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11] 변신을 거듭한 신무용 '검무'
[신무용 다시보기-11] 변신을 거듭한 신무용 '검무'
  • 김영희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7.2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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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 신무용 작품들은 대개 근대 이전, 즉 전통문화예술 유산들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전통춤 종목 자체를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으로는 <장고춤> <무당춤> <가사호접> <검무> <장검무> <학(鶴)> <소고춤> <화관무> 등이 있고, 전통사회의 인물을 묘사한 <에헤야 노아라> <신노심불로> <봄처녀> <초립동> <목동과 처녀> <사당패> <화랑의 춤>이라든가, 고전을 소재로 삼은 <천하대장군> <춘향조곡>이 있다.

또 사찰의 불상에서 종교적 영감을 받고 창작한 <보살춤>과 전통음악을 모티브로 한 <세 가지 전통적 리듬> <아리랑 선율> <산조>가 있고, 전통의 생활도구를 소재로 창작한 <부채춤>도 그러하다. 신무용 작품들은 단순히 몇몇 조선춤을 현대화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진 우리의 문화유산들과 주변 인물들의 인생사에서 펼쳐졌을 여러 장면들에 착안하여 작품화되었다. 당시 관객들은 이러한 작품들에 정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신무용이 발흥한 20세기 전반기에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전통의 문물(文物)과 생활방식이 아직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무용 작품 중 초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여러 변화를 겪은 레퍼토리가 있다. 바로 검무이다. 당시 권번에서 승무와 함께 기생들이 추었던 전통춤 ‘검무’와 같은 제목의 <검무>는 1934년 동경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최승희의 1회 발표회에서 초연되었다. 최승희는 이 춤을 계속 공연했고, 자신의 검무에 대해 “타악 반주로 추는 용장(勇壯)한 춤이다. 유래로 조선의 검무는 신라시대의 용장, 조선의 木村長門守라고 할만한 황창(黃昌)의 영웅적 행위를 찬미해서 만든 용장한 무용이었던 것을, 기생의 손으로 유장섬약(悠長纖弱)한 여성적 동작으로 변해졌던 것이다. 최여사는 처음의 자태로 복귀시키어, 검무 본래의 면목을 발휘하려고 창작한 것이다. 쌍수에 단검을 갖고 추는 장용(壯勇)한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최승일, 『최승희 자서전』, 이문당, 1937. 150쪽.) 본래 신라 화랑 황창의 영웅적 행위를 찬미해서 만들어진 용장한 춤이었으나, 기생에 의해 유장섬약한 여성춤으로 변한 검무를 화랑의 기개를 담은 모습으로 복귀시키겠다고 작품 의도를 밝힌 것이다.

당시에 추었던 <검무> 사진을 보면 뿔이 달린 관을 썼고, 바지 차림에 코가 뾰족하게 올라간 황금색 신발을 신었다. 쾌자를 입고 허리에 띠를 묶었으며, 기생의 검무 도구와 같이 칼날이 돌아가는 검기(劍器)를 양 어깨에 걸쳤다. 왼쪽 어깨가 올라가고 왼 다리를 들어올려 운동감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기생이 추었던 검무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최승희 안무 검무(1934)
최승희 안무 '검무'(1934)

최승희는 <검무>를 미주 공연에서도 추었다. 1938년 2월 2일 로스앤젤레스의 이벨극장에서 추었는데, 공연 후 재미교포 신문이었던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무장(武裝)을 하고 검을 들고 나올 때에 눈에서 영취(靈鷲)가 돌고 정신이 발발하여 검을 내여 두를 때에는 그 소리에 관객의 정신까지 어지러워지고 맘속까지 서늘하여지는 기분적 춤이었다."(『신한민보』 1938년 2월 10일). 무인의 복장을 하고 추는 최승희의 <검무>에 검기(劍氣)가 충만했던 것이다.

세계일주 공연 후 1942년에 추었던 최승희의 <장검무>는 전혀 다른 정조를 보여준다. 바지가 치마로 바뀌었고, 단검이 장검으로 바뀌었다. 족두리를 쓰고 한삼을 날리며 장검을 휘두르는데 미소를 띠고 분위기는 화사하다. 조선시대 기생이 추었던 검무를 재창작했다고 했으니, 여성춤으로 캐릭터가 바뀐 것이다. 최승희 특유의 여성미를 강조하였으며, 명랑하고 밝은 스타일이다.

최승희 안무 '장검무'(1942)

최승희의 검무는 한 번 더 변신했는데, 안성희에게 안무해준 <장검무>이다. 의상은 중국의 경극 <패왕별희>에 나오는 우미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풍 의상으로 잘록한 허리에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양 손에 장검을 쥐었다. 해방 전후 중국춤을 연구한 최승희가 중국의 검무를 참고하여 새롭게 창작한 춤이다. 안성희가 추었던 <장검무>는 북한 국내외에서 수 차례 공연되었고, 이후 북한에서 만든 무용극들에 인용되었다.

