

지금 그녀는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면 나를 스쳐가며 영감을 주었던 수많은 타인들은 지금 여기 내 앞에 없다. 더 이상 타인과 나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우리들이 바라보는 3차원에서는 평면적이다. 그러나 4차원에서 보면 시간은 리소스(resource)이다. 그 안에 다 머물고 있는 것이다. 책이나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언제고 우리가 어떤 페이지를, 어떤 장면을 보느냐에 따라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라져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어느 세계에 있다고 해도 내가 말하고 표현하는 그 속에 그들은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또는 내가 그들을 바라본다. 구분 없이, 경계 없이 그렇게 우리가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 나와 함께했던 내 인생의 주역 또는 조연들… 나는 그들의 고독을 펼쳐놓을 손수건 같은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가 없다면, 어떤 결말이, 어떤 시작이 있을 수 있을까? 인생은 어쩌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 우리가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 나오는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정물화 같은 풍경
또다시 갈대 (사진제공=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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