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경희댄스씨어터 ‘박재현의 안무노트’
[공연리뷰] 경희댄스씨어터 ‘박재현의 안무노트’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6.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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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부산] 하영신 무용평론가 = 의뢰나 출품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이 다반사고 게다가 집체형 장르인 무용예술, 또렷한 자필적 낙관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이 장르에서 박재현은 아주 고유한 징표를 지닌 작가다. 매 작품 불편하리만치 자신만의 예리한 각도로 삶을 베어내 보이는 그가 레퍼토리로 고정된 세 편의 작품전을 펼쳤다. 지난 5월 29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등 세 편이 <<박재현의 안무노트>>라는 표제로 묶였다.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만난다. 꽤 오래 전 첫 질문으로부터도 간명하게 튀어나왔던 답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감응력’.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깊게’ 산다는 것 아닐까. 일상도 그에 편직(編織)되는 예술의 순간들에도 깊숙이, 스스로에게도 더불어 지내는 이들에게도 혹은 더 널리 동시대를 사는 세계 시민들에게도 깊숙이 반응하고 관여하는. 감응력은 감상 능력치에도 해당되지만 제작과 수행에는 더욱이 단초(端初)적이다. 그 항진된 감응력으로부터 비로소 작가의 발화 욕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의 제작이 협업의 경향을 띠고, 특히 무용예술은 그 주질료인 몸짓의 발견과 집적(集積)이 참여하는 무용가들 모두의 몸으로부터 전개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작품은 예외적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이름표를 달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란, 무언가 속엣말을 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욕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문자로써든, 형과 색으로써든, 음으로써든, 혹은 몸으로써든, 무엇으로써든 예술의 작가는 잘 다룰 수 있는 매체로써 그 자신의 발화 의지를 실현해내는 자다. 설령 내용이 아닌 텍스처로서의 텍스트를 제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왜 그/그녀가 그런 질감과 강도를 선택하고 구현했는지 그래서 세계의 어느 단면을 베어낸 것인지, 유추를 행하게 만드는 숨겨진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개는 쉽게 파악되지 못하는 현대예술. 그러기에 컨템포러리 예술작품의 강력한 콘텐츠란 더욱이 진정성이 아닐까 싶다. 현대예술의 감상은, 포괄적으론, 예술문화사적 지식을 기반으로 작품의 위상을 재단해볼 수 있는 인식적 조우와 ‘아!’하고 알아차려지는 직관적 조우 이렇게 양단으로 가늠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후자에서의 감명을 예술경험의 지극한 층위라 판단한다. 부분과 전체, 순간과 지속, 이해와 향유, 경험과 체험 간의 차이가 진다.

가끔 그 구사가 다소 거칠고 울퉁불퉁 심지어 빈 구석이 있어도 어쩐지 찡하게 감동적인 예술의 순간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그 때가 소위 ‘진정성’으로 채워진 시간들일 것이다. 진심,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어떤 것들이 스스로의 진실을 밝히는 순간들. 일종의 직업병이 있어서 그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면 주변의 반응과 사후(事後) 로비의 분위기를 습관적으로 살피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 혹은 그러한 순간을 담지한 작품은 예술경험의 축적이 얼마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각인된다. 진정성의 위력이다.

지금 당장의 학문과 산업과 시장의 경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고 한들, 그 방식과 미감이 현재 트렌드에 결착되어 있지 않다고 한들, 진정성으로 충전된 작품은 언제고 공명이 깊다. 동의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편했든(快) 불편했든(不快) 간에 ‘진짜’는 힘이 있다. 박재현의 작품에 그 힘이, 있다.

박재현은 아주 짙은 작가다.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누구도 답을 구할 수 없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아마도 일상적 세계에는 영원히 포섭되지 않을 우리시대의 마지막 보들레르. 한 겹 가리지 않은 맨 몸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 춤작가. 혹은 내 안의 한 구석.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공연사진(사진제공=박병민)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공연 모습(사진=박병민)

삶의 비의를 겪기,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

<굿모닝 일동씨-슬픔에 관하여>(이하 굿모닝 일동씨>는 세 작품 중 가장 최근작이다. 2020년 AK21 국제안무가육성경연에 출품해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21년 같은 무대에서 축하연을 거쳐 이번이 세 번째 무대. ‘일동’은 작품에 출연하는 소리꾼 양일동의 실명(實名)이다. 그러나 관람은 그의 슬픔을 목격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박재현은 정동(affect: 감정(feeling)·정서(emotion)보다 내재적인, 인지적 상태보다 주관적 경험과 생리적 작용을 포함하는 체험적 사태 그 자체를 강조한 정신분석학 용어)의 사태 자체를 구동시키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작품의 시간 30여 분간 우리는 슬픈 서사가 아니라 ‘슬픔 그 자체’와 맞닥뜨리게 된다.

