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3)-카페, 페르난도 페소아, 리스본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3)-카페, 페르난도 페소아, 리스본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5.20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질 좋은 고독을 향유할 권리를 찾는 자에게

페소아 하우스(사진=김윤정)
리노베이션중인 페소아 하우스(사진=김윤정)

카페홀릭의 카페 예찬

[더프리뷰=뒤셀도르프] 우리 동네에 아주 특별한 힙스터 카페가 있다. 그곳은 내가 친밀한 타인들 속에 앉아 무목적적인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오고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는 곳이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빌리자면 시간을 낭비하는 일에는 미학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이 문장으로 인해 나는 죄책감 없이 그 카페에서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어쩌다 가져간 책을 읽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갈 때도 있지만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도 이 카페의 특별한 분위기다.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오가고, 가끔은 옛날 영화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사람들의 독특한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야말로 나에게 그 카페는 언제 가도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이 등퇴장하는 공연장이면서 또한 나만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카페 주인의 센스 있는 세밀하고도 빈티지스러운 듯한 인테리어 감각도 무대 세트로 한몫을 해준다. 카페 문 앞에는 ‘와이파이 없음, 서로 이야기하세요(No Wifi, Talk to each other)’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물론 이 카페는 와이파이가 없다.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작업하는 사람도 있고 반짝이는 구두에 정장까지 갖추어 입고 신문을 읽는 노신사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처럼 책을 가지고 와서 읽기도 하고 젊은 엄마들은 아가들을 앞마당에서 놀게 하고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지역 예술가들(화가, 무용가, 음악가)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카페에서(사진=김윤정)
카페에서(사진=김윤정)

어느 날은 내가 예전에 <레이디 맥베드>라는 무용에 댄서로 출연했을 때 작곡가이며 연주자로 그 멋진 음악을 두 시간이나 되던 공연 내내 라이브로 연주했던 안드레아를 만났다. 너무 오랫만이기도 했고 여전히 그의 강렬했던 음악이 떠오르기도 해서 최근에는 어떤 음악을 하는지 물어보며 웹사이트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니 자기는 이메일도 웹사이트도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3G 폰을 아직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이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추지 않고도 공연음악으로 자신의 일을 지키고 활동할 수 있다니 그것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결국 우리는 지난 공연 연습 중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 작업중인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와 전호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카페라는 공간은 나의 에너지, 취향 또는 케미가 맞아야 하는데 그 카페가 딱 나에게 그런 곳인 것이다. 해가 나면 나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특유의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카페의 반은 이층으로 나뉘어 있고 꽤나 큰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앉아도 아늑하게 해주는 분위기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이유의 하나다. 심지어 커피, 브런치, 케이크 가격도 아주 착한 편이어서 부담도 없다.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이 어떤 날은 하루에도 두세번 이상 들르게 되므로 나 같은 카페홀릭에게는 커피 가격도 은근히 신경 쓰이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과 어떤 공감대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도 이 카페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람이 구름을 흩어놓듯이 마음이 흩어지고 말랑말랑해지는 날, 딱 고정된 부조처럼 카페의 한 구석에 붙어서 자기 안의 타자와 대화하는 정신적 사치의 시간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다.

카페분위기(사진=김윤정)
카페 분위기(사진=김윤정)

페르난도 페소아

나는 가끔 책을 읽으면서 그 작가와 정신적인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즐기는데 모든 책, 모든 작가에게서 느끼는 건 아니다. 내 의식 속에는 있지만 말로는, 글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누군가를 통해 표현된 것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결속감은 얼마나 짜릿한가?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 종이 위에 활자를 통해 열린다는 것 또한 얼마나 경이로운가?

