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서울오페라앙상블, 안효영의 ‘장총’ 초연
[공연리뷰] 서울오페라앙상블, 안효영의 ‘장총’ 초연
  • 이용숙 공연평론가
  • 승인 2022.01.3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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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제를 비범하게 무대화한 대본과 음악의 힘
장총-유랑하며 공연하는 남매악극단 선녀(정시영 분)와 봉석(석승권 역) 그리고 마을사람 정아(이미란 분) (c)강희갑
'장총' 공연 중 유랑하며 공연하는 남매악극단 선녀(정시영 분)와 봉석(석승권 분) 그리고 마을사람 정아(이미란 분) (c)강희갑

[더프리뷰=서울] 이용숙 공연평론가 = 한국오페라 초연이 관객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오페라라는 장르의 형식 자체가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데다 현대극과 현대음악이라는 높은 장벽이 창작자와 관객 사이를 또 한 번 가로막기 때문이다. 공연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니 제작에 투자나 후원을 받기도 어렵고, 제작비가 부족해 무대 완성도가 빈약하다보니 관객은 더욱 등을 돌린다. 악순환이다.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장수동 예술감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양질의 창작오페라를 제작하려고 30년을 노력해왔다. K팝의 성공처럼 K오페라의 국제적 성공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뜻은 좋지만 실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해왔는데, 1월 22-2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서울오페라앙상블이 초연한 안효영의 창작오페라 <장총(The Trigger)>을 보고 그 가능성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보기 드물게 재미, 의미, 감동이라는 관객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최근의 한국오페라로 최우정의 <1945>(2019)와 나실인의 <춘향탈옥>(2020)을 꼽을 수 있다. <1945>는 전문가들의 작곡가 선정 심사를 거친 국립오페라단의 위촉으로, <춘향탈옥>은 예술의전당 기획오페라로 제작된 만큼, 비교적 안정적인 제작 환경에서 탄생했다. 민간오페라단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이 제작한 안효영의 <장총>은 앞의 작품들보다 훨씬 힘든 여건이었겠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되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공적 지원 없이는 수준 높은 한국오페라가 탄생하기 어려움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장총-악극을 구경하러 온 마을사람들 (c)강희갑
'장총' 공연 중 악극을 구경하러 온 마을사람들 (c)강희갑

교훈을 강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은 기우였다

1953년 한국전쟁 중, 지리산 기슭 한 마을에 남매 악극단이 온다. 마을사람들의 구멍 난 가재도구들을 땜질해 주며 자신들의 악극을 홍보하는 남매 봉석과 선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안극 <노민호와 주인애> 공연을 준비 중이다. 빨치산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심에 차 있는 18세 청년 길남은 방아쇠가 없어진 장총을 들고 와 당장 고쳐놓으라며 이들을 위협한다. 이 장총은 일제 강점기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져 일본군, 독립군, 국방군, 인민군, 학도병, 빨치산의 손을 거쳐 우익청년단원 길남에게까지 넘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연인이 오빠를 죽인 뒤에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악극의 여주인공을 보면서 길남은 마음이 흔들린다. 여주인공 선녀를 보며 길남은 이념으로 갈라져 원수가 되어버린 첫사랑 설화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이 길남의 복수심을 누그러뜨린다. 변화하는 길남을 보며 이제 더 이상 무기로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 장총도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이 오페라에는 합창단 외에 여섯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길남, 장총, 나무, 선녀, 봉석, 정아로, 정아는 18세 빨치산 설화를 시신으로 만나게 되는 설화의 언니다.

