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식 [‘내안의 물고기’ 동행기]-(6)(마지막 회)
하영식 [‘내안의 물고기’ 동행기]-(6)(마지막 회)
  • 더프리뷰
  • 승인 2022.04.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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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여행 - 일본

[더프리뷰=부산] 하영식 작가 = 일본에는 다행히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기 전에 다녀왔다. 자칫 했으면 일본으로의 리서치는 코로나로 인해 기약도 없이 연기되면서 아예 취소될 수도 있었다. 교토로 가기 위해 김해공항에 모였는데,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은 아예 발길을 끊었는지 이전 공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쾌적하게 변해 있었다.

물고기 프로젝트를 위해 우리는 짐을 꾸리고 푸는 일을 두 달째 반복해왔다. 교토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에서의 일을 상상해봤다. 교토와 고베 두 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두 곳 모두 일본 예술가들과 인간이 물고기에서 나왔다는 주제를 가지고 교류하고 함께 공연할 예정이다. 비록 일본 본토는 아니지만 오키나와에서 느낀 게 있다면 인간이 물고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많은 오키나와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엄청난 규모의 수족관과 해양박물관을 지어놓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일본 본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추측하기는 아직 이르다. 일본 사람들은 다신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유일신을 모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산에 가면 산신, 바다에는 바다신, 땅에는 땅신, 들에는 들신... 이렇게 많은 신들 중에서 물고기신을 특별히 숭배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고기신을 숭배하는 마을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볼 텐데 말이다.

일본의 예술가들은 서구와의 접촉빈도나 다양성에서는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발하다. 과거에는 조선보다 3백 년 앞서서 서구와 본격적이고 공식적인 교류를 해온 역사가 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서구에서 일어나는 일은 즉각적으로 일본에서도 일어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교토에 대해 얘기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다른 도시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지면 배척받는 것도 교토에서는 허용되고 또 교토는 구식과 신식 모든 걸 포용한다. 그곳의 예술가들은 국제적이면서도 시대에 맞추지 않고 시대가 따라오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일본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교토에는 많이 모여 있다.

교토는 옛 천황이 살았던 황궁이 도시 중심에 버티고 있고 황궁을 중심으로 대학들이 자리잡고 있어 가히 학생도시라 할 만하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최초로 시작됐던 곳이어서 많은 진보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전에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을 너무 싫어해서 일본 방향으로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27년을 해외에 살면서 전 세계를 수 차례 일주하면서 다녔고 가보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여행했지만 일본은 단 한 차례도 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고문을 당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예술은 모든 것을 하나로 녹이게 만드는 멜팅포트(melting pot)의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일본의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나의 얼어붙었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고 일본사람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교토 릿츠메이칸대학 자리(사진제공=하영식)
교토 릿츠메이칸대학 자리(사진제공=하영식)

그 뒤 나 혼자 과거를 더듬으면서 교토를 방문한 적 있다. 나와 가까웠던 친구이자 멘토였던 곽재관 목사님이 일제 강점기 때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에서 수학했던 역사가 있다. 죽은 지 15년이 지났지만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돼 3년을 대전형무소에서 고생하시다 석방된 전력이 있다. 인생 말년에 겨우 독립유공자로서 잠시 대우를 받으시다 돌아가셨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나라 잃고 우리말도 하지 못하는 설움으로 혼자서 하숙방에 누워 우는 일이 많았다는 얘기를 내게 하신 적 있다. 그때 나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나라와 모국어를 잃어버린 한 유학생의 서러운 얘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가 연상되곤 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수십 년이 지난 뒤, 그가 다녔던 학교를 찾아갔으나 자취만 남은 채 오래 전에 다른 캠퍼스로 이전해버린 뒤였다. 학교의 남겨진 건물은 도립의과대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그곳의 일본인 교수가 친히 과거의 대학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강을 중심으로 건너편에는 교토국립대학이 있고 맞은편에는 의과대가 위치해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이 있다. 일주일 간 교토를 방문했을 당시, 나는 친구가 수년 간 살았던 지역을 매일 거닐었고 그가 산책했을 강가를 매일 산책했다. 오후가 되면 징검다리 위에 앉아 강(카무강)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시원하게 보냈던 여름이었지만 가장 슬픈 여름이기도 했다.

