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무용단 ‘더블빌’
[공연리뷰] 국립무용단 ‘더블빌’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5.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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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국립무용단(예술감독 손인영)이 컨템퍼러리댄스 작가들과 더불어 신작 두 편을 선보였다(4월 21-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안무가집단 고블린파티의 세 작가(이경구·임진호·지경민)와의 <신선>과 차진엽과의 <몽유도원무>가 이번 <더블빌>전(展)의 프로그램이었는데, 두 작품 모두 서로 다른 메소드를 탐구해온 무용가들의 경험이 온전히 섞이며 또 하나의 충족적 세계로 완결되었다.

더블빌(double bill) 혹은 트리플빌(triple bill)은 각각 두 편 혹은 세 편의 작품을 펼쳐내는 공연양식을 말하는데 1시간에서 1시간 반 가량의 긴 호흡을 지니는 단독작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유비(類比)하자면 산문과 운문의 차이랄까. 모든 예술작품은 내용과 형식의 총체물. 특히 시간의 경과를 전제로 하는 공연예술작품은 작가 자신이 주조해내는 주관적 형식 외에도 공연 자체로부터 소여되는 외적 형식에 의해 그 특질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더블빌이나 트리플빌에서의 작품들은 단독의 작품들보다는 짧기 마련인데 그 덕에 대개 작품의 운용이 압축적이고 리드미컬하여 막이나 절(節) 혹은 장구한 서사적 구성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훨씬 춤적이다. 더불어 각기 고유한 작품과 작가의 등차(等差)를 세심히 느껴볼 수 있는, 공연계의 선물세트라고나 할까.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 (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 (사진제공=국립무용단)

이번 <더블빌> 공연에서는 또 다른 가능성도 개화되었다. 하위장르의 교직(交織), 현대무용으로부터 창작활동을 진행해온 안무가들과 전통춤으로 숙련되어온 무용수들이 조우했다. 컨템퍼러리댄스의 미학적 지향은 작가주의(作家主義, auteurism)로 약분 가능하다. 작가의 장악력보다는 열린 해석의 가능성들이 긍정되는 추세이고 특히 춤장르에서라면 동작의 발견과 진행이 안무가와 무용수의 공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서 그 사용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방가르드’가 과거 한 시절로의 특정을 넘어서 ‘전위’의 의미로도 사용되듯 작가주의 역시 범용적 차원에서의 제시가 가능하다.

어쨌든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세계관과 예술관 그리고 그 미학을 구현하는 작가적 낙관(落款, authorship)이 찍혀있기 마련인 것이다. 춤작품이라면 응당 몸짓이 그 낙관의 지위를 차지해야 마땅하다. 컨템퍼러리댄스의 무용가들이 각 장르의 규격을 파기하며 찾아내는 것은 이 몸짓, 존재의 현전(現前, presence)으로서의 고유한 몸짓이다. 기교에의 탐닉이 아니라, 그 자신들의 존재를 혹은 존재함을 증빙하는 몸짓. 이것이 컨템퍼러리댄스의 한 당위다.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사진 (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사진 (사진제공=국립무용단)

고유한 몸짓을 발현시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장르적 특성을 병치(倂置, juxtaposition)하기, 혹은 그야말로 동시대적 명제로 등극한 융복합. 전자는 회화의 점묘법을, 후자는 색 자체를 조색해낸 화가들의 작업(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반타 블랙Vanta Black 등)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겠다. 오늘의 두 작품은 무용수들의 현전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완성도를, 그 현전을 불러옴에 있어 차이나는 두 방식을 보임으로써 더블빌 형식의 구성력을 완비해주었다.

 

고블린파티(Goblin Party) <신선>

 

국립무용단 '더블빌 -신선'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신선'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츨연: 장윤나·전정아·황용천·송지영·이요음·조승열·박수윤·이태웅

‘goblin’은 서양 민담에 등장하는 상상의 생물체로, 말하자면 우리네 도깨비 같은 존재다. ‘party’는 춤과 연관하여 ‘연회(宴會)’를 상상하기 십상이지만 예상과는 달리 ‘정당(政黨)’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단체명 조어에서 짐작 가능한 바대로 고블린파티는 열려있는 안무가 집단이고 그러다보니 춤의 스펙트럼이 넓다. 필자의 경험들만 반추해봐도 커머셜 장르의 뉘앙스가 짙은 작품도 있었고, 아주 정교한 움직임의 반복과 집적(集積, accumulation)으로 현대무용 트렌드의 첨점(尖占)을 보인 작품도 있었고, 그런가하면 극적(劇的)이어서 마치 마임처럼 즉물적으로 해석 가능한 재현적 작품도 있었다. 소속작가 개인의 성향들이 반영되어서 그럴 터인데, 아무튼 대개는 소품들이었던 이런저런 고블린파티의 작품을 겪으면서 감지할 수 있었던 단체의 정체성은 과연 도깨비. ‘예술가’ ‘예술’ 이런 긴장은 풀어놓고 마냥 춤이 좋아 언제나 춤을 추고 사는 선량한 도깨비들 같달까.

