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노회한 문명 속 불구적 삶 –정훈목 ‘아난(ANON)’
[공연리뷰] 노회한 문명 속 불구적 삶 –정훈목 ‘아난(ANON)’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8.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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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컨템퍼러리댄스의 진원(震源)이었던 벨기에, 벨기에에서도 특유한 단체 피핑톰(Peeping Tom)의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정훈목이 자신의 단체 주목댄스시어터의 예술감독으로서 신작 <아난(ANON)>을 고국 무대에 펼쳤다(7월 15-1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곧(soon)’이라는 의미의 부사이자 ‘익명의(anonymous)’라는 형용사의 약어인 ‘anon’을 제목자로 새긴 60여 분간의 작품은 노회(老獪)한 문명 속 이름 없는 불구적 삶을 경고하는 우리 시대의 묵시록이다.

묵시록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굳이 누가 고하지 않아도 스멀스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 간신히 접어둔 그 불안. 문명은 허약하고 결국엔 위해할 것이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명을 지탱하는 인간의 약속들이 허위(虛位)로 증명되고 있다. 명분들은 쉬이 배반되고 단어들의 액면가조차 쉽사리 부도나는, 그리하여 한 나라 안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서, 혹은 동맹 단위들 사이에서, 충돌이 작열하는 시절이다. 무기로 싸우든 자원으로 싸우든 화폐로 싸우든 기술로 싸우든, 어떤 식으로든 인류 전체는 쟁투에 처해 있다. 모르는 척할 뿐이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노회, 오래된 문명은 교활하나니, 첨예해질 대로 첨예해진 입장들 앞에선 그 무엇도 사실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명증(明證)한 것은 자연, 녹아내리는 빙하, 수상한 기후, 멸종하는 종(種)들 그리고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인류의 역사일 텐데 세계의 도시들을 떠다니는 소문들로 소비될 뿐이다. 간혹 누군가 힘주어 호소한들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상장(賞狀)으로 며칠쯤 회자될까, 우리는 잊는다, 잊지 않고서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멈출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은 문명의 정교한 회로에 실린 목숨들, 불길한 속도와 불투명한 방향, 공멸의 예감을 가능한 떨치고 일상에 매몰되는 수밖에. 임계치에 임박했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상승하는 기온과 해수면, 노후한 원자력 발전소, 어쩌면 핵 버튼, 유예된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거나 온다한들 견딜법한 지옥일 터이니 ‘소확행’, 사소하게 사는 법을 익히며.

그 간신한 망각을 헤집는 고약한 무리들이 있으니 바로 예술가 집단. 특히 동시대 무용예술은 낙관(樂觀)을 말하지 않은지 오래다. 불만이 토로되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예술 형식 안에서 춤은, 무용예술은 몸으로 하는 사유다. 낙관을 전망하는 사유를 보았는가. 클래식발레의 동화를 접고, 네오클래시시즘의 유미주의(唯美主義)를 접은 후론 내내 위독한 시절을 그것도 온몸으로 증빙해보이고 있는 그 불온한 집단들. 피핑톰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고 정훈목은 그들과 함께 오래 지냈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벨기에, 피핑톰, 초현실주의의 맥락에서

