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21) - 나를 언어로 규정하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21) - 나를 언어로 규정하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2.06.01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덜란드 풍차마을 (사진제공=김윤정)
네덜란드 풍차마을 (사진제공=김윤정)

[더프리뷰=서울] 나는 올해 하고 싶었던 신작 지원에 떨어졌다. 본의 아니게 작업을 할 때보다 더 자유로운 삶이 된 것이다. 올해 계획을 묻는 지인들에게는 신나게 놀러 다니며 나다움을 더 찾는 시간을 가질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어딘지 좀 더 있어 보이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진짜로 올해는 목적 없는 여행도 다니며 맘껏 책도 읽으며 자유를 누리고 있다.

심지어 떨어진 지원서 안에, 아직은 글자 안에 갇혀 있는 하고 싶었던 작품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내 마음은 떠나 있다. 실현되지 못한 작업의 콘셉트는 버림 받은 애인처럼 잊힌 사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자유롭게 여행도 하고 책도 맘껏 읽으며 지내다 보니 진짜 내 의지로 이런 시간을 만든 것처럼 너무나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여행을 다니는 시간 이외에는 어떤 의무감도 없이 내 안 깊숙하게 침잠하는 글을 천천히 읽으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야말로 단순하고 꾸밈없는 현존으로 채워지는 유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아늑한 침묵이 나의 표면을 감싸고 한 단어 한 문장들이 나의 심연으로 떨어지면서 내 안의 비가시적인 것들과 부딪치며 요동친다. 그런 내면의 역동의 변화를 즐기는 것이다.

몸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나는 왜 이토록 지면에 고정된 단어와 문장들에 열중을 할까? 도 생각해 보지만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동안은 늘 편식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성향을 따라 책을 보다가 요즘에는 평소 관심이 없던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조금 힘겹게 시작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아는 것들은 적어지고 모르는 것들이 늘어난다. 너무 신기하고 새롭다. 새로운 세상은 점점 더 나를 비우며 모름의 공간을 늘려준다. 나는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점이 되고 단순해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너무 멋질 것 같다는 공상도 해본다.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신간. 상수동 펠리칸 카페에서. (사진제공=김윤정)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신간. 상수동 펠리칸 카페에서. (사진제공=김윤정)

독서 <숲은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사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어쩐지 인간 중심적 사고에 갇혀 그닥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나는 요즘처럼 물리적, 정신적으로 시간이 있을 때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Antropology beyond the human)’이라는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 1968-)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고 있다. 이 책은 한 장 한 장 넘기려면 시간이 걸리고 인내가 필요한데 읽다보면 온몸과 마음이 경이로움으로 가득해지는 책이다. 처음에는 아마존 숲의 이야기가 어쩐지 그렇게 당기지 않았고 시작도 조금은 힘들었다. 나는 사실 환경에 관한 다큐도 보았지만 워낙 예민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인간보다도 몇 천만년이나 오랫동안 존재했던 자연을 그저 백년 남짓 사는 인간들이 걱정해야 한다는 게 그랬다. 그런데 이 책은 환경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경이롭게도 아마존 야생의 숲의 눈으로, 동물과 식물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며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세상을 깊고 넓게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인간의 이해와 성찰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책이다.

뒤셀도르프의 머시(Mercy) 까페에서 (사진제공=김윤정)
뒤셀도르프의 머시(Mercy) 까페에서 (사진제공=김윤정)

프랑스의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 1951-)은 독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예요.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 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건 아닙니다. 난 위로 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이해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는 또 이렇게 말한다.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다.“

<더프리뷰>에 글을 연재하면서 지인들의 피드백을 듣는 재미는 생각보다 쏠쏠하다. 친한 지인들 또는 친구들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글이 더 재미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독자들, 그야말로 순수한 타인들이 나의 개인사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싶어 어느 정도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과는 거리를 두고자 했었다.

중요한 건 내가 보고 느끼는 이야기들을 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는 중요하다. 나도 하나의 이야기이니까. 우리가 행복을 현실이라는 실체에서 찾기보다는 생각 안에서 찾듯이 인간도 언어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나는 나 자신과 너무 밀착되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며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나를 언어를 통해 규정해 보기로 한다. 이 글을 읽는 지인들, 타인들에게 다분히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의 나에 관한 글에 미리 용서를 구한다.

 

김윤정 ‘Inter-View’ 공연 장면 (사진제공=김윤정)
김윤정 ‘Inter-View’ 공연 장면 (사진제공=김윤정)

‘나’ 를 언어로 규정해보자

나는 인간과 사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 공감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가족과 친구들도 있으며 평소에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감사할 줄 아니 불행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인생에 절대 불가항력적인 슬픔도 느낄 줄 알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직관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표현해 보겠다고 무대를 떠나지 않고 아직은 남아있는 열정에 기대어 가고 있기도 하다. 지쳐서 떨어질 만도 하지만 아직은 포기할 만큼의 여력이 없으니 그 또한 다행? (또는 불행?)이다.