한동안 나는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또다른 의식이 진솔하게 막 써내려간 일기를 읽고 있는 듯한 발칙한 착각을 하며 푹 빠졌었다. 그의 쓸쓸하고 고독한 인생 여정을 함께 나누며 그의 관조 속으로 동화되는 시간들을 그 카페에서 보내곤 하였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이미 몇 번이나 읽었지만 무인도에 딱 한 권의 책만 가지고 가야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책을 가지고 갈 것이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사진=김윤정)
페소아의 <불안의 서>(사진=김윤정)

카페에서 서빙하는 젊어 보이지만 수염을 기른 친구가 커피를 가져다주고는 잠시 내가 접어놓은 책 표지를 보고 단번에 어, 페소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어딘지 독일사람 같지 않아서 혹시나 페소아의 언어로 읽었을까 해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스페인에서 왔다고 한다. 그럼 넌 스페인어로 읽은 거야? 나는 한국어로 읽었는데. 우리는 페소아가 쓴 포르투갈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읽고 팬이 되는 공감대 형성이 된 것이다. 거기다 나의 파트너 베안트도 독어로 읽은 독자로서 우리는 페소아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페소아와 베안트는 너무 다른 성향, 너무 다른 성격의 사람 같은데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쓰고 있더라고 말한다.

어? 분명 페소아는 나의 감성으로 내가 하고픈 말을 하던데? 그 젊은 스페인 친구도 그렇게 느끼며 읽었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의 이면에는 아마도 각자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페소아는 자신의 수많은 분신들인 이명(異名)으로 모든 글을 썼으니 얼마나 많은 페르소나가 내재해 있었겠는가? 그 자신 안에 내재된 타인들이 살아 있는 그의 글 속에서 서로 다른 우리가 각자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잠시 페르난도 페소아(1888-1935)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넘어가겠다.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잠시 어린 시절을 빼고는) 생을 마감하도록 리스본을 거의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신문사에서 번역자로 일하며 시, 비평, 에세이, 희곡, 정치평론, 영화 시나리오, 광고카피, 탐정소설 등 장르 불문하고 왕성하게 글을 썼지만 스스로는 시인으로 불려지길 원했다고 한다. 생전에는 단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한 무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썼는데 100여 명에 달하는 가상의 작가를 창조하고 제각각의 정체성으로 그 필명으로 글을 썼다. 각 이명마다 출생지, 성장배경, 교육, 직업이 다른 인물을 설정해 두고 그에 따른 다른 문체와 다른 주제로 글을 썼다고 한다. 사후 그의 집에서 발견된 ‘불안의 서’라고 철해진 상자 안에서 삼만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와 메모들이 발견되었고 그의 유고 더미에서 발견된 원고들을 정리하여 사후 47년이 지나서야 <불안의 서>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지금도 방대한 양의 그의 글들의 분류와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페소아가 쓴 리스본 가이드북(사진=김윤정)
페소아가 쓴 리스본 가이드북(사진=김윤정)

페르난도 페소아는 그렇게 재조명 받으면서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변방의 포르투갈 문학을 유럽 모더니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작가로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세계적인 문학평론가 헤럴드 블룸(Herold Bloom)은 서양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의 목록에 페소아의 이름을 올려놓았고, 미국의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 작가 조이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지닌 위대한 시인으로 평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철학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철학은 최소한 아직까지 페소아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 사고방식은 아직도 페소아를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까지 페소아를 칭송한다.

페소아와 나의 결속감

-열정이 배제된, 고도로 다듬어진 삶을 살기. 이상의 전원에서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며, 그리고 글쓰기를 생각하며, 권태에 근접할 정도로 그토록 느린 삶, 하지만 정말로 권태로워지지 않도록 충분히 숙고된 삶.

-나는 고대인과 현대인이 고요히 공존하는 지적인 삶을 꿈꾼다. 그 안에서 낯선 감성을 통해 내 감성을 새롭게 하고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로, 사상가들과 유사 사상가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모순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단 한 번도 변함 없이 지속되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영혼의 본질에 침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파고드는 격정을 느끼지 못했다. 내 안의 모든 요소들은 항상 어디로든 향하고 있으며 뭔가 다른 것으로 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

-나는 늘 고독하게 살았다. 고독하면 고독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생동안 나는 형이상학적 무였으며 내 진지함은 가소로웠다.