무대장치라고는 모로 선 문(門) 하나가 전부다. 이편과 저편이 엄연히 있는 그리하여 슬픔과 좌절과 분노를 배태(胚胎)한 이 세계에 일단의 무리가 등장한다. 어슬렁어슬렁, ‘피유’ ‘피유’ 공기를 불며, ‘짐짓’ ‘체’ ‘어깃장’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삶을 견뎌낼 재간이 없는, 세계의 주인공일리 만무한 박재현씨들(강수빈, 김현정, 박미라, 서정애, 이나라, 이이슬, 표예찬). 일동씨가 구음(口音)을 개시하면 고레츠키(Henryk Górecki)의 낮고 느리고 무거운 현의 선율(Symphony No.3 'Symphony of Sorrowful Songs' Op.36)도 깔리기 시작한다, 농무(濃霧)처럼.

작품은 다른 곡을 편입시키지 않고 ‘슬픔의 노래’ 1악장과 더불어 전개된다. 그렇다고 춤이 그 번안인 것은 아니다. 고레츠키의 음악은 박재현이 구획한 세계를 채운 물질이다. 슬픔이 충전된 세계, 스멀스멀 슬픔이 유동하고 있는 <굿모닝 일동씨>의 세계. 고레츠키의 슬픔은 그저 공기 같은 것이다. 그 세계를 채우고 그 세계의 성격을 규정하고는 있지만 그에 거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행위를 특별히 견인하지는 않는. 박재현들을 추동하는 것은 양일동의 구음이고 또한 그의 구음은 박재현들과의 작용값이다. 음색, 고저(高低), 파동으로 박재현들의 상태는 표지되고 그것은 종종 생에의 애착, 결기로 결정(結晶)된다.

“울~~~~지 마라! 나... 나는! 괘괘...괘안찮아.” 작품 초반에 놓인 박재현의 독백은 본작의 내용을 함축한다. 괜찮지 못하므로, ‘나는!’에서 끊기고 ‘괜찮아’에서는 삼켜지는, 비틀리고 꺾이는 문맥, 그러나 스스로에게 살아내기를 명령하는 그 기묘하고 애달픈 발화는 그저 쉬운 대사(나에게는 ‘춤작품’은 대사가 아니라 몸짓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가 아니라 존재를 온전히 증빙하는 몸의 노래, 즉 ‘춤’이다. 슬픔의 세계에 거한 자들이 있는 힘껏 슬픔을 겪어내는 것, 그게 이 작품의 일, 춤의 내역이다. 겪어낸다는 것은 잠식당하는 게 아니다. 마찰을 빚고 저항을 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을 보전해내는 일, 그 과정들이 이 작품의 춤이 되니, 생의 내부를 펼친 그 춤이 절절하지 않을 리 있나.

모티프를 추동시켜 어떤 정감(‘슬픔의 노래’는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폴란드인들을 기린다)을 증폭해나가는 고레츠키 음악의 구조처럼 박재현도 불안, 고독, 절망, 회한, 그 슬픔의 내속면(內屬面)들을 중첩시켜 거대한 슬픔을 완성한다. 일동씨와 박재현, 박재현과 7명의 무용수들. 대상적 타자들 혹은 내면의 타자들 어쩌면 과거의 단면들. 강도와 장면을 달리하며 슬픔이 강화된다. 더욱이 슬픔을 예리하게 각성하는 자, 박재현은 타자들 혹은 외화된 자신의 분열을 쫓으며 속삭인다. “넌 왜 태어났을 때 죽지 못했나.” “왜 넌 태어났을 때 죽지 못했나.”

