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숲 속에서 일어난 꿈, 마법, 사랑, 비밀의 하룻밤
[공연리뷰] 숲 속에서 일어난 꿈, 마법, 사랑, 비밀의 하룻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4.05.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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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한 여름밤의 꿈'
국립오페라단 '한 여름밤의 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국립오페라단이 올해 국내 초연 3부작을 시도하고 있다. 첫 번째가 지난 2월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었고 두 번째 작품이 지난 4월 11-1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려진 <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두 작품 모두 국내 초연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뛰어난 퀄리티로 대중에게 유쾌하게 다가간 무대였다.

1595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한 여름밤의 꿈>은 1960년 벤저민 브리튼의 현대 오페라로 영국 알데버러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다. 현대 오페라로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국립오페라단의 무대는 독일 출신의 지휘자와 연출가, 무대와 의상 디자이너들이 함께 했다. 뮌헨대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연출가 볼프강 네겔레는 ‘숲’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으로 표현했다.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등장할 때마다 다른 시대의 복장을 보여주어 시간을 초월한 존재임을 증명했고, 4명의 인간 연인들은 완벽히 현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관객의 빠른 이입을 도왔다.

브리튼은 카운터 테너를 오베론으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티타니아로 설정했다. 높은 음색으로 요정의 왕과 여왕이라는 신비로운 아우라를 주려 한 것이다. 오베론을 맡은 제임스 랭은 이번이 여덟번 째 오베론 역할이라고 한다. 첼레스타의 반짝이는 음색과 더불어 ‘Welcome, wanderer, I know a bank’를 부를 때 제임스 랭은 몽환적인 느낌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숲 속에 존재한 모든 이들은, 그리고 그들을 보고 있는 관객들조차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인셉션>처럼 깊게 빠져들어갔다.

국립오페라단 '한 여름밤의 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처음 등장했을 때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차림새도, 그들의 집 구조도 지극히 평범했다.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두 칸 집에서 만사가 권태롭고 못마땅한 노인 부부의 티키타카를 보고 있자니, 위대한 신들의 세계도 사실상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연출의 의도가 읽혔다. 요정들의 왕과 여왕은 중산층 노인 모습으로 등장했다가 셰익스피어 시대의 귀족으로 변신하고, 나중에는 19세기 대영제국 신사의 의복을 입고 나타났다. 또한 티타니아를 모시는 여러 요정들은 1차대전 간호사 복장으로 등장하는 등 시대적 일관성이 전혀 없었는데, 이를 통해 요정들이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하프와 첼레스타, 하프시코드, 벨 등이 요정의 세계를 표현했다.

헤르미아와 라이샌더를 맡은 메조 소프라노 정주연과 테너 김효종의 음색의 합도 아주 잘 맞았다. 두 사람의 이중창은 아름다운 한 목소리 같았다. 희곡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법정 장면은 오페라에서 생략되었으나, 두 사람은 아테네 법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용감한 연인이었다. 헤르미아와 헬레나,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우스의 대립 장면은 연출과 출연진의 연기력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명장면이었다. 너드같은 차림에 스토커로 묘사된 헬레나가 ‘Injurious Hermia!’를 부를 때, 헤르미아가 ‘Puppet? Why so?’를 부르며 서로 비아냥거리는 장면에서 객석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드미트리우스의 바리톤 최병혁과 헬레나의 소프라노 최윤정도 최고의 기량을 펼쳤다.

국립오페라단 '한 여름밤의 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극중극 형식으로 숲에서 연극을 공연한 주민들도 각각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바리톤 박은원은 매력 있는 저음으로 능청스럽게 보텀을 연기해 객석의 웃음버튼이 되었고, 플루트의 강도호도 개성 있는 테너의 음색으로 벨칸토 아리아를 흉내내며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베론과 퍽의 장난으로 보텀에게 반해버린 티타니아가 여러 요정들과 더불어 보텀을 유혹할 때 객석도 함께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환각에 빠져들었다. 티타니아의 방은 처음과 달리 아름드리 나무와 풀이 자라 덮은, 숲과 일체화된 마법의 공간이 되었다.

이날 기대 이상의 열연을 한 캐릭터가 있었으니 바로 퍽이다. 이례적으로 그룹 신화의 김동완이 퍽을 맡아, 고난도의 춤과 영국식 악센트의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퍽은 유일하게 노래하지 않고 대사만 있는 캐릭터인데, 셀러브리티를 출연시켜 보다 대중에게 어필하자는 최상호 국립오페라단장의 아이디어로 섭외되었다. 사실 공연 전에는 김동완의 출연이 브리튼의 오페라가 국내 초연된다는 뉴스보다 더 화제가 되어 주객전도가 아닌가 우려했으나, 이 전직 아이돌이 캐릭터 표현을 위해 얼마나 부단히 연습했는지 작품 속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쾌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퍽은 무대를 휘저으며 분란을 만들었고 웃음 속에 한줄기 메시지를 담아 퍼뜨렸다. 사랑은 이성이 결여된 환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아픔일 수 있으며, 또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국립오페라단 '한 여름밤의 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연출자는 숲이라는 공간을 다각도로 활용했다. 모든 마법이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모든 인간들의 서사도 숲에서 이루어진다. 소시민들의 연극도, 왕족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도, 사랑의 도피도, 마법의 약초가루로 인한 연인들의 혼란도, 그리고 요정과 인간의 꿈조차도. 숲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며, 자유와 상상과 어둠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장소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결말을 찾아가며 해피엔딩이라고 여긴다.

요정의 왕이지만 겉모습은 노인인 부부가 인도 소년을 두고 질투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권태기에 빠졌던 이 요정들이 다시금 사랑을 깨닫는 결말을 보면, 숲에서 밤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고 헤맨 4명의 연인들 – 헤르미아와 라이샌더, 헬레나와 디미트리어스 – 의 노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 고향을 떠나 달아나고, 다른 여인을 연모하는 남자를 좇으며 고백하는 대단한 사랑의 엔딩도 마침내는 아주 오래되고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해지지 않을까. 이따금 찬란했던 한여름 밤의 꿈을 추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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