벨기에,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초현실주의의 나라.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 현실의 외부, 리얼리즘의 바깥. 1924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선언으로부터 본격화된 이 흐름은 기괴한 이미지, 유희적 판타지로의 맹목적 추종이 아니다. 다다이즘으로부터의 진행이고 이성이 관장하는 문명으로부터의 탈주, 무의식 세계로의 망명이다. 세계대전의 참화와 파시즘이라는 집단적 광기를 겪으며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건축한 문명의 허구를 깨달은 유럽 철학가들과 예술가들은 조화, 개념, 윤리 등 문명의 말뚝들을 뽑는다. 사유는 의식의 타자를, 예고 없이 인간의 내부로 침범하는, 다스려지지 않는 자연의 충동인 꿈과 무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예술의 내역이 되었다. 더불어 예술은 기존하던 미감(美感), 장르적 개념, 제작에 관한 윤리의식 등 모든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을 감행했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추방’ ‘낯설음’, 일상적 의미를 추방하기, 일상적 관계로부터 탈구(脫臼)하기. 공중에 떠 있는 큰 바윗덩어리, 합당하지 않은 배경에 놓인 오브제, 화면을 배반하는 글귀를 단 대상물을 그린 마그리트의 그림들로부터 초현실주의 예술의 주요 용어가 된 단어. 사물과 그에 결착된 의미를 박리(剝離)시키기,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사물의 힘을 드러내기. 이 시기 예술의 작업 전치(轉置, displacement)와 응축(凝縮, condensation)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꿈의 형식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그를 둘러쌌던 상식의 반목은 심층세계의 개방으로 이어진다. 무의식이 창궐하는 불가사의하고 불온한 세계. 동시대가 ‘문명세계’의 지표로 삼은 유럽은 이렇게 일찌감치 그들 내부의 문명을 회의(懷疑)하며 세계의 심부(深部)를 들추고 있었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전쟁으로 금지당했던 세월을 충당한 유럽의 무용예술이 1980년대에 전격적으로 출범시킨, 훗날 ‘컨템퍼러리댄스’라는 신종 양식으로 합의된 새로운 경향성은 이러한 맥락과 연동한다. 이 시절로부터 무용예술의 새로움은 춤의 상식적 구문(舊聞)을 넘어 춤 외부세계와의 통섭과 접변으로부터 성취되어왔다. 벨기에는 그 새로운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교역국으로서 개방의 능력을 선취해온 베네룩스 3국 중 한 곳. 일찌감치 발레계의 이단아 베자르(Maurice Béjart)의 혁신을 받아들인 이 나라에서 음악가 출신의 안무가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로사스 무용단(Rosas) 예술감독), 심리학 전공의 빔 반데케이부스(Wim Vandekeybus, 울티마 베스(Ultima Vez) 예술감독), 장애아동 치료교육을 전공한 알랭 플라텔(Alain Platel, 쎄드라베(C de la B) 예술감독) 등 춤 외부의 이력을 지닌 작가들이 플랑드르 웨이브(Flemish Wave)를 일으키며 독일의 피나 바우쉬(Pina Bausch)와 더불어 컨템퍼러리댄스의 시대를 서막(序幕)하였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이들에 합류하여 컨템퍼러리댄스계를 견인하고 있는 피핑톰은 쎄드라베 출신의 무용가 가브리엘라 카리소(Gabriela Carrizo, 아르헨티나)와 프랑크 샤르티에(Franck Chartier, 프랑스)가 2000년에 설립한 벨기에의 춤단체다. 2013년에 내한했던 작품 <반덴브라덴가 32번지(32 Rue Vandenbranden)>(2009)와 2015년 내한했던 <아 루에 (A louer 임대합니다)>(2011)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연극·영화·오페라 등 타장르, 타매체와의 통섭으로 창출하는 특유한 시노그래피와 그 명징한 세계에 내속하는 존재론적 춤으로 유일성을 빚어내고 있는 단체. ‘훔쳐보는(peeping)’ ‘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특정다수 익명들을 대리하여 피핑톰이 숙고하는 현대적 삶은 고립과 악몽의 점철이다.

피핑톰은 특별히 소속하는 무용수들에게 ‘크리에이터’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가브리엘라와 프랑크에 의해 어떤 개념과 상황, 작품의 바탕적 세계가 주어지면 피핑톰들은 각자의 경험과 잠재적 몸성을 최대한으로 작동시켜 그 지형을 살아내는 가장 입체적인 인물들로 출현한다. 정훈목은 2009년부터 피핑톰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같은 연도에 입단한 김설진(그는 2014년부터는 국내 활동에 주력해왔다)과 더불어 단체의 정체성을 이끄는 주요 크리에이터로서, 14년간 6편의 작품으로 43개국 133곳 도시들에 피핑톰의 족적을 새겨왔다. 팬데믹은 피핑톰으로서의 생에 휴가를 주었고, 정훈목은 본명의 작업을 거행한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위독한 세계와 컨템퍼러리댄스의 말초성

컨템퍼러리댄스의 서사는 선형(線形)적 인과관계를 벗어난 편린들로 제시된다. 파편적 장면들은 20세기의 사유와 예술이 반성(reflection)한 바대로 부조리한 실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문명의 강제 아래 억류되어온 인간 존재 심층의 발현이기도 하다. 복잡한 관계, 부조리한 입장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충동, 육감, 악몽, 가학과 피학의 관계 등은 가장 깊숙한 교집합일 터, 그것이 동시대 예술의 내역이 되는 건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주제의식도 한 세기를 채워가고, 대부분 특별한 감응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공회전에 그친다. 와중에도 동시대의 평균적 감수성을 상회하는 ‘송곳’같은 작품들은 출현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과 결과는 예술의 감각적 반경을 넓히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유효한가? 어째서 모두 아르토(Antonin Artaud, 프랑스 연극연출가로 초현실주의 연극의 맥락에서 ‘잔혹극(Theater of Cruelty)’이라는 고유의 스타일을 창출, 전위극 시대를 견인하였다)의 후예들이란 말인가. 클리셰가 된 ‘각성’ 혹은 난폭한 강요, 맹물이거나 향정신성 약물이거나. ‘소통’ ‘공감’ ‘치유’ 공동체를 살리는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특히 최근 서유럽 컨템퍼러리댄스 작가들의 행보와 이런 어깃장을 겪는다. 1980년대 중반 귀환하였을 때 그들은 몸적 존재론자로서 출현하였다. 그들은 동화나 신화의 재연과는 다른, 혹은 일체의 서사를 용납하지 않는 미국의 형식주의와도 다른, 새로운 서사, 특정 누군가들의 대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적 양상들의 펼침으로써 삶에의 공약수로 수렴 가능한 존재론적 서사를 구현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 세계에 등장하는 양상과 관계들은 연유 없고 가차 없는 폭력을 닮아 있어서 마치 문명 이전의 생을 목도하는 기분을 들게 만든다.

