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9) - 햇살 예찬, 죽음의 사유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9) - 햇살 예찬, 죽음의 사유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2.03.27 22: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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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낯선 이' -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김윤정)

[더프리뷰=뒤셀도르프] 나는 요즘 매일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음날 날씨를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날씨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날씨라는 것이 단순히 기상학적 사실이 아니라 나의 내면적 상태와 조응하는 무엇이 된 것이다. 젊은 날은 어둠이 내리면 비밀에 둘러싸인 듯한 밤이 좋았는데 언젠가부터는 아침에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살을 보면서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좋아진다. 나는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사람들이 비오고 흐린 날씨를 불평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독일이 비가 오고 흐려서 더 좋았기 때문이다.

흐린 날의 햇빛 (사진=김윤정)

그러다가 기나긴 흐린 날들을 겪다보니 나도 어느덧 그런 날씨를 불평하게 되었고 햇살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햇살을 받는 날은 온몸에 퍼지는 엔도르핀을 실제 느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흐린 날도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중충한 유럽에 살면서부터 햇살 예찬론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햇살이 너무 눈부신 날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이 태양이 자체 핵분열로 뿜어내는 수소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햇살은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태양은 가장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빛(사진=김윤정)

햇살 예찬

나는 아르뛰르 랭보의 시 중에 ”온몸에 햇살을 듬뿍 받으며 정처없이 걷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알베르 카뮈는 <안과 밖>이라는 책에서 “나의 어린 시절 위로 내리쬐고 있던 그 아름다운 햇볕 덕분에 나는 원한이란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고도 한다. 카뮈는 유난히 햇살 이야기를 중요하게 그의 글에서 다룬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은 책자 안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뫼르소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 살인을 했다고 하기에 이른다. 그의 또다른 소설 <페스트>에서도 햇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금빛 태양이 잠시 비추기만 해도 즐거운 얼굴이 되고 비가 조금 내리기만 하면 얼굴과 생각 속에 두꺼운 베일이 드리워져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 우울하다고 하면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햇살 가득한 하늘을 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거나 행복하면 안 될까?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나의 위로의 말이다. 물론 우울한 사람들에게 그런 것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셀로나 거리의 햇빛(사진=김윤정)
바르셀로나 거리의 햇빛(사진=김윤정)

언젠가 나는 인생을 깊게 사유하며 지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 작가나 철학가 예술가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지만 갈피를 잡기도 힘들고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과 자살 사이의 어떤 연관성도 찾기가 힘들어 주저주저하다가 막상 쓰려고 하니 하필이면 너무나 아름다운 햇살과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봄이 아닌가?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나는 죽음 에 관한 단상들을 쓰고 있다는 것이 아이로니컬하지만 뭐 인생이 그런 아이러니의 연속이긴 하다. 어느 심리학자의 자살에 관한 연구를 보니 자살은 사계절 중에 봄, 시골보다는 도시, 전쟁시보다 평화의 시기에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자살할 권리를 선택한 예술가들

오토 바이닝어(Otto Weininger, 1880-1903),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 1895-1925),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존 베리맨(John Berryman, 1914-1972),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1962-1987), 사라 케인 (Sarah Kane, 1971-1999).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스스로 자살할 권리를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 외에도 물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른 예술가들이 더 있겠지만 작가나 사상가, 극작가들 중에 내가 작품을 읽고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영감을 준 사람들이다.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느라 자살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내가 그들의 자살이라는 사건을 나의 세계관에 빗대어 감히 어떤 논증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살을 예찬하거나 그것이 더욱 그들의 예술과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은 어찌 보면 나이가 들수록 어떤 신념에 고착되어 안정적으로 안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쌓아올린 형상들을 스스로 부숴 버리고 오히려 무질서를 향해 가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진정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또는 적극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왜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해야 했을까?

시대적 상황과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한 인간의 정신적인 고통 그리고 결국 불안에 휩싸인 천재 예술가들의 그런 선택은 타인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아주 미미하게나마 상상을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시대는 내게 불쾌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그는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물론 그 시기는 나치를 피해 기나긴 망명생활을 하던 때이므로 예술가들의 자살을 이 한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삶을 관조하고 위대한 창작을 남기고나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죽음이란 것을 한번 더 사유해 본다.

죽음의 사유

죽음의 또 다른 관점으로, 누군가는 갓 태어난 아기는 죽음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이상해 보이지만 저승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죽어서 가는 세상이 저승인데 이 세상에 도착하기 전에 있던 세상도 똑같이 저승이고, 아이들은 이 세상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죽음들을 마주하며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나는 죽음을 모르고 삶을 산다는 것은 허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일 죽으면 오늘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저 일상을 따라 시간이란 물결에 밀려 결국 죽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멈춰있는 것이 없고 종말을 향해 간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사실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명제는 없다. 나는 언젠가 어느 과학자를 통해 이 세상에는 생명체라는 것이 아주 극소수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우리 인간들은 생명에 관심이 많지만 이 우주를 차지하는 수천 수만 가지 모든 요소들 중에 실제 생명체는 아주 극소수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의 존재조건 속에 생명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죽을 수 있는 선택권조차 없이 엄청난 진화의 과정 속에 사라져간 것들에 비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인간만이 죽음을 인지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는 다른 동물의 관점에서는 알 수 없기에 인간의 관점에서만 말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인생이 무한하다면 더 이상 삶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무엇을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해하고 끝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이해 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데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하면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날들을 또 순간들을 아름답게 또는 소중하게 향유하게 된다. 명예 또는 가시적인 것들의 덧없음을 깨달으면 자유로운 인생의 맛을 매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을 택한 운명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강연과 사라 케인의 <갈망>이라는 극작 속 독백을 소개해 본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2005년 캐니언대학 졸업식 강연에서)

만일 당신이 돈과 물건을 숭배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을 가진 것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당신은 절대 채워지지 못할 것이고 만족감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자신의 몸과 아름다움 그리고 성적인 매력을 숭배한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본다면 당신에게 실제로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수백만 번이나 죽음을 더 경험할 것이다.