-나는 현실을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삶이 나에게로 왔고, 나를 발견해 버렸다.

-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향한 그리움보다 더 괴로운 감정은 없으리라.

-비 오는 오후, 나의 고독이 자리를 잡는다.

위의 글들은 결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페소아의 문장은 아니다. 그의 책 속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을 고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 순간순간 가슴에 절절하게 꽂히는 문장들이 시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페소아의 글을 빌리자면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일시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이 글을 쓰는 이 오후 이 순간에 꽂힌 문장들이라고 해야겠다.”

책 속에 활자로 된 어떤 글자들이 또는 한 줄의 글이 이토록 나를 요란하게 흔들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늘 정체된 글자 속에서 감동을 받고 있는 나는 몸으로 움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일을 평생 하고 있다. 이 간극은 무엇일까? 라고 나는 나의 일기장에 쓴 적이 있는데 페소아의 글 속에도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 몸과 활자 사이의 공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페르난도 페소아 동상(사진=김윤정)
페르난도 페소아 동상(사진=김윤정)

그의 글은 어떤 메시지도 교훈도 특별한 철학도 없다. 그저 한 인간의 의식이 흐르는대로 느끼고 사유하는 것들을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강렬하게 몰아친다. 열광적으로 빠지게 한다. 그런데 그의 글 속에 “광적인 것에는 저속함이 있다”라고 쓰여 있네. 이 또한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내가 광적으로 빠질 때 딱 느끼는 불편했던 감정이었다. 나는 사실 너무 감성적이다. 그런 나를 보이는 게 싫어서 필사적으로 싸울 때가 종종 있는데 너무 감성적이 되거나 열광 적이 될 때 그것은 왠지 진실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살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글쓰기는 나의 두번째 글에서 말했던 하이데거의 ‘내던져진 존재’에 나오는 ‘오로지 존재하기 위한 행함’과 연결되어 보인다. 나에게 <불안의 서>는 아마도 전생에 또는 그 전 머언 과거 어딘가에서 무척이나 외롭게 살았던 한 삶이 나에게 온 듯한 상상력으로 집중하게 한 작품이었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피상적인 삶과 깊은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는 것들, 그 간극의 세계를 관조한다. 그리고 그의 영혼의 비밀들이 아포리즘적으로 펼쳐지면서 어떤 형식에도 매이지 않는 열린 형식을 취한다. 페소아는 절절하게 그 자신의 고독과 삶의 고통에 관해 거의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행복에 관한 서술은 단 한 마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고독과 불행을 깊게 사유하며 즐기고 있었는지 온 감각으로 그냥 알 수가 있다. 니체는 “스스로 경멸할 줄 아는 자는 스스로를 경멸할 줄 아는 그런 자신을 존경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페소아가 그랬을 것 같다.

이토록 자신의 삶의 고통을 열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이토록 인생의 덧없음을 비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페소아의 부정적인 관조와 깨달음은 묘하게도 나에게는 긍정의 힘을 실어준다. 모든 사물을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내면과 너무나 잘 결속한다.