어떤 가르마에서건 이경구와 임진호와 지경민은 춤으로 살고 있는 자신들을 무대 위에 제시하였는데, 그 경우들은 ‘자기반영성(self-reflexivity)’ 또는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 등 매체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학의 용어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한 작품들이었으니 단순히 매체와 주체가 일치 가능한 상황(안무자가 곧 실연자인)이어서 얻어진 우연찮은 결과는 아닌 듯하다. 서사나 장치 또는 의상 등으로 획득 가능한 부연(敷衍)을 거두고 춤 혹은 춤추는 몸에 방점을 찍어온 도깨비들. 이들에게 여덟 명의 타자들, 그것도 고도의 수련을 거친 전통춤이 기입된 몸들이 주어졌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개방하고 섞여 고유하면서도 확장 가능성을 실현하는 몸짓을 창출해낼 것인가.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공연사진 (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고블린파티는 이 무대를 <신선>의 거처로 정했다. 신선(神仙), 신과 사람 사이의 존재들. 신처럼 초월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인간처럼 상징계에 포획되어 있지도 않은 선인(仙人)들은 일원론적 몸으로 사는 존재들이다. 신과는 달리 구체적 몸을 지녔으나 사회와 문명이 요구하는 행위 연속으로서의 삶으로부터는 탈존한 이들이니 생의 과정과정이 춤일밖에. 지극할 때(그저의 유흥물이 아닐 때) 예술의 수행과 경험은 이 지대, 선인적 차원에서의 일이다. 일상을, 일상의 바탕인 문명으로부터 탈주해보는 시간. 그리하여 주관의 경계를 확장하고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층위로의 진입을 시도하기. 작품은 권주가(勸酒歌)로 개시된다. 음주 역시 신선적 행위다. 정신과 육체의 관성을 무너뜨리기.

이경구와 임진호와 지경민은 무대에 두 축을 세워놓았다.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와 이펙트(effect)를 입힌 목소리, 전통 타악과 앰비언트 사운드,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동시에 진행되는 투 트랙의 세계. 선계(仙界)와 인간계가 병치된 고블린파티 세계에서 취기로 항진된 몸들이 이원적 춤을 빚는다. 흰색과 검은색, 한복의 선을 지닌 서양의복을 입은 여덟 무용수가 발뒤꿈치로 딛는 잰걸음과 잔영(殘影)을 가시화하는 팔의 움직임 등 우리 전통춤의 세부사항이 간직된 컨템퍼러리댄스의 프레이징을 춘다. 춤을 추다가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다가 소반을 두드리며 넌버벌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를 수행하기도 한다.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신선'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개인적 몸성의 발현으로서의 춤장면들과 공생(共生)을 표기하는 집단무의 장면, 유쾌함과 그로테스크함, 평행하는 이원성의 병치로 구축된 표면과 배면 사이,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출몰하는 도깨비들. <신선>의 작가들은 제목자로 ‘神仙’을 명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선(新線)’, 전통춤의 선과 현대춤의 선, 이 세계의 경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맞대어 중의적 시공간, 새로운 실존의 양상을 출현시켰다.

 

차진엽 <몽유도원무>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움직임 연구 및 출연: 김미애·김은이·박지은·조용진·박혜지·황태인·박준명·최호종·이도윤

고블린파티의 방법론이 병치였다면 차진엽은 융복합의 진수를 보여준다. 컨템퍼러리댄스의 진앙지였던 서유럽의 무용단들(영국의 호페쉬 셱터 무용단Hofesh Shechter Company과 네덜란드의 갈릴리 무용단NND/Galili Dance 등)에서 일찍이 체득된 경험으로부터일까, 차진엽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몸성(corporeality)의 현전으로서의 춤에 적극적으로 타매체를 가세시켜 그 운동성을 강밀도(剛密度)로 심화해내고 있다. 2012년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학제간 댄스 퍼포먼스 그룹(interdisciplinary dance performance group) 콜렉티브A(Collective A)를 결성, 예술감독으로서 그 전위적 미학 여정을 책임지고 있는데 <몽유도원무>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안견의 산수화 <몽유도원도>를 참조하여 현실경에서 이상경으로 나아가는 군상으로부터 ‘살아있음’ 그 자체 굽이굽이에서의 생명력을 채굴해내고 축원하는 본작에서 시각예술은 생명이 그 역능을 펼치는 바탕적 세계를 상징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조형해낸다.

