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모니터] 얼굴 없는 자들의 도시, 탈주의 시선과 몸짓
[공연모니터] 얼굴 없는 자들의 도시, 탈주의 시선과 몸짓
  • 나수진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7.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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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슬의 <오라>

[더프리뷰=서울] 나수진 무용이론가 =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들은 언제나 또 다른 사건 사고들에 의해 빠르게 밀려나고 잊히고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들과 유가족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안무가 이이슬은 <오라>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무엇이 그들을 그 사건 사고로 내몰았는가? 세상은 왜 그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가? 바로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관객은 이러한 질문에 매우 진지하게 귀 기울이게 된다. 예술의 동시대성을 ‘익히 아는’ 이이슬 안무가가 온몸과 영혼을 다해 던진 묵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오라>는 지난해 한국무용제전에서 소극장부문 최우수 안무상을 받은 수작이다. 이 작품은 지난 4월 28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제37회 한국무용제전 폐막무대에 초청되었다. 그녀는 애도와 반추의 정서, 존재론적 질문을 담긴 움직임으로 보는 이들의 가슴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이이슬 '오라' ⓒ김경동
이이슬 '오라' ⓒ김경동

공연이 시작되고 암전된 무대 한가운데에 한줄기 희미한 빛이 내려오자 가면을 쓴 듯 얼굴을 꽹과리로 가린 무용수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하체에는 중세 상류층의 복식을 연상시키는 긴 원통형 페티코트를 걸치고 팔에는 길고 파란 장갑을 꼈다. 꽹과리라는 전통 오브제에 서구식 페티코트와 긴 장갑을 매치한 데에서 이이슬다운 멋이 엿보였다. 전통과 동시대성의 공존을 고민해온 그녀는 최근작 <상상이상>에서 상모의 물채를 주요 오브제로 활용하기도 했다. 꽹과리를 쓴 얼굴은 페르소나가 거세된 도시 안의 익명적인 존재들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작품 속에 등장한 섬뜩하고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존재가 씻김굿이라는 무속 의식을 컨템퍼러리적으로 표현하는 움직임, 그 자체가 강렬했다. 얼굴과 하체의 움직임을 가린 무용수는 두 팔과 상체만으로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몸부림 또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의지를 표현하는 무언의 언어와도 같았다. 극히 제한된 신체의 움직임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전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치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원통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모습 같기도 하고 혹은 잔혹하게 살해당한 시신이 검은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이슬 '오라' ⓒ김경동
이이슬 '오라' ⓒ김경동

꽹과리와 페티코트로 가린 얼굴과 하체는 단순히 관객의 호기심을 추동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강한 몰입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은폐는 우선 움직임의 주체, 곧 작품 속 주인공에게 익명성을 덧입힘으로써 특정 관객이 아닌 모든 관객의 이입을 유도한다. 무용수의 얼굴 생김새나 표정, 분장, 팔다리의 움직임은 슬픔, 우울, 환희 같은 특정 감정을 이입하는 주요 매개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고 철저한 익명성과 몰감정 속에서 춤추는 무용수에 대해 관객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오라>의 이러한 은폐는 모든 관객의 ‘감응(affect)’을 끌어내고 이로써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를 사유하게 만든다. 즉 음울한 사각지대의 사건 사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수도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이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은 생생함, 더 나아가 섬뜩한 느낌을 준다. 특히 무용수가 씻김굿을 하는 샤먼(shaman)처럼 두 팔을 움직일 때마다 꽹과리가 난반사하는 조명빛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 장치로 보인다. 즉 익명 ‘아무개’의 형상인 무용수가 관객 모두를 또 다른 자아, 곧 사각지대의 잠정적 희생자들로 명명하고 끌어당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듯 강렬하고 전위적인 초반부를 지나 작품이 중반부로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반전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한 명으로 보이던 무용수가 갑자기 둘로 나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된다. 허물을 벗듯이 페티코트를 벗어버린 무용수는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선다. 뒤에 남겨진 페티코트에서는 또 다른 두 다리가 나오고, 다리는 천천히 무대 왼편으로 걸어가다 사라진다. 그러는 사이 음악은 어느새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 또는 애도하는 듯한 아련한 음악으로 바뀐다. 이때 무용수는 얼굴에 쓰고 있던 꽹과리를 벗는다. 이윽고 이이슬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가 페티코트와 꽹과리를 벗어버리는 행위는 익명성과 감정이입의 극대화에서 더 나아가 베일에 싸인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사각지대 속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여론화되고, 뒤이어 사회의 핫이슈로 부상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페티코트 아래에서 드러난 두 다리,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데다, 신체 일부와 인격이 없는 두 다리는 회피하고 싶은 이슈, 곧 기피와 혐오의 대상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이이슬은 이처럼 오브제를 활용해 본질을 은폐했다가 후에 이를 들춤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온 사회의 환부와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낸다. 페티코트를 벗는다는 행위와 꽹과리를 벗는다는 행위는 숨겨져 있던 피해자성을 거부하고, 은폐의 시도로부터 탈주하여 사건을 직시하고 폭로하겠다는 적극적인 무언의 저항 행위로 보인다. 안무가의 의지 표출과 함께 극은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이이슬 '오라' ⓒ김경동
이이슬 '오라' ⓒ김경동