오페라 <장총>은 직접 보기 전에는 그리 끌리지 않는 작품일 수도 있다. ‘악기가 되고 싶었지만 무기가 되어 버린 나무 이야기’라는 작품 요약 한 줄을 읽는 순간, 누구든 이 오페라의 주제와 메시지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 가능한 예술작품은 교훈적이거나 도식적이기 쉽다. 총구에 장미꽃이 꽂힌 공연 포스터 역시 ‘상식적인 주제’라는 예상에 힘을 싣는다. 더구나 ‘의인화된 장총’이 주인공이라니! ‘전쟁 대신 평화!’를 외치는 교과서적인 작품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우일 뿐이다. 오페라 <장총>의 주제에는 물론 교훈이 담겼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교훈을 앞세우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대본도 음악도 결코 도식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섬세하고 복잡하게 얽히고 짜이며 모르는 사이 관객에게 스며들고 관객을 물들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스토리 전개가 역동적이고 무대 몰입도가 높다.

이 작품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단막 오페라다. 대본작가 김은성은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허구에 버무려 슬쩍슬쩍 꺼내놓으면서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1940년에 조선총독부는 도견부를 설치하고 개가죽 공출령을 내린다. 일본군의 방한복을 만들기 위해 이들은 삽살개 50만-100만 마리를 도살해 가죽을 벗겼다. 극 속에서 길남이는 기르던 개 ‘살구’가 방한복용으로 도살되어 가죽이 벗겨지는 참혹한 사건을 겪는다. 이를 지켜본 나무가 “길남이는 미친 듯이 달렸어”라고 하면 길남이는 “달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어”라고 잇는다. 음악을 사랑하고 하모니카를 잘 불던 길남이는 그날로 음악과 절연한다(“절벽 아래로 하모니카를 던졌어.”).

3장 ‘악극의 세상’에서 번안극 공연을 관람하는 길남이 봉석과 선녀의 극중 대사에 끼어드는 장면, 선녀와 길남의 대화에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같은 ‘나무’가 개입하면서 대화가 길남과 나무의 것으로 옮겨가는 장면, 길남과 선녀의 대화가 갑자기 길남과 설화의 과거 상황으로 바뀌는 장면 등은 관객을 끊임없이 긴장시키며 시선을 무대에 묶어두는 대본상의 탁월한 장치였다.

장총-증오에 차 있던 길남(최병혁 분)의 마음을 돌리는 선녀(정시영 분) (c)강희갑
'장총' 공연 중 증오에 차 있는 길남(최병혁 분)의 마음을 돌리는 선녀(정시영 분) (c)강희갑

현대성에 친숙함 가미해 관객을 설득한 음악

오페라 작품의 설득력은 일차적으로 대본과 음악에서 나온다. <장총>의 대본과 음악에는 일치와 조화의 힘이 있다. 김은성의 대본은 섬세하고 치밀하면서도 적절한 의외성을 통해 놀라운 추진력을 갖는다. 안효영의 음악은 강렬하고 역동적이면서도 깊고 세심한 성찰을 담았다. 그 둘이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극의 밀도에 상응하는 음악의 밀도 역시 객석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다. 자막을 굳이 보지 않아도 노래 가사는 명료하게 귀에 꽂힌다. 말의 리듬을 그대로 음악화한 덕분이다. 속사포 같은 짧은 음표의 연속으로 오페라가 아닌 연극을 보는 듯한 효과를 내기도 했다.

“우선 말의 강세가 음악의 강세와 일치해야 할 것이고 우리말이 갖는 고유한 리듬을 적절하게 악보에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한 기보를 탈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페라 작곡가는 음악만큼 말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 말을 정말 여러 번 읽어봐야 하고, 악보에 어떻게 담아야 연주자가 그 리듬을 타고 노래할 수 있는지 고민한 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 안효영의 이런 의지는 작품 속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다. 작가 김은성이 뚜렷한 개성을 부여한 등장인물들에게 안효영은 그 각각의 개성에 부합하는 음악적 모티프를 적용했다. 이 라이트모티프들은 인물이 등장할 때 또는 그 인물이 언급될 때 다채롭게 변주되었다. ‘인물 모티프뿐만 아니라 전쟁의 폐허를 암시하는 12음 모티프도 오페라 시작과 함께 울리고 작품 전반에 쓰였다’고 작곡가는 설명했다. 이 모든 음악적 재료들을 구상해 준비한 다음 작품을 직조해 음악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현대음악의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음악이 가깝게 다가오도록 만든 중요한 장치는 귀에 익숙한 멜로디들의 차용이었다. ‘

