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시대가 달라도 음악의 감동은 영원히 – '경성의 동백아가씨'
[공연리뷰] 시대가 달라도 음악의 감동은 영원히 – '경성의 동백아가씨'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4.05.23 09: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울시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춘희'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춘희' (사진제공=서울시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서울시 오페라단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주인공이 자결하는 엔딩의 <투란도트>로 충격을 안긴 데 이어 최근에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시대를 일제강점기 경성으로 이동시킨 것. 지난 4월 25-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페라 <춘희>라는 타이틀로 <라 트라비아타>가 올려졌다. 1948년 1월 6일 명동 서울시공관에서 초연되었을 때의 제목 그대로다.

시대적 배경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캐릭터도 변화했다. 가스통 자작은 조선의 왕족이자 지하의 독립군 조직 수장으로, 비올레타와 플로라는 기생 신분의 독립운동원으로, 그리고 뒤폴 남작은 친일파로 등장한다. 가스통은 비올레타에게 지방 부호의 아들인 알프레도를 유혹할 것을 종용한다. 그의 집안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비올레타는 임무를 위해 알프레도에게 접근하지만 알프레도의 순수한 구애에 감동하여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나라와 조직을 뒤로 하고 경성을 떠난 비올레타와 알프레도.

제르몽이 찾아오고 비올레타는 경성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친일파 뒤폴과 알프레도의 결투에서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려 총을 맞고 죽어간다. 폐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던 여인을 생각했다가 깜짝 놀랄 결말이었다.

비올레타를 강인한 여인으로 설정한 점이 신선했다. 오래전 드라마 <경성 스캔들>에서 한고은이 연기했던 차송주가 떠오르기도 했다. 비록 기생이지만 독립을 위해 일하고, 사랑하는 이를 구하고자 대신 총을 맞는 여성이었기에, 기존의 가련한 희생양 이미지가 아닌 진취적인 비올레타로 재탄생한 것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춘희' (사진제공=서울시오페라단)

혹자는 연출이 어색했다고 말한다. 비올레타가 총상으로 죽는 엔딩도 억지스럽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설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이 다 한 무대였다. 베르디의 음악 자체로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적이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극장 솔리스트로 활약 중인 소프라노 이지현이 비올레타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023 우승자인 테너 손지훈이 알프레도를, BBC 카디프 콩쿠르 이후 유럽과 메트 무대를 누비는 바리톤 김기훈이 제르몽을 노래했다. 세 사람의 노래와 연기력도 최강이었고 그들의 호흡도 최고였다. 여자경이 지휘하는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섬세하고 절묘했다. 비극을 예고하는 듯한 서곡이 안개처럼 깔릴 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지현은 비올레타의 아리아 ‘이상하군, 이상해... 아, 그이였던가’에서 아주 단단한 호흡으로 소리의 길을 열었다. 비올레타의 번민과 갈등은 한숨으로, 망설임으로, 호기심으로, 설렘으로 갈래를 뻗어나가다 치솟는 열정으로 차올랐다.

2막에서 비올레타와 제르몽의 대화 장면도 눈물샘을 자극했다. 제르몽이 젊은 바리톤일 경우 부성애보다는 이기적인 강자로 비추어지기 쉬운데, 김기훈은 아주 노련하게 완급을 조절했다. 양반과 기녀라는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며 위압적으로 등장했다가 인간적인 연민으로 비올레타를 바라보게 되는 세밀한 변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비올레타는 연인의 가족과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지현의 발성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마음을 울리는데, 비강을 울려 말하듯 토해내는 대사가 특히 좋았다. 3막에서 제르몽의 편지를 읽을 때 그녀가 들려준 pp의 음색과 오케스트라의 에코같은 울림은 슬픔을 곱절로 증폭시켰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춘희' (사진제공=서울시오페라단)

손지훈의 음색과 표현력도 발군이었다. 아리아 ‘그녀와 떨어진다면 내게 기쁨 없으리’를 부르며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청년의 모습에 관객도 설레다가, 2막 후반에서 배반의 고통과 질투로 미쳐버린 어리석은 남자를 볼 때는 안타까움에 탄식이 나왔다.

3막, 죽음을 기다리는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가 나타나 함께 부르는 ‘파리를 떠나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의 노래였다. 알프레도는 애달프게, 비올레타는 힘을 완전히 뺀 채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꺼져가는 심장 박동 소리처럼 들렸다.

경성 시내에 눈이 내리고, 비올레타는 “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요! 오, 이 기쁨!” 하며 쓰러졌다. 하늘에서 눈이 펑펑펑 쏟아졌다. 아름다운 풍경과 북받치는 슬픔이 대조를 이룬 엔딩이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춘희' (사진제공=서울시오페라단)

이지현, 손지훈, 김기훈. 이날의 주역들이 세계 정상급 성악가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마에스트라 여자경의 역량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에 따라 소리가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이날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는 촘촘한 디테일과 거대한 감정을 아우르는 베르디 음악의 힘을 보여주었다.

기존에 <라 트라비아타>를 보았을 때 느끼던 여인의 가련함, 약자의 희생 같은 것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음악의 감동에 빠져들었던 무대였다. 베르디, 나를 제대로 울리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