이 외마디는 2019년에 공연한 독무작 <드라마 드라마>로부터 왔다. “난 왜 태어났을 때 죽지 못했을까!” “왜 난 태어났을 때 죽지 못했을까!” 박재현은 한 번씩 소극장 독무전을 통해 자신을 생짜로 내어놓는다. 독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作)이었던 <드라마 드라마>에서 그는 상처적 인간의 문제적 고독을 조밀하게 시연했고 그 위독한 존재감에 관객들은 너무도 명징하게 생을 감각해야 했었다. 통각(痛覺), 일상을 비껴 감각하자면 고통 아닌 삶이 있을까. 그의 고독, 그의 슬픔, 우리 모두의 고독, 우리 모두의 슬픔. 일상의 더께를 벗기고 비로소 생을 감각케 하는 게 아니라면 예술의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공연사진(사진제공=박병민)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공연 모습(사진=박병민)

이 사랑 없는 세상에서, <고독-그곳엔 사랑이 없더라>

20여 분 간의 소품인 본작은 제2회 금정산생명문화축제 전국춤경연(2017)에서 ‘이정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야외춤판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을 무대화해낸 경우라 간결한데 차라리 고독이 순전해졌다. 박재현은 그곳에서 그 자신의 것인 고독을 펼쳐보였다.

스포트라이트로 베어진 공간 속에 박재현이 서 있다. 머리 위에 그의 신장보다 길고 앙상한 철제 나뭇가지가 얹혀 있다. 차갑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이고 사는, 근접 불가능한 자 곧 사랑이 불가능한 자. 세계와 열렬히 작용할 수 없는 자이니 그의 움직임은 최소한이다. 그저 조심스러운 운신일진데도 그의 움직임은 한껏 위태롭다. 그 와중에 외발로, 간신하게 버티어내기까지 한다. 중극장의 규모에서 홀로 이렇게 느리고 미분적인 움직임에도 그 정동이 완연하다. 정말로 외롭고 쓸쓸한 자가 저기 간신히 서 있다.

중반부에 흰옷을 입은 여인(변지연)이 등장한다. 고독한 그이에게 다가갈 엄마, 누이, 연인. 깊은 굴신과 명치로부터 출발하는 묵직한 팔놀림으로 두터운 정감을 만들어보이지만, 그녀 역시 고독한 자이다. 그들은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꽤 오래 그의 배회가, 그녀의 춤이 지속될 뿐이다. 간혹 그는 틱 장애처럼, 순간적이고 발작적인 반응을 한다. 오래도록 고독한 자에게 사랑은 외려 견디기 힘든 자극. 마침내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아니 정확히는 그의 나무에로 어렵사리 닿아 그 가지 말단에 불을 밝힌다. 그러나 오래 혼자였던 자는 사랑할 줄을 모르는 법. 그는 자신을 구심으로 회전을 펼치고, 그 자신만의 운동에 가속이 붙고, 종국에 여인은 물러난다. 비로소 그가 잦아들면 무대 양쪽에서 흰옷 차림 무용수들이 하나 둘 걸어 나와 그의 나무 아래 눕는다. 사랑이 불능인 세계, 폐허의 풍경.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공연사진(사진제공=박병민)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공연 모습(사진=박병민)

동정 없는 세상에 희망 한 스푼,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

<인어공주를 위하여-편견>은 2019년 작으로 제28회 부산무용제에서 안무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국무용제 출품을 위한 지역의 경연인 이 무용제에서 박재현은 꽤나 많은 수상 이력을 갖고 있다. 21회에 <노년의 기록>으로 대상을, 25회 때 <금홍아 금홍아>로 역시 대상을, 이 작품으로 세 번째 수상이다. 세계 각국 무용예술가들의 창작여건이 다 어렵지만 지역 작가들은 특히 지난(至難)하니 규모 있는 작품들은 이런 기회를 빌려야 시도 가능하다.

어쨌든 이런 경로의 작품들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있다. 단체의 총역량을 구성력으로 입증해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오늘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 조형적 장면이 많고 그 이야기성이 명백하다. 인어공주는 편견을 겪어야 하는 우리시대 모든 타자들에의 제유. 45분간 박재현은 인어로, 초대받지 못한 자에게 가해지는 위해(危害)의 사건들을 열연한다.

객석을 등지고 누운 인어들의 군무로 작품은 개시된다. 사카모토 류이치(Ryuichi Sakamoto)의 익숙한 서정 ‘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 실린 섬세하고 아름다운 팔동작과 구름의 몸놀림, 인어들의 공동체는 온전하고 평화로워 보이건만 박재현 인어는 직립, 혹은 다른 세계, 다른 삶에의 열망을 지닌다(그것은 예술가의 숙명 아닌가). 전환된 장면에서 그는 은빛 킬힐 위에 간신히 서 있다. 그나마 한 짝, 다른 다리는 맨발, 단차(段差)를 메꾸기 위한 어색한 까치발. 그 쉬운 직립조차 제 각(角)을 갖지 못하는. 박재현 춤의 인상은 대개 그렇다. 정상적인 각도, 용이한 흐름은 못 견디고 탈구(脫臼)적인, 온통 분열되고 한껏 충혈된 몸짓. 강렬하고 불편하다. 우리 사회가 혹은 내가 그런 존재를 껴안을 수 있던가. 일상복을 입은 세 명의 무용수들이 성큼성큼 걸어와 차례로 박재현의 뺨을 때린다. 세 번째 무용수는 기어이 그의 구두 한 짝을 벗겨내 저 멀리로 던져버린다. 날아가는 구두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는 선연히 붉은 실. 구두를 빼앗기고 상처 입은 그는 다시 인어의 자세로 돌아간다. 본연의 세계로 회귀하지 못하고 타자들의 세계에 던져진, 불구적 존재.

