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2022 CPH STAGE, 그 첫 번째 날
[축제리뷰] 2022 CPH STAGE, 그 첫 번째 날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8.15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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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삶, 그 지속가능성에 관한 다양한 장면들 혹은 입장들
CPH STAGE banner © Danish performing arts

[더프리뷰=코펜하겐] 하영신 무용평론가 = <CPH STAGE>는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덴마크의 공연예술축제다. 2013년에 개시, 9회에 당도한 올 해의 행사는 6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렸고 필자는 8일부터 10일까지의 국제 방문자 프로그램(International Days)을 참관했다. 모든 현장은 저마다의 현장, 세계 공연예술의 판도가 ‘contemporary’라는 슬로건 아래 통합되는 듯해도, 그래도 현장들은 각자가 걸어온 역사의 끄트머리, 결코 나란하지 않다. 다른 현장에는 다른 감도의 장면들이 있다. 이를 소개한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프롤로그

6월에서 8월까지의 여름은 덴마크에선 귀한 계절이다. 긴 겨울이 도래하면 오후 3시에 이미 해가 지는, 현지인의 실감나는 설명에 의하면 깜깜할 때 출근해서 깜깜할 때 퇴근하는 그런 날들이 더 많은 나라. 그러니 해가 위용을 찾는 6월경부터 도시는 축제 모드에 돌입한다. 도시 가장자리 온통이 수영장으로 펼쳐지고 도심 안쪽에는 이 계절을 만끽하려는 현지인들은 물론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백야, 저물어봐야 기껏 푸르스름이 고작인 밝은 밤, 늦도록 사람들이 깨어있고, 왕립극장(Royal Danish Theatre)에서 뉘하운(Nyhavn)의 선상(船上)극장까지 다양한 형태의 극장들에선 공연이 성황리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이 여름을 피나 바우쉬(Pina Bausch, <Le Sacre du Printemps>)나 마리 슈이나르(Marie Chouinard, <Radical Vitality>)같은 동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적 이름들이 개시하기도 했지만, 축제의 주인공들은 단연 덴마크의 공연예술가들이다. 특히 60여 명의 세계 공연예술 관계자들에게 덴마크 공연예술의 전면모를 공개하는 사흘간에는 갖가지 종류와 규모의 25편 작품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졌다.

International Days 프로그램 개시에 앞서 진행된 덴마크 공연예술 소개 세션에서 공연예술평론가 모나 디머(Monna Dithmer)는 자국 공연예술의 현행적 특성을 ‘참여적인 몰입형 작품(participatory immersive work)’ ‘학제간 작품(cross disciplinary work)’ ‘사회관여적 예술(socially engaged art)’로 규정하였다. ‘이머시브’ ‘학제간(inter-disciplinary)’ ‘커뮤니티’, 우리나라 혹은 세계 공연예술의 키워드에 다름없지만 그러나 실천적 온도에는 차이가 있다. 그 온도차가 덴마크 공연예술의 정체성이리라.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닮은 듯 다른 덴마크 공연예술의 장면들을 소개하고픈 마음에 연재물을 펼친다. 특별히 재구획하지 않았다. 그냥 날짜를 쫓아 당일 메모들에 기초한, 일종의 감상문 형식을 취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장르접변성에 무척 개방적인 태도를 지닌 덴마크의 공연예술 현장에서라면 평소 무용예술에 관한 어떤 각별한 의지를 지닌 필자로서는 어차피 정밀한 전문가일 수 없기 때문이고, 또 작품의 적재로 중첩되고 강화되어 간 대니쉬 뉘앙스들의 경과를 그대로 기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을 매개로 감지한 이 뉘앙스들은 사흘 공식일정과 거기에 보탠 이틀, 닷새 어치다. 모든 해석은 입장, 자의성에 기초한다는 것이 소위 평론작업에 관한 개인적 견해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초면(初面)하는 낯선 현장에서는 행여 어떤 오류가 있을까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오류가 있다면 이 단초로부터 멀리, 시간의 배려가 수정해줄 터인데. 아무튼 오랜만에 순전(純全)한 관객의 입장에 서니 한결 자유로웠다. 여행하는 바로 그 이유, 일상으로부터의 자유. 제아무리 ‘그저 훈련된 관객’으로서 스스로 직업적 자세를 훈시한다한들 어떤 긴장감이 있기 마련, 간만의 그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우니 오히려 작품 자체의 요청에 근접할 수 있기도 했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company: Uppercut Danseteater