나의 삶은 적당히 고요하고 평화롭고 또 적당히 불안하고 고독하다. 가끔 내가 없는 곳에서 씹히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에게 큰 해를 끼치는 정도는 아니므로 그런대로 참 괜찮은 라이프로 보인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 여긴다. 누군가는 나에게 긍정의 에너지라는 말을 가끔 하는데 나의 긍정과 행복지수는 의외로 무지 단순한 이유에서다. 일단 야망이나 꿈이 크지 않기 때문 이라는 진단을 스스로 내린 바 있다. 그리고 나는 사실 낙천주의보다는 염세주의에 가까운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영원히 이별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낙천적인 성향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 보면, 니체의 말처럼 ”삶은 헛되고 헛되니 또 헛되도다.“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모두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무의미조차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가 하는 내 나름의 궤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가 지닌 긍정의 비밀이다.

Time is a river

the irresistible flow of all created things

one thing no sooner comes in to view

than it is hurried past and another takes its place

only to be swept away in turn.

시간은 강물

모든 창조물의 막을 수 없는 흐름

사물은 순식간에 존재를 잃고

다른 사물에게 자리를 내준다.

오직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아우렐리우스

나는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니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낭비하는 일이 적은 편이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만족한 삶. 아니 만족하다고 우기며 살다보니 만족해지는 삶, 내 중심적으로 살다보니 무언가 충족해지는 삶.

나는 살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는데, 계획을 세우기에는 늘 순간순간에 처한 일들이 충만함으로 다가와서 요즘처럼 한가한 나날들조차 읽고 싶은 책들을 천천히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인생을 허비하는 시간 동안 늘 생각하고 즐기면서 자연이 햇살의 자양분을 빨아 들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패턴의 나의 삶 뒤안에는 그만큼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내 중심적인 관점에서 슬쩍 넘어가기로 한다. (언젠가 이 이야기는 따로 써야 할 것 같다)

어린 시절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빨강머리 앤>이 했던 말 중에서 늘 내 안에 맴도는 한 마디가 있다.

“내 기준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래”

 

드레스덴에서 (사진제공=김윤정)
드레스덴에서 (사진제공=김윤정)

자기다움이란 것?

이렇게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나다워지기’를 위한 것들에 집중을 해보려고 한다. ‘자기다움’ 이란 무엇일까? 자기다움이라는 본질 안으로 들어가려면 나의 중심에서 나오는 안테나와 내게 보내지는 시그널의 주파수를 잘 맞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잠시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끄고 자기답지 않은 건 버리고 비워야 한다. 그리고 자기 소리를 들어야 한다. 각자가 자기다울수록 우리는 다를 것이고 우리는 다르면 다를수록 빛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가보지 못한 곳을 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도 좋지만 내 안에 들어가 나를 여행하고 또 나와서 나에 관한 관찰을 써 보는 것은 무언가 나에겐 색 다르다.

하루 종일 우리들 마음은 변하고 물결친다. 자신을 견딘다는 게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견뎌야 한다. 지루함과 남루함과 그리고 초라함과 외로움조차 견디고 견뎌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일상의 풍족함, 기쁨, 성취감, 자신감, 행복함도 잘 견뎌야 한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해야 하기에 더욱더 그 순간들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인식하고 느끼고 또 비밀들로 가득한 표식들을 읽어내야 한다. 올해 내게 지원사업에 떨어져 공연을 못하게 된 것도 어쩌면 나를 돌아보라는 오픈 표식(Open Secret)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종일 그런 표식들에 싸여 있다. 얼마만큼 우리가 그런 암호들을 잘 분석하고 따라가느냐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분석은 수학적인 공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열려있어야 하고 나다움에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힘이 필요한 오늘이다.

하루하루 모험의 시간이 다가온다. 즐기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던지자. 그리고 사랑하자. 나누자. 내일 나의 종말이 올 수 있으니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자.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언젠가 내 작품 <울프> 공연에서 텍스트로 썼던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라는 책 속의 글로 마무리한다.

“침묵이 얼마나 좋은가. 이 커피 잔, 이 테이블.

말뚝 위에서 날개를 펴는 외로운 바닷새처럼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이 커피 잔, 이 나이프, 이 포크 등의 단순한 물건들, 사물의 본질, 물건 본연의 물건, 나 자신인 나와 함께 언제까지나 여기에 앉아 있게 해 달라.

How much better is silence; the coffee-cup, the table. How much better to sit myself like the solitary sea-bird that opens its wings on the stake. Let me sit here for ever with bare things, this coffee-cup, this knife, this fork, things in themselves, myself.”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