신은주 감독과 공동 작업을 할 일본의 예술가는 ‘하이디’로 일본인 모친과 스위스인 부친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남편은 미국인 교수이다. 핏줄까지 국제적이어서 토착적인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은 언제나 일본인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내안의 물고기 프로젝트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이디와 신 감독의 공연은 물고기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공유 형식으로 공동작업을 통해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를 실험해보는 기획이다.

하이디와 신 감독, 뮤지션 료타로가 함께 공연하는 극장은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다. 작은 소극장으로 보잘것없는 건물에 보잘 것 없은 무대에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의 입맛으로는 간단하게 후진 곳이다. 우리는 크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지만 일본에는 여전히 새로운 것과 옛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다. 이곳이 아방가르드적인 소극장이다. 교토라는 도시에서는 아방가르드라는 이미 유행이 지난 말도 별로 시대에 뒤처졌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그냥 아방가르드일 뿐이다. 시대는 끊임없이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데 따라잡을 여유나 시간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옛것을 고집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어디를 가도 모두 후졌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백만장자와 귀부인들이 누추한 객석을 메우고 있다. 왜냐하면 돈 있는 곳에는 예술이 없기 때문이다.

교토 아방가르드 극장에서 신은주 감독과 하이디의 공연 모습(사진제공=하영식)
교토 아방가르드 극장에서 신은주 감독과 하이디의 공연 모습
(사진제공=하영식)

하이디와 신 감독의 공연은 물의 시간을 공유하고 표현하고 인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간의 흐름처럼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끝내 평온과 자유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떼를 지어 사는 물고기들도 자유가 필요하다. 떼를 지어 살면서도 사랑하는 물고기를 만나게 되면 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같이 있다가도 무리 속에 들어가고 무리 속에서 나와 다시 둘이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사랑과 자유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관객들의 호응은 열렬했고 적극적인 찬사가 이어졌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서 오십여 명의 관객들만 입장할 수 있었지만 공연이 끝나자 모두들 인사를 나누고 교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가버리는 우리네 관객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출연한 예술가들과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남아서 카페에서 음료수나 음식을 주문해서 함께 나누면서 더 오랜 시간을 가질 수도 있는 장소였다. 아방가르드의 무대는 이미 365일 동안 공연예약이 꽉 차있다고 들었다. 일본인들의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에게도 상시적으로 수준 높은 예술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관객들과 예술인들이 격의 없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류코쿠대학에서 강의하는 미국 출신의 유대인인 죠나 살츠 교수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크라쿠프와 아우슈비츠로의 여행, 신 감독의 살풀이춤 공연을 들려주었다. 그는 한국의 살풀이춤을 이미 알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어쨌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해 신 감독이 살풀이춤을 췄다는 말에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교토를 떠나 고베로 왔다. 그곳에는 일본의 저명한 무용가 수미 마사유키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물고기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고베 전역에 산재한 물고기 프로젝트와 관련된 공연장소를 함께 돌아보고 차기 공연을 계획한 후 신 감독과 자신이 소유한 소극장에서 프로젝트를 위한 선행 작업과 즉흥 공연을 할 계획이다.

우리 일행은 수미 선생을 따라 고베에서 20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왔다. 수미 선생은 60년대 일본의 격동기를 학생으로서 겪었던 산 증인이다. 법을 전공한 뒤 법조계로 나가지 않고 무용을 하는 예술가로 방향을 전환한 흔치 않은 인생의 역정을 걸어왔다. 장거리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생의 온갖 얘기들이 오고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예술인 마을이었다. 강을 막아 댐을 건설해놨는데 댐 밑으로 마을이 건설돼있었다. 예술인 마을이지만 아이들과 주부들만 몇 명 보였지 예술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예술인 마을이란 팻말만 붙어있지 정작 예술인들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예술인들은 밤에 작업하고 오전에는 자는 게 보통이니 이들이 나돌아 다니기를 기대한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들은 댐을 보기 위해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댐 위의 길을 걸으면서 물을 봤다. 눈이 오지 않아 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미 선생의 말로는 이전에는 물이 많았는데 겨울철에 눈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물과 산이 있고 절경인 예술인 마을에서 여러 예술작품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설치되어 있는 풍경과 함께 예술가의 교류 및 춤 공연을 계획하는 것에 대한 여러 담론을 나누었다.