​권력을 숭배한다면 당신은 스스로가 약하다는 생각과 두려움에 가득찰 것이다. 자신의 지성과 스마트해 보이는 것을 숭배한다면 당신은 결국 멍청해질 것이고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기만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숭배하는 마음, 돈, 아름다움, 권력, 지성이 악하거나 죄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들은 그저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머리)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는 옛 명언이 있다. 너무 뻔한 내용이라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사실 엄청나게 무서운 진실을 말하고 있다. 총으로 자살을 하는 성인의 경우 거의 백이면 백 머리를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실로 중요한 자유에는 관심 가질 자유와 깨어 있을 자유, 훈련과 노력할 자유, 계속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보살필 자유 등 매일 할 수 있는 무수하게 많은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포함된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자유이며 이게 바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죽음 이전의 삶에 있다. 오십 세가 되더라도 총으로 머리를 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게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고, 진짜 공부의 진짜 가치를 아는 것이다. 성적이나 학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것, 얼핏 둘러봐서는 보이지 않기에 우리 스스로 계속해서 되뇌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그 내면의 것들, 그게 바로 진짜 공부의 가치다.

의식을 가지고 매일매일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공부는 실로 평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이 평생의 공부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

여러분의 앞날에 행운보다는 행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1962-2008)

사라 케인 – <갈망(Crave)>

작가라면 누구나 가장 완벽한 한 문장을 쓰고 싶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가장 길지만 아름다운 사라 케인의 <갈망>의 한 문장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 하련다. 사라 케인은 이십대 꽃다운 나이에 자살한 천재 극작가이다

사라 케인(1971-1999)

​내가 원하는 것은
너와 숨바꼭질을 하고
너에게 내 옷을 주고
네 신발이 맘에 든다고 말하고
네가 샤워할 때 계단에 앉아 있고
네 목을 마사지해주고 네 발에 키스하고
네 손을 잡고 함께 무언가를 먹으러 나가고

내 접시까지 먹어 치운다고 화내지 않고
바에서 만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얘기하고

네가 저지른 바보 같은 행동을 비웃어 주고
네가 즐겨 듣는 테이프를 주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재미없는 영화들도 보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불평하고

네가 잠잘 때 사진을 찍고
너한테 커피와 빵을 가져다주러 일어나고
밤 12시에 커피를 마시러 피렌체에 가고
네게서 담배를 훔치고, 성냥이 없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전날 저녁에 본 TV프로그램을 얘기해 주고
널 안과에 데려가고
네 농담에 웃지 않고

이른 아침에 너를 원하지만 네가 더 잘 수 있도록 깨우지 않고
네 등에 입 맞추고, 네 피부를 어루만지고
네 머리카락과 눈과 입술과 목과 가슴과 엉덩이를
내가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말하고,

네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리고
네가 늦으면 걱정하고, 일찍 오면 깜짝 놀라고
너한테 해바라기를 주고
네 파티에 가고, 쓰러질 때까지 춤추고
내가 틀렸을 때 사과하고, 날 용서해주면 기뻐하고

네 사진을 보고 너를 옛날부터 알지 못했던 것을 슬퍼하고
귀에 네 목소리가 들리고, 네 피부의 감촉을 느끼고

네가 참 멋지다고 말하고, 네가 무서워하면 꼭 안아주고
누군가가 너를 다치게 하면 널 감싸주고

네 향기를 느낄 때 너를 원하고
네가 옆에 있거나 멀리 있거나 하면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리며 울고
네 가슴이 침으로 젖고, 밤중에 널 부드럽게 만져주고

네가 이불을 다 가져가면 떨고
가져가지 않으면 열기에 숨이 막히고
네가 미소 지으면 황홀해지고
네가 소리 내어 웃으면 행복해지고

왜 내가 널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네가 정말 누구일까 생각에 잠기고
하지만 그대로의 널 받아들이고

너에게 시를 써주고
왜 네가 나를 믿지 않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

네가 나보다 더 좋아해서 내가 질투하게 될
작은 고양이를 사주고
네가 나가야 할 땐 침대 속에서 너를 붙잡고
그러다 결국 네가 가버리면 어린아이처럼 울고
네가 원치 않는 선물들을 사주고
그걸 가게로 도로 가져다주고
난 계속 새로 청혼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너한테 나의 제일 나쁜 점들을 이야기하고
너는 그만큼 소중하니까 내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주고
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네 질문들에 대답하고
내가 전혀 원하지 않을 때 너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네가 바라는 것을 알기에 솔직하게 행동하고
내가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네 인생에서 나를 완전히 버리기 전에
짧은 그 10분 동안 너를 붙잡고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너를 배우는 게 좋아서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노력하고
그만큼 노력할 가치가 있기에
서툰 독일어로, 그보다 더 서툰 히브리어로 너에게 말하고
새벽 3시에 너와 사랑을 나누고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기적처럼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평생의 강렬한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심장이 터질 듯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끝없이 영원히 지속될 사랑을
너에게 느끼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말하는 것이다​

사라 케인의 '갈망' 무대 모습(제공=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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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애 2022-04-05 21:46:41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