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KBS오케스트라와 30년 (3)
[더프리뷰 칼럼] KBS오케스트라와 30년 (3)
  • 황순룡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2.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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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은 1956년 당시 서울방송(KBS)관현악단으로 출발
서울방송교향악단으로 개칭하면서 공식적인 ‘KBS교향악단’ 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
황순룡 칼럼니스트
황순룡 칼럼니스트

한국전쟁이 낳은 육군교향악단과 해군 정훈음악대는 이후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KBS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을 태동시키는 결정적인 주춧돌이 되었다.
KBS교향악단은 1956년 당시 서울방송(KBS)관현악단으로 출발하였다가 서울방송교향악단으로 개칭하면서 공식적인 ‘KBS교향악단’ 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교향악단, 국립교향악단으로 부침을 거듭하며 맥을 이어 활약했다가 1981년 교향악단의 운영권이 다시 KBS로 이관되면서 KBS교향악단으로 활동한 이후 2012년 독립법인체인 재단법인으로 재탄생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국립교향악단의 운영권이 KBS로 넘어오면서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의 웅비’라는 대명제하에 전문가와 관계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위원장 박민종 서울대 음대 학장)는 최선의 운영체제로 음악 총감독 중심의 체제를 갖추기로 결정하고, 이강숙 서울대 음대 교수를 초대 총감독으로 추천했다. 이후 이강숙 교수는 초대 총감독으로서 독일인 지휘자인 발터 길레센을 수석 객원 지휘자로 추천하는 등 의욕 넘치는 활동을 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이강숙 총감독의 임기 만료됨에 따라 후임 2대 총감독으로 김만복 숙명여대 교수가 임명되었다. 김만복 총감독은 재임 기간 중 동남아 5개국 순회연주회를 나서는 등 보다 적극적이고 연주 활동의 폭을 해외로까지 넓혀 나갔으며 직접 지휘까지 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후 1990년 김만복 총감독이 임기만료로 사임을 하고 3대 총감독으로 김동성 명지대학교 교수가 취임했다.

김동성 총감독

김동성 총감독은 필자가 KBS교향악단 사무국에서 근무한 기간과 겹친다. 1981년부터 KBS교향악단 운영위원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김동성 총감독은 서울대 교수와 명지대 교수로서 교단을 지킨 학자였고, 시인이자 영문학자였으며 대한공연윤리위원회 이사장(1961)을 역임하고 또한 공보부 장관(1963-1964)을 지낸 각료였으며, 주아르헨티나 대사(1967-1976)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하였고 한국음악협회 이사장(4대-5대)을 지낸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사였다. 또 김 총감독은 제9대 국회의원(1976-1979)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이력을 가진 김동성 총감독은 1993년 임기를 마친 후 KBS교향악단 연주회를 빠짐없이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경기도 용인의 한 실버타운에서 노년의 생활을 이어가며 여기서도 활달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그 자신만의 특징을 발휘하여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하는 등 매우 활동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05년 11월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KBS교향악단 사무국장을 지낸 유규만 국장과 함께 김 총감독 생전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한번 찾기로 하였으나 끝내 방문하지 못했던 일은 늘 가슴 한켠에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김동성 총감독과 유규만 국장은 KBS교향악단을 사이에 두고 항상 티격태격했다. 유 국장은 동양방송 TBC (현 JTBC의 전신)에서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과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한 예능 전문 PD로서 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KBS로 옮겨와 예능국장 등을 역임한 왕 PD였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예능계의 대부였던 그가 (서울대 음대 출신이기에 KBS교향악단과의 인연이 이어졌음) 교수, 외교관, 각료, 시인, 음악인 등 다채로운 세계를 섭렵한 김동성 총감독과 힘겨루는 듯한 모습은 아슬아슬한 긴장과 함께 옆에서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쏠쏠한 재미를 주곤 했다.
김 총감독은 그의 이력만큼이나 화려한 말솜씨와 함께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매우 능수능란했다. 또한, 대처 능력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피아니스트였기의 음악적인 분야에서도 깊이 있는 지식을 드러내곤 했다. 악단의 음악성과 프로그램, 연주자 등의 분야까지도 총감독이라는 직분의 역할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깊은 뜻(?)과 지휘자로서 또는 악장, 수석, 단원으로서 악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중압감(?)이 서로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고, 바로 이 부분에서 악단과 보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교향악단을 관리하고 운영할 책임이 있는 유 국장으로서는 총감독과 악단 그리고 지휘자 사이에 갈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조직을 보다 유연하게 이끌고 좀 더 향상되고 견고한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김 총감독과 악단과의 사이에서 유 국장은 오히려 자신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며 화합과 대립을 적절히 섞어 KBS교향악단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이끌어 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막 내린 총감독 체제

그러나 총감독, 악단, 사무국은 각자 서로 이해하는 부분보다 대립하고 갈등하는 부분이 컸다. 사무국은 이러한 일들이 교향악단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세계적으로도 총감독과 음악 감독(예술감독)체제가 교향악단을 발전시키는데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었고 많은 오케스트라가 총감독 체제에서 음악 감독(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 시스템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KBS교향악단 또한 크고 또는 작게 발생하는 총감독과 악단 그리고 사무국과의 갈등의 봉합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김동성 총감독 임기가 만료되자 후임 총감독을 임명하지 않고 공석으로 남겨 놓은 채 상임 지휘자가 총감독의 역할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으로 일원화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 끝)

황순룡 칼럼니스트
황순룡 칼럼니스트
hsryong@kbs.co.kr
전 KBS교향악단 기획
안익태기념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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