나는 페르난도 페소아, 그리고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같은 사람들의 삶을 찬미한다. 적어도 자신의 이상, 그리고 삶의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결한가?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삶, 사진을 찍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삶, 살아 생전에 작가로 인정 받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채 그 고독을 견디고 그렇게 은밀한 자신의 열정을 작품으로 남기고 사라져간 그들의 삶 말이다. 사후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눈부신 작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아름다움은 도저히 그냥 사라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종종 나는 서글픈 유쾌함으로 생각해 본다. 언젠가 더 이상 내가 살아 있지 않을 미래에 내 글이 칭송 받고 길이 읽히게 될 날을... 하지만 그때까지는 너무도 멀고, 이미 한참 전에 나는 죽은 몸일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 번역의 의무를 부여 받았고, 그에 따라 우리 세계의 일부분을 번역해온 것이라고, 그러면 그들은 내가 일생 동안 이해 받지 못한 자였으며 불행하게도 거부와 냉담의 한가운데서 살았고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그렇게 기록할 것이다.“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책 한 권 출판되지 못하고, 내 시구들이 인쇄된 모양이 어떤 건지 보지도 못한다면, 내 사정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염려 말라고. 그런 일이 생겼다면 그게 맞는 거다. 나의 시가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은 거기 있으리. 하지만 아름다우면서 인쇄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뿌리들이야 땅 밑에 있을 수 있어도 꽃들은 공기 중에서 그리고 눈 앞에서 피는 거니까.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 아무것도 그걸 막을 수 없다.“

라는 페소아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또 하나의 문장이 가슴에 박힌다. “나는 어느 추운 하루처럼 맑고 슬펐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다.

리스본 여행

나는 드디어 아주 우연하게 페소아가 스스로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리스본을 여행하게 되었다. 리스본은 그가 평생 살았던 곳임과 동시에 관조의 대상이며 그의 전 세계이면서 그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 된 친구가 있는데 이십대 때는 정말 용감하게 여행을 많이 다녔던 우리가 각자 아이 키우고 일하느라 둘만의 여행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었다. 그러다가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조금 여유도 생겨서 정말 오랜만에 예전처럼 단둘이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지난 2019년 7월, 목적지는 우선 각자 가고 싶은 장소의 순위를 정하고 둘 다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당첨된 곳이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덩실덩실 춤까지 추면서 신나했다.

우리는 리스본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먼저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하루씩 돌아가면서 상대방의 결정을 따라주기로 했다. 그리고 하루 정도 각자의 시간을 맘껏 자유롭게 즐기자고 했다.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아주 즐거운 존재함이다. 여행이야말로 존재론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여행지에서는 어차피 돌아가야 하기에 소유하고 어떤 자리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 인생도 언젠가는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이다. 마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소유하고 어떤 위치에 가고 싶어 하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그런 소유함의 목적에서 자유롭게, 단지 존재하면 된다. 여행의 규칙은 돌아갈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리스본에 도착해서 일단 테주(Tejo)강이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경치를 마주하고 천천히 저녁을 먹으면서 밀린 여자들 이야기로, 잠시 여행을 왔다는 것을 잊을 만큼 수다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계획을 세웠다. 우선 나는 페소아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을 개조해서 뮤지엄이 된 페소아 하우스를 보고 그가 들르던 카페를 가보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가 가고 싶은 곳을 함께 다니며 맛난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천천히 리스본을 음미하고 다닐 수 있으면 충분했다.

리스본 풍경(사진=김윤정)
리스본 풍경(사진=김윤정)

소멸하는 불멸의 오후, 우수에 잠긴 냉담한 저녁

우리는 둘째날 드디어 트램을 갈아타고 페소아의 집을 향해 언덕길을 걸었다. 팔구십년 전 매일 아침 저녁으로 페소아가 사유하며 걸었을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유유히 걸었다. 낯선 거리, 낯선 풍경을 극도로 싫어했던 페소아. 낯선 리스본 거리를 걸으며 그를 느낀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했다. 사실 그렇게 낯설기만 하지도 않은 것이, 그의 책 속에 수도 없이 나오는 도라도레스 거리를 상상했었기 때문이다.

리스본 거리에서(사진=김윤정)
리스본 거리에서(사진=김윤정)

상상은 누군가 상상할 때 살아있게 된다고 하는데 그 상상의 거리를 내가 실제로 걷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웹사이트에는 정상적으로 열려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도착해서 보니 페소아 하우스는 수리 중이었고 내년에 다시 연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안타까워 밖에서 보이는 수리중인 집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페소아의 글처럼 소멸하는 불멸의 오후, 그리고 고요한 도시에 고인 저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페소아 하우스 주변을 걸었다. 그야말로 우수에 잠긴 냉담한 저녁이었다.