또한 최승희의 제자로 1‧4후퇴 당시 월남한 김백봉(1927-2023)과 전황(1929-2015)도 검무를 추었다. 김백봉은 서울 정착 후 1955년 시공관에 올린 공연에서 <검무>를 독무로 선보였다. 당시 사진에 의하면 2개의 장검을 들었고, 의상은 허리에 띠를 맸으니 안성희가 추었던 <장검무>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북한에서 최승희 문하에서 보았던 검무를 토대로 춘 듯하다. 그런데 김백봉 검무의 특징은 군무로 춘 <섬광(閃光)>에서 볼 수 있다. 무예를 닦는 무인들의 기백(氣魄)과 그 속에 깃든 기혼(氣魂)의 이상경(理想境)을 하나의 격의 경지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설명했으며, 음악은 도드리, 타령, 잦은타령이다. 16명의 무용수가 2열로 무대를 가로지른 대형에서 팔을 사선으로 들며 춤추다가 무대 앞으로 나와 단검을 잡고 칼을 빠르게 돌리며 창!창! 소리를 내는데, 이 음향 효과는 관객을 집중시킨다. 곧 무대 중앙에서 장검을 든 독무자가 등장하면 중앙에서 장검을 돌리거나 찌르는 동작을 하고, 군무는 여러 대형을 만들었다가 원을 만들어 긴박하게 칼을 돌리며 크게 돈다. 연풍대 동작을 재구성한 것이다. 무구는 전통 검무의 것이지만, 의상은 신라풍이다. 상체를 반듯이 들어 좌우 사선으로 팔을 곧바로 벌리거나 무대의 좌우를 대칭으로 사용하고, 중앙의 독무 무용수를 중심으로 안무했다. 동작의 기법이나 액자 무대를 전제로 한 구성들은 전형적인 신무용 스타일이다.

김백봉의 '검무' (사진제공=김백봉춤연구회)
김백봉 재안무의 '격(格)' (사진제공=김영희춤연구소)

그리고 김백봉은 1934년에 최승희가 추었던 검무를 <격(格)>이라는 제목으로 재현했다. 의상의 디테일은 조금 변했지만, 뿔 달린 관과 황금 신발, 단검은 그대로이다. 전반부 터벌림 장단에서 동작은 분절적이며 절제되어 있다. 칼몸이 돌아가는 무구지만 칼손잡이와 칼몸을 붙여잡아 사용하다가 후반부 타령장단에서 칼을 자주 돌리며 춤춘다. 가로로 건너뛰는 동작을 하거나 기마자세로 포즈를 잡기도 한다. 안나경(김백봉춤연구회 이사장)이 <격>을 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최승희가 처음에 추었던 검무를 가늠할 수 있다.

전황은 북한의 최승희무용연구소를 1947년에 입소하여 최승희 무용을 사사하고 여러 공연에 참여했으나 이후 월남했다. 국악계와 무용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했으며, 1964년 전황민속발표회에서 <검무>와 <항우와 우미인>을 발표했다. 이후 2인 구성의 <쌍검무>를 공연했는데, 장검을 쌍수로 잡고 추는 춤이다. 김지원과 백선희가 출연했다.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고 창, 검을 들고 승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여인들의 강인한 심적 내용을 표현했다고 한다. 전황의 <쌍검무>는 최승희의 <장검무>에 닿아 있으며 여인의 캐릭터를 배경으로 한 극(劇)적 설정이 보인다. 김영희춤연구소가 2017년에 기획한 ‘검무전IV’에서 재연한 바 있다.

전황의 '쌍검무' (사진제공=김지원)

한순옥(1932-2022)도 검무를 추었는데, 최승희무용연구소의 3기 제자였다. 월남 후 부산에서 활동했으며, 1962년 설립된 국립무용단의 주역 무용수였다. 여러 검무를 추었는데, 1975년 국립극장이 주최한 민속제전에서 검무를 독무로 추었다. 또 1993년 국립무용단 공연에서 검무의 군무 작품인 <전승>을 안무하였다. 한순옥의 <검무>는 늦은타령과 잦은타령으로 추지만, 전통춤 검무와는 다른 구성틀을 갖고 있는 신무용 작품이다. 여러 위치에서 다양하게 칼을 돌리며, 현재 양승미로 이어지고 있다.

전통무용가 이매방(1926-2015)이 춘 <장검무>도 있다. 중국 다이렌(대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경극에서 보았던 장검무를 기억하고 창작했다고 했다. 신무용이 대세였던 1950-60년대에 이매방도 흐름에 따라 신무용 검무를 만든 것이다. 의상은 중국풍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머리에는 꽃잎 모양 관을 썼고, 장단은 선부리, 엇모리, 동살풀이이다. 신무용 양식의 작품으로, 장검을 X자 모양으로 엇갈려놓고 잔걸음하는 발동작이 특이하다. 다른 신무용가들의 검무에도 없고 전통춤 검무에도 없는 동작이다. 1990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이매방 전통무용공연 북소리Ⅲ’ 공연에서 이매방이 직접 출연했고, 이후에는 여성 제자들이 추었다.

그 외에 주리(1927-2019)가 검무를 발레로 시도한 <흑의(黑衣)의 단검>(『경향신문』 1955년 11월 30일)이 있었고, 김순성은 동경문화회관에 올린 무용발표회에서 검무를 창작했다. ‘검무를 위한 세 개의 장면’이라는 타이틀에서 <화관무> <궁정검무> <현대화된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63년 2월 24일). 이 검무 작품들에 대한 사진이나 리뷰가 있다면 상상해볼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신무용으로 추었던 검무는 20세기에 이렇게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외에 여러 신무용가들이 검무를 추었을 것이며, 무용극이나 창극 등에서 추었던 검무도 있었을 것이다. 신무용 검무 작품들이 다양하게 변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검무의 역사가 깊고 검무로 풀어낼 수 있는 콘텐츠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안무한 <검무>에서 매우 모던한 디자인의 의상을 입었지만 칼몸이 돌아가는 전통춤의 검기(劍器)를 그대로 썼다는 점, 김백봉이 안무한 군무 <섬광>의 의상이 신라 화랑의 복색인 점, 전황이 안무한 <쌍검무>는 전장으로 남편을 보낸 여인이라는 설정이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상의 검무 작품들은 신무용 춤 기법과 무대 구성방식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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