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6) - ‘무대’ 라는 세상은 무엇인가?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6) - ‘무대’ 라는 세상은 무엇인가?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2.01.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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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필자(사진제공=김윤정)
프랑크푸르트에서 필자(사진제공=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새해가 시작되고 한국춤비평가협회 2021년 베스트 작품 6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감사한 일이다. 대리 수상을 해준 무용수에게 수상소감을 보내면서 마지막 줄에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1929-2021)의 글을 인용했다.

“과학의 세계는 우주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다. 예술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라는 한 작품으로 작년과 새해 의미 있는 상을 받게 되면서 나는 나에게 예술(춤, 작업)이란 무엇인가? 무대란 무엇인가? 사회규칙과 규범에 따르면서도 이 사회의 노예가 되지 안고, 어떻게 창조적인 개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몸 안에 갇혀 있다. 오직 인식을 통해서만이 바깥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데 내 몸과 지성이 인지한 의미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며 생각해본다.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해서 언어를 쓰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에 움직임을 찾는 것은 늘 나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예술의 시간성

작업을 한다는 건 어딘가 깊숙이 갇히면서도 모든 감각을 열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시간들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 이 모든 시간성을 내포한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너무나 특별한 시간의 늪이다. 그리고 고독한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와, 시간의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예술’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따로 또 같이 있다. 방향성을 드러내는 신체와 어떤 방향성도 지니지 않는 예술의 조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춤의 본질은 기술을 연마한 테크닉과 흥(영혼)이 담긴 표현의 자유가 있는 움직임이다.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춤이 본질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미들이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작업은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세상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합적인 시간들이다. 그리고 안무나 연출을 할 때는 내 생각과 의도가 무용수들의 몸과 정신을 빌려 표현되어야 하므로 그들과 긴밀하게 조응해야 한다. 공연예술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인간의 몸과 정신이다. 그리고 무용수들 자신이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무용수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그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다양한 측면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작업에 몰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대라는 세상

나는 극장이라는 무대를 벗어나 열린 공간 또는 대안공간의 갤러리나 야외에서 하는 작업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극장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의 공간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극장이라는 형식(?)의 어두운 무대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은 듯이 고요하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 속에 불 하나 켜지면서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작품에 따라 그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만들어지고 한두 시간 안에 인생의 희로애락의 에너지가 공기를 타고 전달되며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집중하며 하나가 되는 무대라는 장소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르코대극장 무대(사진제공=김윤정)
아르코대극장 무대(사진제공=김윤정)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라는 세상 속으로 함께 들어갈 준비를 한 관객들과 그 공연 자체가 되는 퍼포머들 그리고 스태프들이 말없이 자기 역할을 하면서 함께 가는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암전이 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난다. 그리고 퍼포머도 관객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시 현실이라는 진짜 세상으로 돌아간다. 어두운 무대라는 한정적인 장소는 수천 수만 개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우주이기도 하다. 무대라는 것은 갇힌 공간이면서도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상이 펼쳐질 수 있는 마법이 가능한 곳이다.

가끔 나는 여름날 시내 공원을 산책하다가 그늘에 앉아서 또는 누워서 보이는 세상을 관찰한다. 길을 걷다가 또는 카페에 앉아서 보이는 광경과 소음들을 즐긴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사랑하고 증오하는 삶의 모습과 소리들이 역동적으로 들리는 그 순간들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일상이, 세상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어디를 봐도 완벽한 무대 세트에 다양한 구도의 등퇴장을 하는 각기 다른 캐릭터의 인물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자연광, 구석에 피어있는 잡풀들까지, 갑자기 푸드득 날아드는 비둘기들, 그리고 테이블 위 케이크 조각에 머리를 박고 있는 벌까지 일상은, 자연은 너무나 완벽한 작품이다. 길을 가던 개조차 물끄러미 나를 관찰하며 바라보기도 한다.

케이크 조각에 날아든 벌들(사진제공=김윤정)

가끔 예상치 못한 지루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도 있다. 그 인물의 테이블에 나란히 놓인 고급차 열쇠와 책. 책 제목은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씌어 있다. 얼마나 평범한 무죄(?)의 등장인물인가? 어쩌면 그의 삶은 아주 구태의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하는 내 생각은 제삼자의 인식일 뿐 그의 내면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듯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그 사람이 읽고 있는 책 제목 하나로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나는 빙그레 웃지만 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 나만의 선입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는 순간인가?

테이블 위의 책과 소품들(사진제공=김윤정)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졌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완벽한 구성으로 된 일상들은 별 의미 없이 우리가 흘려보내지만 무대 위에서 재현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순간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돌아가지만 현실에서는 무뎌지는 장면들이 무대 위에 재현될 때 집중하게 하며 다른 의미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대의 또 다른 매력은 아마도 우리들의 진짜 인생의 완성되지 않는 현실과는 다르게 무대에서는 언젠가는 완성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인생은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언제나 진행형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 전체를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간의 삶 속에 진정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약속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없는 무용공연은 열 명이, 백 명이 보면 열 개, 백 개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현재 만연한 개방과 탈경계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맺음 능력을 상실해간다. 오늘날엔 심지어 지각도 맺음 능력이 없다. 지각은 서둘러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옮겨간다. 밀려드는 이미지와 정보는 눈감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끝없는 접속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서는 끝맺음이 불가능하다. 장소는 하나의 맺음 형식이다. 이야기는 하나의 맺음 형식이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이야기는 맺어진 질서를 묘사한다. 인간은 ‘장소적 존재’다. 장소가 비로소 거주를, 머무름을 가능케 한다.” 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장소는 나에게는 곧 무대가 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맺음을 해야 하는 곳인 것이다.

예술의 세계, 창작의 세계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어야 한다. 영감을 받고 콘셉트를 연구하고 표현 방식을 찾고, 그리고 형상화하고 나면 마지막은 다시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도 맺음을 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카오스다. 질서가 본능이 아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춤은 논리가 줄 수 없는 혼란과 혼돈을 정리해준다.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가?

내가 꿈꾸는 공연은?

나는 어떤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좀더 위험하고, 친밀하고, 낯설고, 무언지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듯 신비하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슬프고, 아련하게 노스탈직하고, 나와는 다른데도 공감이 가고, 웃음이 나면서도 아프고, 일상처럼 특별할 게 없는데 감동을 주고, 공허한 듯 황홀하고, 명확해지는 듯하다가도 아득해지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위태롭지만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

아르코대극장 무대(사진제공=김윤정)

그래서 관객들이 극장까지 찾아오는 길은 기대와 설렘이 있고,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무리 멀어도 작품의 감동과 여운으로 그 길이 지루하지 않을 그런 작품을 올리고 싶다.

그래서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의 영화 속 마지막 독백처럼 어떤 거짓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우리 안에 죽어있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어본다.

우리는 모두 꿈꾸기에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일 테니 말이다.

무대 위에서 공연자들과(사진제공=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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