예술가들의 성지 같은 카페 브라질리아(사진=김윤정)
'예술가들의 성지' 카페 브라질리아(사진=김윤정)

그리고 하루는 페소아와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카페 브라질리아에 들렀다. 옆 테이블에 멋쟁이 중년의 여자가 커피를 마시며 포르투갈어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포스가 분명히 나같은 관광객은 아니었다. 카페 앞에는 페소아의 동상이 앉아 있었고, 나는 그야말로 관광객의 모드로 그 옆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언가 너무나 피상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의 경외심은 깊었다. 리스본의 명소들을 다 지나간다는 그 유명한 28번 노오란 트램을 타고 그라사 전망대에 올라 울긋불긋한 지붕들의 리스본이 한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하루여 흔들리지 말고 네 종말을 향해서 걱정 말고 가라. 이 쓸모없는 오후의 멜랑콜리여!”라는 페소아의 구절이 떠올랐다.

리스본 명소들을 순례하는 28번 트램(사진=김윤정)
리스본 명소들을 순례하는 28번 트램(사진=김윤정)

그리고 벨렘지구에 있는 베라르두 국립현대미술관(Museu Coleção Berardo)을 돌아봤는데 반갑게도 미술애호가 베안트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화가 외젠 르루아(Eugène Leroy)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우리 집 거실 중심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보니 신기하기도 해서 사진을 찍었다. 두터운 물감이 흘러내릴 듯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그의 작품들은 빛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형상들이 특징이다.

베라르도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외젠 르루아의 작품(사진=김윤정)
베라르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외젠 르루아의 작품(사진=김윤정)

리스본 여행중에는 물론 내 친구가 원하는 곳도 함께했다. 파두가 유명하다는 바에 들러 멜랑콜리한 포르투갈 가요도 듣고, 전망 좋은 안락한 카페에 나란히 앉아 나는 무언가를 끄적이고 학교 선생님인 그녀는 수업을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며 책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하는 시간도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꽤나 활동적인 그녀답게 카약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대서양에 가서 수평선을 보며 카약을 배우고 종일 카약을 탔다.

나는 솔직히 생각보다 그 좁은 카약에 달랑 노를 저으며 바다로 나가는 것이 너무 무서웠지만 꾹 참고 함께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친구도 강이나 호수에서는 카약을 타봤지만 바다에서 하는 건 생각보다 무서웠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찌나 바다 물결과 바람이 센지 저어도 저어도 육지에서 멀어져만 가는 게 얼마나 아찔하던지, 옆에 프로 카약 지도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난파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 날 온몸이 뻐근한 게 팔근육이 아팠다. 나와는 다른 친구의 취향을 공유하는 새로움도 나름 즐거운 추억이 되었고 심지어 이제는 카약을 보면 오히려 꼭 타고 싶어질 정도가 되었다.

거리마다 예쁜 기념품 가게는 온통 다양하게 디자인화된 페소아의 모습이 리스본을 상징하는듯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저 세상에서 페소아는 자신의 얼굴이 이토록 상품화되어 팔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무어라 생각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나 많이 널려 있는 것들을 보며 단 한 개도 사지 않았다. 그렇게 상품화된 기념품을 사기에 페소아는 나에게 너무나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소아 얼굴이 상점마다 가득하다(사진=김윤정)
페소아의 얼굴이 상점마다 가득하다(사진=김윤정)

<불안의 서> 한국어 번역판에 실린 김소연 시인의 발문처럼, “누군가 부조리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를 포기할 권리, 삶의 숭고함에 나를 헌납하여 삶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체념을 선택할 권리, 그러니까 한없이 나약할 권리, 끝없이 불안할 권리, 권태로울 권리와 공허할 권리, 그리하여 질 나쁜 인간의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질 좋은 고독을 향유할 권리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 <불안의 서>를 권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