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명불허전 고성현이 견인한 치명적인 비극
[공연리뷰] 명불허전 고성현이 견인한 치명적인 비극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7.0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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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오페라단 ‘리골레토’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저주(La Maledizione).

리골레토가 죽은 딸을 끌어안고 외치는 그 단어. 베르디는 원래 작품 제목을 ‘저주’로 하려 했었다고 한다.

지난 6월 17-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고성현 주연의 <리골레토>가 올려졌다. 지난 3월 제1회 대한민국오페라 어워즈에서 대상을 수상한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무대였다. 글로리아 오페라단은 파격적인 연출보다는 고전적인 무대와 연출, 그리고 실력 있는 성악가들로 승부한다. 이번 무대 역시 최이순의 연출은 전통적이고 안전했다. 그리고 고성현과 박미자의 음악과 진심을 담은 연기가 마음을 울렸다.

고성현이 대단한 바리톤임을 새삼 확인했던 무대였다. 리골레토는 극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악행을 일삼는 괴물이면서 딸을 지키고자 하는 아비.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리골레토는 악한이다. 리골레토의 행각을 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아내와 딸을 유린당한 귀족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여인을 납치해 공작에게 환심을 사는 광대. 자신의 딸 질다가 얼마나 귀하고 천사 같고 보석 같은 존재인지를 외치면서, 동시에 체프라노 백작 부인을 납치하는 음모에는 죄책감 없이 가담한다. 그의 악행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광대 주제에 공작을 등에 업고 귀족들을 깔보았다는 이유로 리골레토는 귀족들의 표적이 된다. 자신들의 아내와 딸을 건드린 자는 만토바 공작이지만, 자기들의 명예 실추를 비웃는 리골레토를 봐줄 수는 없는 것. 감히 공작에게 저항할 수는 없지만, 꼽추 광대는 만만하니까.

몬테로네 백작은 딸을 농락한 만토바 공작과 그를 야유하는 리골레토에게 저주한다. “독사 같은 놈, 아비의 고통을 비웃는 놈, 저주를 받아라”

악행을 저지른 장본인 공작은 죄책감 없이 몬테로네 백작을 체포하라 명령하고, 여전히 새로운 여인을 찾아 두리번거릴 뿐이다. 그러나 ‘아비’ 리골레토는 ‘저주’라는 단어가 자꾸 걸린다. 자신의 타락을 기형적인 신체와 세상 탓으로 돌리면서도, 딸 질다를 두고는 자기의 죄를 두려워하는 리골레토. 자신의 적들이 딸을 해칠까봐 질다를 꽁꽁 숨겨놓았으나, 질다는 적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고성현은 리골레토의 캐릭터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온몸을 진동시키는 듯한 발성도 압도적이었지만, 몬테로네의 저주 앞에 불안해지는 심경을 미세한 떨림과 호흡으로 표현하며 청중을 이 비극에 몰입하게 했다. 2막의 ‘가신들,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를 부를 때, 리골레토의 지난 악행은 잊히고, 가련한 아비의 절규만 남았다.

이준석이 연기한 스파라푸칠레와의 장면도 긴장감을 조성했다. 베이스와 바리톤, 두 저음의 섬뜩한 울림은 악인들의 대화를 완성시켰다. 반면 희생자 몬테로네를 바라보며 공작을 향한 복수를 다짐할 때는 선하고 강단 있는 황규태의 음색과 대비되는 어둡고 깊은 발성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질다와의 이중창 ‘울어라, 나의 딸아’에서 박미자와 고성현의 호흡은 최상이었다. 소프라노 박미자는 ‘그리운 이름’의 마무리에서 다소 호흡이 흔들렸으나, 맑고 깨끗한 음색, 우아한 연기로 아름답고 처연한 질다를 그려냈다.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테너 정호윤의 목소리는 윤기가 흐른다. ‘이 여자나 저 여자나’와 ‘여자의 마음’을 부를 때는 화려하고 시원하다. ‘그대의 눈물이 보일 것 같다’를 부를 때는 로맨티시스트 같고, 막달레나를 유혹하며 ‘언젠가 너를 만난 것 같다’를 부를 때는 저돌적이다. 공작의 매력은 살인청부업자 막달레나의 마음도 움직이고, 질다는 공작을 위해 죽기까지 한다. 막달레나와 공작, 리골레토와 질다의 사중창 ‘아름다운 사랑의 딸이여’는 이 작품의 백미다.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의 풍부한 음색이 막달레나의 매력을 고조시켰다.

마지막 장면, 리골레토가 죽어가는 딸을 앞에 두고 울부짖는데 그 비통함이 전해져왔다. 그가 휘두른 복수의 칼이 오히려 심장을 파고든 것이다. 그런데 질다는 죽어가면서도 공작을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잠시 생각했다. 이 오페라의 메시지는 용서인가?

아니다. 딸의 주검 앞에서 리골레토는 외친다. 저주! La Maledizione!

이 작품의 원제가 될 뻔했던 ‘저주’가 메시지다. 공작은 뻔뻔하게 똑같은 짓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하수인은 저주의 굴레에 갇혀 이승의 지옥을 맛보는 것. 200년 전 베르디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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