본래적으로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 종합예술이었던 춤장르에 현대적 감성과 새로움에의 가능성을 부가해주는 건 역시 신생한 장르, 영상이다. 영상은 프로시니엄이라는 블랙박스를 세계의 어느 곳, 어느 경지로든 개방해내고 인간의 생래적 감관으로는 지각 불가능한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인 세계를 구현해내기도 한다. 심지어는 인간의 형상으로 등장해 군집을 보충하거나 심층적 자아를 가시화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유용한 것은 자칫 위험하다. 중력의 제한을 받지 않아 거침없이 운동하고, 조명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체로 발광하는 영상의 생생함은 종종 양껏 추어올린 인간의 생명성으로서의 춤을 잠식해버리곤 한다.

의외로 자주, 밸런스를 잃고 본질을 헌납하는 실패한 춤작품들이 목격된다. 걸작은 어차피 무수한 범작과 실패작들의 둔덕에 세워지는 기념비이니 그 무수한 시도들로부터도 어떤 가능성을 발견해내고자 마음 쓰지만, 영상과의 불화는 어쩐지 몸을 침탈당하는 양 춤의 무화(無化)를 목도하는 양, 근원적 위기감으로 들이닥치기도 한다. 현대예술을 다루는 담론들의 어떤 예각대로 정말로 몸을 인용하는 미디어아트와 미디어아트를 불러들인 춤작품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을 수 있을까. 스펙터클과 예술작품 사이에서 방황하는 무수한 작품들, 그 사이에서 차진엽의 작품들은 춤으로서의 그리고 예술작품으로서의 어떤 품위들을 보증해낸다.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 (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 (사진제공=국립무용단)

차진엽의 작업은 미디어아트와 춤의 총출동이다. 본작에서 스크린과 영상은 세계의 물질과 이념, 그 총체를 구현한다. 흰옷 차림의 무용수들이 허리춤까지 오는 이동막 뒤에서 춤을 개시한다. 스크린 부분막으로써 흑백·그림자·현실/색채·실체·이상으로 구분지어진 일상적 세계의 두 쁠랑(plan, 內屬面)이 제시된다. 사람들은 그 분열적 세상을 떠나 무릉도원, 안온한 일원적 거소(居所)에서의 온전한 삶을 찾아 나선다. 영상은 근경에서 현실로, 중경에서는 자연적 기세(氣勢) 혹은 인간적 무의식으로, 원경에서는 바탕적 자연으로 세계의 온통을 출현시키고 사람들은 그 세계를 걷고, 노동하고, 유희하고, 희구하고, 번뇌하고, 성취하며 살아낸다. 그 여정의 클라이맥스에서 마침내 지극해진 양자, 세계와 인간의 삶이 섞인다.

‘섞인다’는 표현은 과장적 수사(修辭)가 아니다. 검은 빛무리 영상으로 표지되는 세계의 운동과 무의식과 충동(Trieb)으로부터 발현하는 몸성적 춤의 연동(聯動)이 명징한 실체성으로 드러난다. 그토록 인상적인 춤의 장면이 휘몰아치고 나면 마침내 도원이 열리고, 비로소 생생한 생을 성취하여 거듭난 사람들이 각기 선연한 빛을 발하면서(명도와 채도가 높은 의상과 각자에게 주어지는 조명) 작품의 시간과 의미는 종결된다. 시각물의 외밀한 힘과 춤의 내밀한 힘이 조성해내는 팽팽한 균형, 임계치까지 충전된 감각과 의미의 향연.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더블빌 - 몽유도원무' 공연사진(사진제공=국립무용단)

장면에서의 춤들은 춤의 어느 하위장르로도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 차진엽이 끌어낸 무용수들의 내부다. 차진엽과 협업하는 작가들(미디어아티스트 문규철과 황선정, 음악감독 haihm과 심은용)이 베어낸 세계에 온전히 침잠하고 그 실존을 충분히 현행화해내는 무용수들의 전(全)시간이 출현하는 존재론적 춤. 이렇게 맨몸의 춤들이 시각예술의 현란하고 능수능란한 표현력을 견디어낼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춤적 상승(synergy)을 창출해낼 수 있을 때 작품은 춤작품으로 건립된다. 차진엽은 융복합이라는 새로운 대지에 굳건한 춤의 기둥을 세우는 춤작가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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