생명의 근원을 충동(Trieb)에 두고 사회의 근간을 약육강식 생태계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성을 소거한 몇몇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자주 황망해진다. 노쇠한 문명의 위기. 공권력과 노조 간의 폭력 사태, 난민의 유입과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寬容)의 실종 등등, 확실히 문명을 조립해온 사회윤리가 풀려가고 있음은 자명하다. 예술은 세계의 정황과 유리될 수는 없고, 예술가들이란 본디 과민한 자들. 무의식이란 원체 인간의 서사적 능력 밖의 일이니, 그것의 출현이 내적 논리의 파쇄이거나 인간적 방식과 충돌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 몇몇 작품들 앞에선 저 아르토로부터 누적되어 온 습관의 강도, 사유가 생략된 감각의 말초성을 의혹하게 되는 것이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초현실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의 진자운동, 정훈목식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

예술작품의 운명은 시절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상품이거나 시대를 앞서거나 거스르는 반미학적 구호 중 하나다. 그런데 어쩌면 20세기의 예술구호들은 이미 상표가 된 것은 아닐까. 어떤 전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ANON>의 세계에서 긍정적 차이를 발견한다. <ANON>은 근대로부터 나아온 20세기 현대예술의 성취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진행으로써 다다른 지금의 트렌드에서 살짝 비켜선다. 초현실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의 진자운동, 피핑톰적이면서도 피핑톰 내부의 타자, 정훈목적이다.

<ANON>의 출연진은 모두 일곱이다. 백발의 남성 노인(Jozef Stevens), 젊은 여성(Gaya Yemini), 세 명의 청년(양승관·오영훈·이종혁), 소년(김찬희) 그리고 로봇강아지. 프로그램은 이들을 단일주체로 설명한다. “왜곡된 기억을 가진 75세 남성, 신체장애가 있는 9세 소년, 판타지 캐릭터 같은 20대 여성과 이들을 돕는 건장한 남성 3명” “고립감을 느끼는 각각의 인물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모습을 그렸다.” 해석의 여지는 많다. 나는 이들의 60 여분 연행으로부터 인간군상, 문명 내 관계항, 통시적 시간의 편집적 출현을 보았다. 작품의 장면들은 단일주체들에게 부착된 기억의 왜상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부유하는 여러 기억과 입장들의 교차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암전된 블랙박스로부터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공연은 현실과 가상을 중첩시키며 출발한다. 무대는 백스테이지 깊숙이까지 열려있고 장비용 컨테이너박스와 캐리어카트 등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준비 중인 무대, 건설 중인 세계. 작업복 차림의 젊은 남성 셋이 컨테이너와 카트를 이리저리 옮기는 장면으로 작품은 개시된다. 아직은 시간이 시계의 물리적 배분과 일치하는 현실세계다. 제법 공간이 정돈되고 누군가 사슬을 정리한다. 노랗고 플라스틱이다. 생경한 색, 용도에 어긋나는 재질, 예상을 배반하는 무게감, 각지고 무거운 박스들이 차지하고 있던 어두운 공간감과 선연히 대비되는 휘리릭 짧은 사슬의 움직임이 강렬하게 시야를 파고든다. 춤적 전조(前兆)다, 전개될 세계는 현실을 초과할 것이라는 경보.

무대 하수 다운스테이지 바닥에서 맨홀 뚜껑이 들린다. 접힌 휠체어가 나오고 이어 백발의 노인이 올라온다. 새하얀 러닝셔츠와 트렁크 차림이다. 지하, 세계의 바닥 혹은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노인, 장애인, 부랑자의 차림으로는 수상쩍고 불가능한. 주섬주섬 겉옷을 입고 휠체어에 앉으니 비로소 이 시대에 익숙한 존재가 된다. 병들은 독거(獨居)자들. 노쇠한 문명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 존재가 등장한다. 휠체어를 탄 소년, 일찍 아픈 아이. 휠체어를 서툴게 어쩌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밀고 다니는 젊은 여자도 있다. 모성을 잃은 엄마인지, 엄마를 대체하는 보모인지, 혹은 사명 없는 선생인지, 무엇이든 결핍된 자리일 그녀도 온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시간이 휘어지는 것인지 해석할 수 없는 욕망이 출현하는 것인지 연대기를 이탈하고 입장이 바뀌며 얽히고설키는, 관계의 현대적 양상들이 돌출한다. “자~ 하나 둘, 왼발 오른발, 앞으로~ 갑니다~ 오른바알 왼바알, 잘하셨어요~” 문득 일어서 잘 걷는 아이가 보행기에 기댄 노인을 재촉한다. 어른의 언어를 일찍 익힌 아이는 조급하다. “앞으로 가세요, 하나, 두울, 사람들이 거북이라고 하겠어요~” 가해를 학습한 아이 “어휴 정말 답답하다! 장애인이야 뭐야! 더 빨리 더 빨리!” 채근하면 노인의 다리는 더욱 비척거린다.

