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바위를 밟아라, 좋은 세상은 온다
[공연리뷰] 바위를 밟아라, 좋은 세상은 온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3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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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오페라앙상블 창작오페라 ‘장총’
'장총' 공연에서 장총의 독백 장면. (c)강희갑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한국 오페라의 세계화’라는 기치를 걸고 빈약한 클래식 관객층의 저변을 꾸준히 넓혀온 서울오페라앙상블이 창단 28주년을 맞았다. 창단 28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1월 22-2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창작오페라 <장총>이 올려졌다. 김은성 대본, 안효영 작곡의 창작 오페라 <장총>은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이 선정한 올해의 신작이다.

창작 오페라 <장총>의 영어 제목은 ‘The Trigger’(방아쇠)이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장총이 주인공이다. 1952년의 지리산 자락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익 청년단원 길남이 죽창으로 빨치산 시체들을 찌르며 분노의 ‘멸공통일’을 외치다가 시체 아래 깔린 99식 소총을 주워들며 오페라가 시작한다. 시체는 종이로 만들어져 음악과 대사가 전하는 리얼한 참혹함을 조금 덜어내 주었다. 소극장 오페라의 예산으로 할 수 있는 간결하고 상징적인 느낌의 무대였다.

길남의 노래는 이전 오페라에서 본 적 없는 강렬하고 무서운 대사였다. 피에 굶주린 짐승 같은 길남이의 욕설 가득한 노래와, 장총이 1945년 일본 육군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지던 순간의 서정적인 노래가 대조를 이루었다.

“인두 끝에서 물방울 타는 소리가 들렸어.

아이의 눈물이 국화 위에서 지져지던 그 소리.

꽃이 내 몸에 피어났어. 죄가 내 몸에 새겨졌어.

죄라는 꽃을 달고 그렇게 전쟁터로 갔어”

'장총' 공연 장면 중 일부 (c)강희갑
'장총'에서 길남이 죽창으로 시체들을 찌르는 장면. (c)강희갑

원래는 악기가 되고 싶어 했던 나무는 일본군의 총이 되었다. 일본군, 팔로군, 광복군, 인민군, 학도병, 빨치산의 총으로 주인을 바꿔가며 살아온 장총의 고단한 여정을 테너 김주완이 노래했다. 어린 소년병들이 총을 짧게 잡았다가 전장에서 스러졌다는 노랫말이 가슴 아팠다. 방아쇠가 잘려나가 전쟁터에서 이제 쉴 수 있나 했건만 악에 받친 길남의 손에 다시 들어가게 된 장총의 절규를, 김주완은 진한 울림 속에 아프게 담아냈다.

바리톤 최병혁은 상처입고 성난 짐승같은 18세 청년 길남을 아주 잘 표현했다. 부모의 죽음 앞에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싶으나, 원수라고 여긴 단짝동무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버린 길남이.

유랑 악극단을 하는 남매 선녀와 봉석의 이야기가 또 한 축을 이룬다. 전쟁 통에도 악극을 올리며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남매는 소프라노 정시영과 테너 석승권이 맡았다. 폐허 속에서도 웃게 만드는 두 사람의 코믹 연기가 일품이었다. 무대에서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지만 현실은 전쟁의 불안에 떨고 배곯는 가난한 배우의 삶을 잘 보여주었다.

이런 전쟁판에서 악극은 무슨 악극이냐는 악다구니 속에 꿋꿋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는 이들의 모습은, 코로나라는 재해 속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예술인들과 오버랩되었다.

선녀는 선녀바위의 전설을 노래한다. 선녀바위 전설이 이 작품의 메시지로 여겨졌다.

'장총' 공연 장면 중 일부 (c)강희갑
'장총'에서 길남이 악극단에게 방아쇠를 고치라고 다그치는 장면. (c)강희갑

“일 년에 한 번 선녀들이 내려와요.

날이 샐 때까지 밤새 바위를 밟아요.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야 좋은 세상이 와요.

밟고 또 밟다 보면 

비비고 또 비비다 보면

바위는 닳아요.

오래 걸려도

천년만년 수억 년이 걸려도

언젠가는 닳아요”

'장총' 공연 장면 중 일부 (c)강희갑
'장총' 공연 장면. (c)강희갑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바위가 하나씩 있지 않은가? 맨발로 밟아서 언제 좋은 세상이 오냐고, 원자폭탄을 쏟아서 바위를 폭파시켜야 한다는 길남에게, 무대가 바위라고 생각해서 악극을 한다는 선녀. 맑고도 강한 발성, 적절한 호흡으로 선녀바위의 전설을 노래했다.

부모의 원수를 죽이려는 분노로 가득찬 길남의 마음을, 남매의 악극과 선녀의 호른 이야기가 어루만져준다. 악극 장면에서는 쇼팽 에튀드 <이별의 노래>가, 음악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길남이의 어린 시절을 노래할 때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호른 솔로가 흐른다. 악기가 되고 싶었던 장총의 꿈도 호른 솔로로 표현했다. 빨치산 토벌이 있은 후 군악대의 힘찬 음악과 동시에 연주되는 호른 솔로는 드라마틱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나무 역의 소프라노 장지민이 대학생이라니 놀라웠다. 내레이션을 마치 울부짖는 메아리처럼 노래했다.

길남이의 대사에 욕과 비속어가 많았다. 효과적인 면도 있었으나 오페라에서는 생경한 일이다. 주로 연극 대본을 써온 작가의 첫 오페라 대본이라고 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연극에서의 대사는 직접적이니까. 그러나 오페라는 음악으로 많은 설명을 해야 하는 장르다. 대사가 너무 자극적이면 음악이 주는 감동에 빠져들기가 어렵다. 강렬한 효과를 내고 싶다면 음악적으로 충격을 주는 것이 맞는 방향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장총의 의인화라는 참신함, 주인공들을 표현하는 테마 음악, 비극의 역사를 나무의 제의로 위로하는 엔딩. 좋은 대본과 좋은 음악이 갖춰진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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