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극장춤의 판타지(fantasy)로 구현해낸 위로의 춤판
[공연리뷰] 극장춤의 판타지(fantasy)로 구현해낸 위로의 춤판
  • 김혜라 공연평론가
  • 승인 2022.08.27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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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립무용단 제20회 정기공연 ‘업경대‘
'업경대' 2장 © 박봉주

[더프리뷰=천안] 김혜라 춤비평가 = 김용철 감독의 대표작인 <업경대>가 천안시립무용단 제20회 정기공연(8월 19-20일, 천안예술의전당)에서 진화된 모습으로 선을 보였다. <업경대>는 2010년 초연 이후 수많은 무대에서 롱런하며 국내외에서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은 바 있는, 김용철 감독만의 미학적 사유가 선명하게 담긴 작업이다. 총 4장의 구성으로 무용극적 성격과 모던한 미감으로 연출한 <업경대>에는 우리 문화의 불교적 가치관과 아시아적 감수성이 절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관객들이 작품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점이고, 이심전심으로 망자의 안식을 소망하는 염원이 와 닿기 때문이다.

1장 거울이 부르는 노래 © 박봉주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49일간이 ‘업경대(業鏡臺)’에 직면해 자신의 죄를 낱낱이 비춰보며 심판을 받는다는 불교적 소재가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다. 첫 장 ‘거울이 부르는 노래’부터 강렬하게 각인되는 업경대의 의미는 무대 막 앞에 자리한 거울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거울을 둘러싼 7명 사자(使者)들의 과장된 표정과 하얀 손만 도드라진 형상에서 망자의 죄상을 단단히 벼르고 있음직해 보인다. 죽음을 상징하는 백색의 종이꽃도 원래 업경대를 지지하는 사자(獅子)상을 대신하여 자리해 있고, 이어지는 2장에서 주요한 메타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미 죗값이 밝혀져 너부러진 육신들이 거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상황도 심판으로 가는 여정이 녹록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1장 망자 이광석 © 박봉주

어쩌면 관습적인 내용일 수 있는 ‘49재’ ‘업경대’라는 소재가 흥미롭게 보이는 것은 등장인물의 성격이 독특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업경대 앞에 도착한 사신(장래훈)과 망자(이광석), 그리고 영혼(김용선)과 열 명 무용수들이 각 장의 이미지를 이끌고 가는 축으로, 각 장에서 제대로 기여를 한다. 먼저 망자를 안내하는 사신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섬뜩한 저승사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망자의 이승의 꺼풀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객관적인 매개자적 입장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안무자가 펼쳐낼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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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심판으로 가는 첫 관문 © 박봉주

또한 7개의 거울 뒤에서 기괴하게 표정 짓는 무용수(使者)들도 무서운 성격 이면에 익살스러운 표정이 엿보여 불교의 탱화나 절문을 지키는 사천왕상들의 표정과 닮아 있다. 하여 심판으로 가는 첫 관문이 두려움과 경쾌함이 중첩된 시선으로 표현된 점도 김용철 감독만의 새로운 제의적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한국적인 정서가 엿보이면서도 일본 부토가 연상되는 회칠을 한 영혼의 외양에서 풍기는 오묘한 분위기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도 깨뜨린다. 무언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합들의 성격이 예술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무대에서만 창조되는 캐릭터로 작품의 성격에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업경대 2장 © 박봉주
종이꽃을 접는 10명의 무용수 © 박봉주

막이 올라가면(2장) 정적이 흐르고 10명의 무용수는 얼굴부터 온몸이 백색으로 치장되어 있고 소복 같은 옷을 입고 낮은 자세로 종이꽃을 접는다. 스산한 소리와 절제된 몸짓으로 사각사각 종이꽃을 접는 행위는 마치 죽음의 레퀴엠을 연주하는 배경음으로 인지되며 점차 경건한 의식으로 전도되어간다는 인상이다. 꽃이 접히며 나는 한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무대 공간을 무겁게 장악해가며 관객의 청각을 일깨우는 것 같다. 귀를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소리의 긴장감이 이 작품에서 가장 미적 쾌를 발생시키는 명장면으로 ‘영혼의 습지’라는 부제에 적절한 기억할만한 신(scene)이다. 영혼과 여자 무용수들의 응축된 내적 정서를 머금은 표현에서는 범우주적 기운에 지배당하는 죽음의 잔치로도 읽히며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구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와 같이 2장에서 종이꽃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적인 이미지는 겹쳐진 꽃잎이 마치 망자의 겹겹이 쌓인 한으로도 보이고 심판으로 향하는 여정에 동행하는 다정한 친구로도 해석될 만큼 다양한 메타포로 작용하였다. 꽃의 형상인 무용수들이 한 줄로 서서 길을 트고 있고 그 뒤를 잇는 망자 이광석의 모습에서 상여에 실려 가는 우리네 전통적인 장례문화도 연상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눈꽃을 즈려 밟고 가는 이광석이 덜 처연하게 보이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한다는 인상을 눈 꽃잎의 향연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업경대 2장 © 박봉주
2장 중 눈꽃의 휘날림 © 박봉주