동정 없는 세상은 ‘그’들이 만들지 않았던가. 노인으로부터 온 과거의 절단면인지 사회 속에서 복제되는 ‘그들’ 중 하나인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그는 여기저기로 손가락질과 속사포의 말들을 발사한다. 번역되지 않는 유럽어, 어차피 불통하는 말들이다. 이해 못한 기색의 젊은이들은 어물쩍 쫓아다니며 순응하는 척을 하고, 알아들어 아픈 건지 못 알아들어 아픈 건지 여자는 쓰러져 사지를 뒤튼다. 누굴까. 피고용인, 아내, 정부(情婦), 딸, 배제된 모두. 아이도 그의 말이라면 “싫어요!”(한국어) 막무가내다.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주목댄스시어터 ‘ANON' © 김주빈

소실된 관계를 대리하는 건 기계들이다. 노년층과 아이들에게 ‘스페셜 케어(special care)’, 미소와 딸기덤불이 있는 정원으로의 산책을 제공하는 1006과 총총총총 잘도 뛰어다니는 로봇강아지. 서정적인 배경음악을 동반하지만 분절적인 그녀의 음색은 메커니컬하고, 강아지는 방전되자 조짐도 없이 굳는다. 관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고독과 불안이 발생하고 이 부정적 정서가 누적되면 인생은 비극으로 결정된다. 꽤나 잘 조직된 이 비극의 층위를 배회하며 묻는다, 나는 누구였을까.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아이, 무기력한 직원, 무자비한 고용인, 무심한 딸, 모자라는 엄마, 무능력한 선생 등등 아마도 우린 대부분의 호명(呼名)에 속하고 모든 수식어의 경험을 가졌으리라. ‘곧’ 휴머노이드의 간병을 받고 로봇반려동물을 키우게 될 비극의 당사자들.

정훈목이 제시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은 피핑톰의 인물들보다는 좀 더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렇기에 비극은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피핑톰이 세트, 소품, 조명, 음악 등을 총 배치하여 글래머러스한 감각의 장소를 구현하고 그에 거하는 인물들로부터 강렬한 무의식적 심층을 끄집어내는 것에 반해 정훈목은 추상적인 공간에 미니멀한 심리적 세트(가야 예미니가 춤을 추는 큐브, 철제 지지대)를 배치하고 관객 모두에게로 투영 가능한 인물들을 불러들인다. 변별적인 스타일링이고 비교 불가능하지만, 다만 비하여 춤의 지분이 적다는 점은 아쉬움이다. 피핑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훈목의 춤도 응축된 내면의 폭발인데 이 작품에서 그러한 춤의 순간들을 책임지는 것은 가야 예미니 홀로다. 탈구(脫臼)적이면서도 유동(流動)적이고 운동역학적(kinetic)이면서도 인물성격적인(characteristic), 그녀의 용적(容積) 깊은 춤은 고출력의 방점이기는 하지만 나머지 출연진의 퍼포먼스에선 춤의 인상이 너무 희박하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 내면의 각도, 인류의 유형(類型), 현대적 삶의 다면(多面)으로 해석 가능한 이율배반적 단면들을 내적 긴밀성으로 묶어내는 작가적 역량이 확인된다. 그렇지만 작품 종반 불현듯 고공의 부감 숏으로부터 삽입되는 댄스필름 <우라가노(Uragano)>의 4분여는 작품 전체와 유리(遊離)되는 듯하다. 정훈목 자신의 연출작이고, 파리·베를린·도쿄·몬트리올 등 세계 유수의 필름 페스티벌에서 주목을 받았고, 할리우드 국제 골든 에이지 페스티벌(Hollywood International Golden Age Festival)에서 두 부문(Best Dance Short와 Best Sci-fi)을 석권한 이 수작과 <ANON>은 세계를 불연속항이 충돌하는 불길한 비극적 바탕으로 파악한다는 작가적 관점을 공유하지만, 작품들이란 결국 각각의 구조물인 것이다. <Uragano>의 연장선상에 <ANON>이 위치하는가 혹은 <ANON>의 부분으로서 <Uragano>는 필연적인가라는 질문을 어쨌든 생략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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