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종소리에 무너진 유토피아, 베르디의 장엄한 비극
[공연리뷰] 종소리에 무너진 유토피아, 베르디의 장엄한 비극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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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지난 6월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또 한 번의 도전이 펼쳐졌다. 창단 60주년 기념 정기공연이자 제 13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참가작으로 베르디의 대작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국내 초연한 것이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서곡 신포니아와 주인공 엘레나의 아리아 ‘고마워요, 사랑하는 벗들이여’가 유명하지만 극장에서는 좀처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다. 5막이나 되는 장대한 스케일, 난도 높은 아리아 때문이다.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를 위해 위촉된 이 작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의 압제와 시칠리아의 항거를 다루었고 따라서 파리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1282년 점령군 프랑스에 대항해 일어난 민중봉기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담은 것이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계열의 작품으로,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민족음악가답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역사극을 완성했다.

짓밟힌 시칠리아의 독립을 부르짖는 귀족 엘레나와 신분은 낮으나 같은 꿈을 꾸는 청년 아리고, 민족의 지도자인 투사 프로치다, 그리고 무자비한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가 주인공이다.

작품은 원래 그랜드 오페라로 만들어져 30분 가량의 발레 장면이 등장하나 이번 공연에서는 배제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무대는 상당히 현대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모두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 1막과 5막의 아름드리 오렌지 나무는 평화로운 땅 시칠리아를 상징했고, 원주민 시칠리아인은 오렌지색 의상, 점령군 프랑스군은 푸른색 의상을 걸쳐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시칠리아 독립투사 아리고가 출생의 비밀을 안 뒤 고통스러운 운명을 저주하며 오렌지색에서 푸른색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5막에서는 두 나라의 결합을 의미하며 모두 흰 옷을 입어 유토피아 같은 세계를 묘사했다.

다만 행성을 조성한 4막의 무대는 난해했다. 그 행성을 이용해 엘레나의 투옥과 사형을 표현한 것도 어색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연출적으로 혼란스러운 장면은 2막 시칠리아인들의 혼례 장면에도 있었다. 프랑스군이 신부들을 납치하는 원작과 달리, 남녀 커플과 동성 커플들이 등장했고 프랑스군이 동성 커플들만 살해했다. 연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서사를 시각적으로 풀어나가 이해를 도운 면도 있었다. 원작은 오빠 페데리코 공작의 장례를 마친 상복 차림의 엘레나가 등장해야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엘레나가 오빠의 죽음을 목도하도록 연출했다. 또 3막에서 아리고가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며 혼란에 빠진 장면에서는 어머니의 영혼을 등장시켰다.

무엇보다 베르디의 음악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한 무대였다. 출연진의 탄탄한 기량, 오케스트라의 표현력과 합창단의 노래까지 만족스러웠다. 이 오페라가 세계적으로 자주 공연되지 않는 이유가 쉽지 않은 성악가 섭외라는 말도 있는데, 이날의 성악가들은 정상급이었다.

1막에서 엘레나는 ‘바다여, 아직은 잠들라’를 부르며 민중의 용기를 북돋운다. 이 드라마틱한 아리아는 엘레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소프라노 서선영은 강인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너희의 운명은 너희 손에 있다. 담대한 바다의 자식들이여, 용기를 내라!’고 외치는 엘레나의 노래는 눌려있던 시칠리아인들을 각성시켰고, 점점 뜨거워지는 합창이 감동적이었다.

3막 연회 장면의 피날레 역시 주인공들과 군중의 합창이 압권이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의 주인공들과 군중의 장엄한 합창은 거센 파도가 되어 무대를 휩쓸었다. 노이 오페라 코러스의 활약이 컸다.

작품은 악역 몽포르테에게도 인간미를 부여한다. 믿고 보는 양준모의 입체적인 연기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몽포르테가 아리아 ‘기쁨 속에서’를 부를 때, 그가 수많은 전투와 승리 속에서도 끔찍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가련한 남자였음을, 아들을 만난 기쁨에 몸을 떠는 아버지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강요셉의 아리고. 시칠리아 공녀 엘레나를 사랑하는 독립투사이나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를 떨치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 강요셉의 순수하고 청량한 음색은 사랑과 조국 앞에 진심인 청년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말한, 몽포르테 총독이 아버지임을 알게 되는 순간, 외로웠던 그의 과거가 미세한 떨림과 처연한 노래로 비쳐졌다. 강요셉은 결코 큰 몸짓을 하지도, 표정을 많이 쓰지도 않았으나, 성악가는 음악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4막의 ‘통곡의 날’에서, 진심어린 아리고의 고백 앞에 엘레나는 기구한 아리고의 운명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어진 엘레나의 ‘아리고! 난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를 들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서선영은 모든 노래에 최선을 다한다. 5막의 ‘고마워요, 친애하는 벗들이여’를 부를 때 고난도의 기교를 뽐내는 드라마틱 콜로라투라로 찬란히 빛나다가, 곧이어 프로치다와의 이중창에서 고뇌와 번민을 토하는 그녀의 연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투사 프로치다'(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민족투사 프로치다'(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프로치다의 최웅조는 조국의 독립만을 바라보는 민족투사로 나온다.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2막에서 부른 ‘오 조국이여, 그대 팔레르모’는 깊고 너른 음색으로 위엄과 의지를 결연히 드러냈다. 5막에서 엘레나에게 결혼식에 일어날 거사를 알릴 때 보여준 분출 직전의 화산 같은 긴장감도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의 탄력적인 호흡 사용에 감탄했던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 종소리에 봉기한 민중들에 의해 아리고가 쓰러지고 엘레나는 절규한다. 흰 색의 유토피아가 종소리에 무너지는 엔딩, 몰아치는 음악은 끝까지 스펙터클했다.

홍석원이 지휘한 코리아쿱 오케스트라는 베르디의 비장미 넘치는 드라마를 역동적으로 펼쳐나갔다. 베르디 음악의 심장을 울리는 힘을 다시 한 번 느낀 무대였다. 국립오페라단의 초연 시도가 1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고정 레퍼토리화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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