버려진 주석광산에서 즉흥공연, 수미선생과 김근영(사진제공=하영식)
버려진 주석광산에서 즉흥공연, 수미선생과 김근영(사진제공=하영식)

예술인 마을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주석광산이다. 물고기 프로젝트의 목표는 버려진 자연의 복원이자 도시재생이다. 버려진 산업공간을 가용성 있는 예술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고 잘 가꿔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미 파괴된 자연도 다시 살려야 하는 게 물고기에서 나온 인간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일본에도 버려진 산업공간들이 재생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경우를 봤다. 우리가 방문한 버려진 주석광산이 대표적인 경우다. 주석광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큰 건물에서 무대나 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수미 선생과 우리 일행 중 무용수 한 사람이 즉석에서 무용공연을 펼쳐보였다. 수미 선생은 7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기량을 뽐냈다. 이들의 공연은 훌륭했다. 더욱이 이들의 즉흥성이 놀라웠다. 아무런 연습 없이도 (십분 정도는) 거뜬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기량은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절대로 연습 없이 공연하지 않는다. 프로들의 철칙이 바로 연습이고 또 연습이다.

그곳은 이 프로젝트의 작품을 공연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로 보이지만 직접 공연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고베에서 거리가 너무 멀다는 단점과 아무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무대와 장소에서 공연이 어떻게 이뤄질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고베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수미 선생은 일본의 지진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가 간간히 듣는 일본 지진에 관한 뉴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극이었다. 쿄토의 하이디에게서도 자신의 모친이 고베 지진(1995년)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수미 선생의 경우도 고베 지진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뭘 잃었는지는 말이 없었으나 지진 이후 인생에서 재미가 없어졌다는 말을 했다.

고베에 도착한 다음 날 나 혼자서 고베 시내를 거쳐 바닷가로 나간 적 있다. 가는 길에 도심의 빌딩들을 봤는데 일본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모두 새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만 보였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1995년에 지진으로 다 파괴된 뒤 다시 세운 건물들이었다. 당시 고베 지진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이래 가장 큰 지진이었다고 한다. 6천500명 이상이 사망했고 도시 전체가 파괴됐다.

수미선생의 개인공연장, 공연이 끝난 후(사진제공=하영식)
수미선생의 개인공연장, 공연이 끝난 후(사진제공=하영식)

이제 남은 일정은 수미 선생의 개인소극장에서 수미 선생과 신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한 공연을 선보이는 날이다. 수미 선생의 개인 집을 개조해 작은 극장을 만들었다. 그곳에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은 붙어서 앉으면 서른 명은 될 것 같았다. 작은 소극장이지만 블랙박스무대에는 조명장치나 음향장치 등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어 손색이 없었다. 무대에는 물의 영상과 무대장치로 물고기를 상징하는 어망이 준비돼있었다. 공연시간이 되자 공연장 입구에서는 수미 선생의 제자들이 관람을 위해 방문하는 관객들에게 음료수와 다과를 제공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소극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수미 선생과 신 감독의 공연은 인간의 고독과 고뇌를 그렸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근원적인 문제를 각자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속박, 고뇌를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진화된 물고기와 인간이 주제인 실험적인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관객들은 두 예술가의 춤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수미 선생은 땀을 쏟아내면서 공연을 마쳐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은 2인의 보이스와 피리를 라이브로 연주해 공연의 격조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피리를 불었던 연주자는 1980년대에 서울에 초청받아 세종문화회관에서 수천 명이 운집한 자리에서 연주회를 했던 사실이 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고베가 리서치의 마지막 지점이다. 일본인들을 많이 겪어보진 않았지만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본인들의 공중도덕 의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항상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처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것 또한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예술가들은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하며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 리서치 여행을 통해 절실하게 느꼈다. 이를 통해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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