얼굴과 두 다리를 드러낸 무용수는 빠른 박자의 꽹과리 소리, 혹은 구슬픈 아쟁 연주나 소리꾼의 소리에 맞춰 눕거나 앉고 돌거나 뛰면서 무대 공간을 누빈다. 숙련된 완급 조절 능력을 발휘해 때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이때 얼굴에서 손으로 옮겨 온 꽹과리는 익명성이 수용한 다양한 관객들, 곧 불특정 다수가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불행과 불운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무용수의 손에서 빙빙 돌다가 멈추는 꽹과리는 확률에 따라 관객에게 앞 또는 뒷면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의 불행은 이처럼 어쩌다 마주하는 우연처럼 예고 없이 찾아옴을 말해주는 듯하다. 원형의 반사체와 손잡이, 조금 뒤에 등장하는 꽹과리채는 무용수의 움직임, 조명, 음악 효과와 서로 어우러지고 호응하며 인간 존재의 수렴과 발산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멀리 밀어내보아도 곧 다시 무용수의 손에 쥐어지는 꽹과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 곧 지뢰밭처럼 사건 사고가 내재한 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행복을 좇아도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사고, 죽음과 함께 드러나는 인간의 유한함은 불안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문명인의 실존 그 자체이다.

작품 전반부가 은폐와 절제된 움직임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이입을 유도했다면 작품의 중반부부터는 긴밀하게 이어지는 움직임과 오브제, 음악과 조명이 관객에게서 강렬한 ‘감응’을 끌어낸다. ‘감응’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새로운 것과 마주하며 느끼고 반응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근대가 규정한 이성 중심의 주체성을 거부하고 신체와 감성의 영역에서 자연과 세계를 포착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력을 감응이라고 보았다. 춤과 샤먼의 세계는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감응의 대상에 가깝다. 씻김굿을 모티브로 작품을 끌어가는 무용수의 몸짓은 샤먼의 그것과 닮아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감정을 터치한다. 즉 이이슬은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해결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비통함을 샤먼의 몸짓을 재현한 영적 의식으로 위로하고 그들을 방관한 사회의 부조리를 미신적인 세계관으로 반추하게 만든다. 이로써 관객은 애써 잠재우던 문제의식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자각한다. 이이슬이 무대에서 시도한 ‘원통한 영혼들과의 소통’은 결과적으로 칠흑 같은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비춘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감정을 슬픔과 기쁨 두 가지로 요약했듯이 <오라>의 무대에는 지독한 슬픔과 카타르시스, 갈등이 해소되는 듯한 해방감이 함께 감돈다. 즉 인간 심리의 어둠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이 가질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충실히 보여주었다.

이이슬 '오라' ⓒ김경동
이이슬 '오라' ⓒ김경동

특히 이이슬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새벽 여명을 깨우듯 꽹과리를 치며 춤추기 시작하면 무대는 응어리진 마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다. 동시에 이를 껴안는 ‘샤먼 이이슬’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그녀의 꽹과리 연주에 이끌리듯 등장한 소리꾼은 무대 왼편 빛이 비취는 사다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 순간 하늘에서 여러 개의 꽹과리, 엄밀히 말하면 다양한 형체의 금속 반사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바텐(batten)이 내려온다. 무용수가 자신이 갖고 있던 꽹과리를 함께 매달면 둥근 반사체들이 하늘로 올라간다. 조명에 반짝이는 금속체들이 흡사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된 영혼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또는 한을 풀거나 애도할 목적으로 서낭당에 숱하게 매단 소원물(所願物) 같다. 소리꾼은 사다리 위에 걸터앉아서 한 서린 목소리로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왜 죽었단 말이오.” 노래하며 영혼들을 위로한다. 이때 이이슬의 춤사위가 이승과 저승을 나누듯 노란 조명을 두 줄기 빛으로 가른다. 그가 마치 저승 문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리꾼의 애잔한 소리와 함께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향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언어처럼 비통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이슬은 죽은 영혼에 빙의된 듯 빛 속에서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눕거나 걸으며 항변하는 듯 움직이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두 손 가득 받아쥔다. 그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듯 응시하고 빛은 이내 두 손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이는 이이슬이 정성스러운 춤사위로 지내준 위령제 끝에 영혼들이 드디어 이 땅의 모든 미련을 떨치고 하늘로 올라갔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이이슬 '오라' ⓒ김경동
이이슬 '오라' ⓒ김경동

춤사위가 사그라들고 불이 꺼진 무대에는 소리꾼의 구슬픈 탄식만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못다 살아낸 삶을 향해 품는 연민과 슬픔, 또는 남은 이들의 고뇌와 애도가 담긴 듯한 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엔딩 신이다.

<오라>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잊었다 싶으면 어느샌가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특별한 작품이다. 공연을 볼 때마다 ‘<오라>의 탁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큰 무대 공간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고 날렵하며 아름다운 춤선인가?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로움인가? 주제의식의 독특함인가? 모두 아니다. 동시에 모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대답은 한 무용가의 작은 체구에서 피어오르는 강인함과 섬세함일 것이다. 춤꾼 이이슬의 잔잔한 움직임은 응축과 응결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연출 방식을 힘입어 거센 파동처럼 관객의 가슴속을 자연스레 넘나든다. 바로 이러한 힘이 보는 이들을 감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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