열 명의 단원들이 앙상블을 펼친다(강수빈, 김승환, 김현정, 남도욱, 박미라, 변지연, 서정애, 이나라, 이이슬, 표예찬) 연극적 행위로써, 박재현이라는 인덱스와는 다른 기능적이고 조형적인 춤동작으로써 그들은 소위 ‘정상적인’ 사회적 무리지음을 실연한다.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감내하고 있는, 키득키득, 따뜻하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고 사실은 부박한 허투른 결속. 그들이 이리저리 이렇게 저렇게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인어 박재현은 무거운 지느러미 하반신을 끌며 무대의 가장자리를 기어다닌다.

무리들에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인지되지도 않는다. 버림받은 존재들이란 죽은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겨우겨우 움직여 다니기를 포기하지 않고, 무대 위 사건들로부터 시선을 거두지도 않는다. 땅을 지지해야 하는 수고로운 팔과 끌고 다녀야하는 무거운 꼬리지느러미, 마음껏 달리고 차올리고 벌리는 무용수들의 날렵한 사지(四肢) 움직임이 현격한 명암을 이룬다. 힘겨운 자는 더욱 비참하나 그렇다고 거침없는 자들의 삶도 안온한 것은 아니다. 무리들에게서도 어떤 신경증의 징후가 아른거린다.

2019년의 기억에 의지하면, 그 때의 이 작품에는 숨 트일 구석이 없었다. 박재현의 작품들이 그랬다. 매번 삶의 비의 그 겹겹의 누층을 들추는 그는 세상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자였고 그리하여 끝끝내 불화하는 자였고, 껌을 씹거나 휘파람을 불거나 무대에 주저앉아 소주를 들이키거나, 그 시시껄렁한 농담, 그래서 짓게 되는 씁쓸한 실소 정도가 그나마 숨 쉴 구석이었나. 생이나 예술이나 완결 없는 심화의 과정이니 작품이 거듭될수록 가학으로도 피학으로도 치달아 그의 삶 자체가 우려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영판 생경한 장면을 삽입했다. 말미에 느닷없이 조명이 객석을 향했고 그 비춘 자리에서 관객들이 일어선다. 사방으로 환한 인사를 나누고는 무대로 올라와 무대 위 무용수들과 합류한다(강경희, 강민아, 강정윤, 김옥련, 박소산, 박예술, 박은지, 방영미, 이연정, 정다감, 정현주. 이들은 지원을 통해 작품에 참여한 부산의 각 부문 춤꾼들이다).

무대를 가득 메운 무용수들이 토니 베넷(Tony Bennett)의 <Smile>을 춤춘다. 그의 저음 음색처럼 따뜻하고 정다운, 서로들 삶을 환대하는 춤. 그러나 딱 한 곡만큼의 평화. 음악은 다시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의 테마곡 <First Step>(piano version)으로 맞물리고 모두 다시 우주적 막막함, 그 불안, 이 세계의 호흡을 춤춘다. 분절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이 높은 강도로 치달아가고, 숨이 차오른 무용수들이 단말마 거친 호흡을 뱉으면 암전. 갑자기 세계가 미소로 가득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 판타지 아닌가. 박재현은 불화하는 예술가의 초상이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로 껴안는 자이기도 하다.

커튼콜은 다시 <Smile>(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의 경쾌한 버전으로 오버랩된)이다. 다같이 오래 서로를 축하하는 춤을 추며 헤어지는 커튼콜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박재현의 세계를 겪은 후라 그 감회가 한결 생생하다. 그래 가끔은 이런 순간도 있어야지, 세계가 그 지경이래도 그러니 예술의 순간이나마 찰나라도 한 겹 구원이 있어야지, 위안이 깊다. 세계를 그 속의 삶을 정면(正面)하여 본 후라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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