choreographer: Stephanie Thomasen

도착한 첫 날 개시공연 <Limbo>. “공동체로부터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할 때 당신은 어디로 가시렵니까?(Where do you go when you are no longer welcome in the community?)” 첫 작품으로부터의 질문에는 새삼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가정, 학교, 일터, 모든 공동체의 결렬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사는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온 이방인은 오히려 왜 이 작품의 작가가 작품 곳곳에 묻어둔 충혈적 순간들을 연결하여 전체적 낭자함으로까지 밀어붙이지 않았을까를 의문했다. 이 첫 의혹은 이후의 관람마다로 연결되었고, 도시를 떠날 무렵 깨닫는다. 비극의 온도는 사람마다도 다르지만 그가 거소하는 환경으로부터도 차이가 진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는 <<Plejer Er Død>>(직역하자면 ‘Care is Dead’) 3부작 중 제 2부다. 보살핌의 관계가 깨어진 현대사회의 비정한 생태를 그리는 이 트릴로지(trilogy)의 1부작 <Samba>는 2021년 덴마크 공연예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덴마크 국립공연예술상(Årets Reumert, The National Danish Performing Art Award)을 비롯한 몇몇 수상 내역을 가졌다고 한다. 공연이 펼쳐진 파브리켄(FABRIKKEN for kunst og design)은 공연 전용 극장시설이 아니다. 도심을 확장하기 위한 뉴타운, 우리로 치자면 여의도처럼 연결된 작은 섬에 안치된 디자인센터인데 예술인들의 주거와 작업공간을 배치한 일종의 레지던시다. 그 중 작업공간으로 지어진 검은 큐브 안에서 작품은 진행된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공연은 고지된 바대로 15분 가량 일찍 음료가 제공되는 가든파티 형태로 시작되었다. 투명하고 두꺼운 비닐 버티컬을 젖히며 입장하면 직사각형 공간의 양쪽 가로 긴 변을 따라 간이좌석이 높고 낮은 두 줄로 배치되어 있다. 하얀색 포장천으로 둘둘 말린 도축된 가축을 연상시키는 어떤 존재(Mark Philip)가 천장 슬라이딩 서스펜션 레일에 부착된 갈고리(이 역시 작품에 운동성을 부가하는 장치다)에 매달려 있고, 나머지 4명의 무용수들은 각각의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관객을 맞는다. 바닥에는 온통 밀가루가 뿌려져 있고(이 가루는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고 동시에 지면에 미끄러지는 무용수들의 동작을 용이하게 한다. 주최 측에선 입장 전 관객들에게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양단으로는 무대와 분절된 이질적인 공간이 숨겨져 있다. 안쪽 가장자리에는 선명한 붉은 빛의 여닫이문이 있어서 도축된 돼지 혹은 거세된 사회적 타자를 제외한 나머지 군중 앙상블이 들고나는 ‘공인된 자들만의 세계’를 구획하고, 입구 쪽 가장자리 투명 비닐 버티컬 안쪽 공간은 마크 필립의 공간으로 작품 말미에 그는 거기서 두터운 포장재를 벗어던지고 나신(裸身)으로 출현함으로써 죽음의 완성과 새로운 생의 시작을 표기한다.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LIMBO-PLEJER ER DØD © Badi Berber

결말은 예측 가능한 바대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비관적 혹은 비판적이다. 자신을 옥죄던 무엇들을 다 벗어던졌지만 무방비 상태의 나신인 마크 필립스에게 허락되는 세계는 결국 오물 투성이일 뿐이다. 점액질 진흙 바닥을 발버둥치는 장면으로 완결되는 이 1시간 30여 분간은 그러나 시종일관 비극을 향해 치닫는 레이스는 아니다. 빨간색 킬힐, 음을 지닌 전자 타악기, 관객과의 접촉과 작용 등 배치된 장면들은 직관적이고 유희적이다. 미쉐린타이어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둔중한 차림으로 킬힐 위에서 버둥거리는 마크 필립스의 몸짓은 우리 시대의 욕망, 성취되지 못하거나 성취된다 한들 의미로 결착되지 못해 결국 다른 욕망으로 향해 미끄러질 그 공허한 공회전적 연쇄를 적시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넘어지고 (아마도 약속되었을) 한 관객이 그의 구두를 벗길 때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나온다.

이렇게 결정적인 몇몇 장면들에서 페이소스로의 진입이 실패된다. 아이디어와 에피소드들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감각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익숙한 각도들 안에 있고 그것은 양가(兩價)적이다. 소위 ‘작품성’ ‘예술성’의 어떤 심오한 공간은 직전에서 열리지 않지만, 그 대신 관객과의 라포르(rapport)를 확보해낸다. 모두가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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