이별의 노래’로 알려진 쇼팽의 피아노곡 선율, 1950년대 유행 가요 ‘유랑극단’ 선율 등은 적재적소에 쓰여 효과를 더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친숙함으로 관객의 집중도를 높였다. 특히 사라진 장총의 방아쇠를 호른밸브로 대신한다는 극 중 설정에 맞춰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호른 솔로 멜로디를 사용한 아이디어는 참신했다.

지휘자 구모영이 이끈 코리아쿱오케스트라의 안정적인 연주도 이 성공적 구현을 가능하게 했다. 초연임에도 각 악기군이 어긋남 없이 조화를 이뤄냈고, 악상의 풍요로운 표현력으로 관객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장총-가족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하는 정아. 위로하는 선녀와 봉석 그리고 왼편의 나무(장지민 분) (c)강희갑
'장총' 공연 중 가족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하는 정아. 위로하는 선녀와 봉석 그리고 왼편의 나무(장지민 분) (c)강희갑

인간과 사물의 조화를 이끌어낸 연출과 의상

장총과 나무가 무대 위에 등장해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는 이 오페라의 설정은 연출가 이경재에게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가는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 그리고 이들의 상황을 지켜보는 장총과 나무의 정적인 성격을 적절하게 대비시키며 효율적인 동선을 그려냈다. 어색해질 수도 있는 사람과 사물의 무대 위 공존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연출가의 공이다.

나무와 장총의 존재를 당연하게 만드는 데는 신동임의 의상디자인도 큰 역할을 했다. 총신(銃身)과 일본 국화문양을 담은 장총의 의상, 나무껍질과 뿌리의 형태를 추상화한 나무의 의상, 주역들부터 합창단의 의상까지 자연의 색과 질감을 사용한 인상적인 의상은 무대의 완성도를 크게 높였다. 나무와 숲을 무대 배경에 펼쳐놓은 최진규의 무대디자인, 차가운 세상과 따뜻한 세상을 대비시킨 김민재의 감각적인 조명디자인도 무대에 몰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길남 역의 바리톤 최병혁은 완벽에 가까운 가창과 연기로 극적 긴장을 시종 견인했다. 분노와 증오로 폭발할 것 같던 길남이 음악을 좋아하던 본래의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최병혁은 마치 자신 내면의 두 본질처럼 치밀하게 표현했다. 선녀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정시영의 미성과 연기력은 무대 전체에 따뜻한 빛을 선사했다. 봉석 역의 테너 석승권은 정시영과 매끄러운 연기 호흡을 보여주며 극의 재미를 더했고, 정아 역의 메조소프라노 이미란은 마음을 울리는 표현력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장총 역의 테너 김주완은 무대의 무게중심을 잡으며 연륜이 느껴지는 가창과 연기를 보여주었고, 젊은 소프라노 장지민은 나무 역을 맡아 호소력 있는 가창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극중 합창 ‘나는 우리집 대문이었어’로 노이오페라코러스는 관객의 깊은 감동을 이끌어냈다. 합창 ‘우리는 굳세고 용감한 토벌대’에서는 앞의 합창과 대비를 이루는 박진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길남이 남매 악극단와 함께 수레를 밀며 길을 떠나면서 극 초반에 선녀가 부르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부분은 야만의 역사 위에 쓰는 희망의 노래로 들렸다. 공연 규모에 신축성이 있어 더 큰 무대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지역 공연장 또는 학교에서도 공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 진출할 경우 전라도 사투리의 맛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겠으나, 주제의 보편성과 역사성, 인물들의 사적 감수성과 개성 및 음악의 힘은 해외 무대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장총-빨치산 토벌대의 합창(노이오페라코러스)
'장총' 공연 중 빨치산 토벌대의 합창(노이오페라코러스)  (c)강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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