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터펠과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지난 새 시대가 왔다
[공연리뷰] 터펠과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지난 새 시대가 왔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10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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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장면(사진제공=artsnartst)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장면(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지난 6월 20일,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2021에서는 한국의 바리톤 김기훈이 우승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기훈은 2019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도 2위를 했던 전력이 있으나, BBC 카디프 콩쿠르는 브린 터펠과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라는, 바리톤의 거장들을 배출한 콩쿠르이기에 김기훈에게는 더욱 의미 있었을 것이다.

김기훈의 리사이틀이 9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객석의 열기가 뜨거웠다.

김기훈은 이날 그동안 나갔던 콩쿠르에서 불렀던 곡들을 모두 선보였다. 오페라 아리아만 12곡을 들을 수 있는 무대였다. 그야말로 마음껏 기량을 뽐냈다.

김덕기가 지휘하는 코리아쿱 오케스트라의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이 연주되고, 이어서 김기훈이 ‘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로 무대를 열었다. BBC 카디프 콩쿠르 결선 첫 곡이었다. 당시 김기훈은 이 곡을 마음껏 부르지 못해서 망쳤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껏 수많은 피가로의 노래들을 들었지만 김기훈의 피가로는 정말 신선했다. 명곡은 연주자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되기 마련이다. 김기훈은 자연스럽게 피가로 그 자체가 되었다. 과한 익살 연기를 부리지 않았으나, 딕션과 표정과 제스처와 청량하게 울려퍼지는 소리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바그너 <탄호이저> 중 ‘저녁별의 노래’, 그리고 코른골트의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부를 때, 그의 낭랑한 바리톤 음색은 더욱 빛났다.

김기훈은 과거 성대결절로 고생하다 스승 김관동 교수를 찾아갔을 때, ‘테너처럼 노래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하이 바리톤이기도 하지만 테너의 사이다 같은 청량함도 녹아있는 김기훈의 소리는, 사람들을 서정 가득한 슬픔 속으로 이끌었다.

코른골트의 곡 역시 카디프 콩쿠르 준결선 곡이었다. 이 곡을 들은 심사위원들이 눈물을 닦는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광대 프리츠의 회상은 꿈결처럼 청중에게 전해졌다.

2부에서는 김기훈의 변화무쌍한 연기력도 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를 연주할 때 무대로 얼굴을 내밀고 ‘신사 숙녀 여러분’을 부르며 광대 토니오를 노래했다.

그리고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함께 출연해 베르디 <가면무도회>와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오네긴>의 장면들을 연출했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장면(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이러한 정성어린 시도들은 청중에게 감동을 준다. 서선영과 강요셉의 노래와 연기도 발군이었다. 셋이 노래할 때 날카로운 창처럼 뇌리에 박히는 명료한 소리들에 심장이 뛰었다. 셋이 나오는 <가면무도회>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기훈은 백작과 아내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을 떠는 레나토에서, 무릎꿇고 사랑을 애걸하는 오네긴으로 변신했다. 목소리의 섬세한 떨림, 소리 톤의 변화가 놀라웠다.

마지막 곡은 시마노프스키 <로제르 왕>의 ‘에드리지, 이제 새벽이다...태양이여! 태양이여!’였다. 마지막 부분 긴 호흡에 객석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의 몸에 숨과 소리의 길이 열린 것 같았다.

김기훈의 장점 또 하나는 자연스러움과 기품이다. 많은 인터뷰에서 ‘곡성 출신 촌놈’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음악은 깊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

콩쿠르 결선곡인 <안드레아 셰니에> ‘조국의 적’을 못 들어보나 했는데 앙코르로 들을 수 있어 기뻤다. 복잡한 제라르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꽉 찬 울림으로 객석에 충족감을 주었다. 이어진 차이코프스키 <스페이드의 여왕> ‘당신을 사랑합니다’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불렀던 곡이다.

며칠전 TV에서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았다. 실험적이면서 웅장한 어느 밴드의 무대를 본 심사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30년 동안 음악을 해왔는데, 이제 평가가 아니라 새로운 제너레이션이 오는 것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기훈의 무대를 보면서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음악이란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 끝에 피어나는, 조개 속의 진주라고 늘 생각해 왔다. 대단한 명연주를 들은 후에는 ‘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며 연주자가 걸었을 고난의 행군을 떠올렸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장면(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그런데 김기훈의 음악은 자유로웠고 아름다웠다. 편안한 눈웃음, 여유로운 태도, 흔들리지 않는 호흡과 위엄 있으나 경직되지 않은 자세. 음악에 빠져들어 그 음악을 즐기는 모습이 청중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인터뷰 때 들었던 어려운 집안 환경이나 성대결절의 수난은 그의 숨결에 다 날아가 버린 듯했다.

앙리 마티스는 말했다.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기를.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김기훈 역시 힘겨운 루틴을 쌓아서 이런 음악을 펼치는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위의 그는 음악으로 인해 행복해 보였다.

김기훈의 무대를 보며 확신했다. 터펠과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지난, 새로운 시대가 왔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공연장면(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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