2장과 3장에서 대개 대형무대 무용극에서 흔하게 차용되는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업경대>에서도 펼쳐진다. 물론 스펙터클한 표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주제와 무관한 과도한 장면구성이 작품의 의미를 희석시키기에 지양되어야 할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2장에서 10명의 무용수가 무대 중앙에서 꽃잎이 눈처럼 발화되어 퍼져나가는 장면이 그것으로, 전 장면과 이어질 장의 맥을 연결시키기에 진부한 위험성에서 구제된다. 다시 말해 심판의 여정에 생명력이 완연한 꽃은 아닐지라도 망자의 길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이기에 눈꽃의 휘날림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3장 ‘욕망의 무게’라는 명분으로 무용수들이 역동적인 군무와 흑백 듀엣의 기교를 펼치는데 이 또한 자칫 주제와는 무관한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으로 빠질 순간들이 포착되었으나 업경대에 비춰진 망자의 욕망이 참회의 긍정적인 기운으로 치환되며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간다.

업경대 3장 © 박봉주
3장 욕망의 무게 © 박봉주

거의 모노톤을 유지한 무대 색감은 생사 판결 이전의 상황을 의식해서 되도록 무색무취의 존재성이 반영된 연출이라 짐작된다. 이후 형형색색의 생동감 넘치는 대형 보자기가 관객석을 통과하고 영혼의 기운을 상쇄시켜 이내 지하(오케스트라 피트)로 자멸하게 한다. 갖가지 살아생전의 죗값이 업경대에서 밝혀지고 그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난 망자(이광석)의 순전한 몸만이 무대에 덩그러니 서있다. 순수한 에덴동산 같은 평화로운 지상의 분위기와 지하로 침몰하는 영혼이 대비되며 망자의 환생내지는 자연회귀를 암시한다. 새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망자는 무거운 죗값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비로소 49재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으로 관객도 망자와의 이별을 목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업경대 4장 © 박봉주
'업경대' 4장 © 박봉주

무엇보다 <업경대>에서 기억할 부분은 죽음이 암울한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와 본원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시작점으로 바라보는 안무자의 시선이다. 김용철 식의 49재 레퀴엠의 시공간은 눈에 보이기보단 마음으로 짚는 시간이며 산 자는 망자와의 이별을 수용하는 시간이고 망자는 자기 업보를 뒤돌아보며 참회의 시간을 갖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를 안무자는 생사의 상상적 여정을 무대라는 판타지성을 적극 활용하여 오묘한 생명성의 미적 환희가 넘실거리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작년 천안시립무용단 정기공연작인 <음무동락>이 춤 기교 중심의 대중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이번 <업경대>는 선명한 주제의식과 예술성을 집약시킨 그의 대표 레퍼토리를 천안시립무용단 단원들, 객원 무용수들과 함께 유감없이 공유했다.

업경대 에필로그 © 박봉주
 에필로그 © 박봉주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마지막 커튼콜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탑을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씩씩하고 질서정연한 퍼레이드를 펼치는 인상이다. 긴 서양식 우산을 들고 엉덩이가 도드라진 개량한복에서 일제 강점기 신여성의 모습이 스쳐가기도 하고 이루마의 노래가 엔카(演歌)풍으로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예민함일까. 에필로그도 아닌 것이 지나치게 길어 작품의 맥락과 결이 상충되어 보였다. 이 부분이 단축되거나 아니면 분명하게 그 장면이 있어야 할 이유가 도드라졌으면 한다.

업경대 4장 © 박봉주
'업경대' 4장 © 박봉주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고 지인을 떠나보낸 경험을 갖고 살고 있다. 더구나 망자와 충분하게 이별의 시간을 나눌 수 없었던 팬데믹 시기에 더욱 <업경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유의미하게 보였다. <업경대>는 49재의 생사 여정이 그럼직하게 펼쳐지며 망자와 산 자의 바람을 담은 그 경계의 공간에서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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