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베트남 에피소드-1] 아름다운 고독의 실재
[춤과 베트남 에피소드-1] 아름다운 고독의 실재
  • 임선영 무용가
  • 승인 2022.10.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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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오페라 하우스(사진제공=임선영)
베트남 오페라 하우스(사진제공=임선영)

[더프리뷰=서울] 임선영 현대무용가 = 나는 지독히 보수적인 군인 가정의 아이로 성장하면서 춤을 통해 나만의 자유를 탐닉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나의 정신적 자유를 위한 춤의 흐름에서 40대 후반 인생의 길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삶은 철저히 계획되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젊은 시절의 철학을 통해 수많은 인생의 변화를 겪으면서 주변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중 계획하지 않았던 베트남 삶의 경험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귀한 시간을 얻었다. 4년간 베트남에서 만난 춤과 사람들은 나에게 잊지 못할 과거와 현재가 되었고, 그 사람들을 통해 춤 그리고 삶이 조각보처럼 이어져가고 있다.

한국에서 춤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로부터 인위적으로 떨어져 나와 2018년 1월 다른 나라, 낯선 장소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나는 마흔 중반의 나이, 사회의 울타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싶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야 했다. 가장 불안한 모습, 낯선 자의 이름, 즉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낯선 나라 생활의 불편함에 대한 무게와 걱정에서 파생된 잡념으로 무거운 시간을 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삶의 동반자가 짧고 강한 한 마디를 던졌다.

“네가 진정한 예술을 하고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술을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에서는 가능하고 어디에서는 불가능한 예술이 어디 있는가?” 이 한 마디는 한국을 떠나기 전 불안감에 흔들리는 나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명료하게 정리해주는 중요한 말이 되었다.

사실 젊은 시절, 간간이 2-3개월씩 지내던 여러 나라에서의 체류 경험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사소통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으나, 당분간 돌아올 예정이 없는 해외 살이는 사뭇 다른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새로움에 대한 자유, 즉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곳에서 살고 다른 사람들을 사귈 수 있다는 자유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못한 채 내가 스스로 정한 한계, 울타리 안에서 어쩌면 스스로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낯섦에서 시작된 불편함은 자신을 새롭게 리셋할 수 있는 도구가 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지나고 보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삶은 역시나 쉽지는 않았다.

한여름이 덥거나 더 덥거나 하는 두 계절의 나라, 비가 오면 어김없이 도로는 물에 잠겨 오토바이와 택시가 움직임을 멈추는 도시, 도시 한복판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닭과 개들의 출현은 도시와 시골이 한곳에 뒤섞인 듯,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맞는가 하는 자문을 하곤 했다. 한국과 달리 문화, 교육 환경은 열악하였고, 베트남 국민들의 문화의식 또한 달랐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었다.

호치민 광장(사진제공=임선영)
호치민 광장(사진제공=임선영)

내가 살던 호치민시티 2군 지역은 인터넷이나 택시, 쇼핑몰, 관광지 등은 비교적 잘 되어있어 사는 데 불편함은 없으나, 예술교육이나 문화환경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공연검열과 도서출간에 대한 통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영화축제의 사전축하 공연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아 20분짜리 무용을 만들었다가 검열로 인해 공연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당시 옆에서 지켜보던 한 프랑스 영화감독은 “베트남에서는 패션쇼도 검열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니 저 검열관이 시키는 대로 작품구성 변경과 의상교체, 무대 위에서의 영어사용 자제를 따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결국 공연은 포기했지만, 그때까지 말로만 듣던 문화검열을 직접 경험하는 아찔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베트남에서 지내는 4년 동안 한국에서 누리던 춤환경과 직장환경, 공연환경, 풍요로운 문화생활 수준에 대한 기억을 소각해야 했고, 나의 뇌리에 저장된 것과 유사한 경험을 그곳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스스로 최소한의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기로 했다. 나는 내 안에 숨겨진 두려움의 실체를 찾아 일단 모든 것을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진 나는 다시 바라보고 재발견할 기회를 위해 최소한의 것을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제로의 삶’이라고 스스로 명명했고,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고 만약 나의 모든 것을 제로로 전환시켰을 때 나에게 남겨질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나라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신중해야 했다.

'고독의 자유'(사진제공=임선영)
'고독의 자유'(사진제공=임선영)

과거의 관습처럼 따라다니는 나의 모습을 버리고 낯선 일상을 통해 스스로 바라보며 존재하게 내버려두고 싶어졌다. 스스로를 고독하게 이끌며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밀어 넣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고독은 슬픔이 아닌 타인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습실이 없으면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되니 아파트 잔디가 연습공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완전히 고독한 자유였다.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얽혀 살았던 과거의 나를 묻어버리고 말랑거리는 사고의 유연성을 발휘하며 낯선 사람들과 인사하며 나를 찾아가리라 마음을 세웠다. 아파트 수영장 위로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두 눈동자에 각각 담는 여유를 부리며, 바람에 밀려 움직이는 몸의 저항력을 찾아 잔디에서 이리저리 팔 다리를 움직이며 춤과 함께 혼자 지냈다. 아름다운 고독의 실재를 깨달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며 변화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호치민 거리 (사진제공=임선영)
호치민 거리 (사진제공=임선영)

나는 낯선 나라에서 살아 숨 쉬며 움직여지는 몸, 춤을 통해 내가 지닌 존재의 실존을 누리며 현재를 누리는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켜쥐고 있는, 정지되고 경직된 나는 발견했던 것이다. 혼자 지내는 동안 내 자신 속에 존재하고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 내적인 충만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답은 춤으로 돌아왔고 춤을 추는 순간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충만한 시간을 얻을 수 있음을 느꼈다. 모든 것은 춤으로 연결 지어져, 춤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과 춤과 함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이것이 내가 베트남에서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춤을 공유하고 춤을 통해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 준 많은 베트남 친구들을 기억한다. 춤은 나를 베트남의 이방인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행인으로 만들어주었고, 그 사람들은 내가 베트남을 이해하는 문화의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그 중 나의 첫 인연, 베트남 예술가 응우옌 탄 록(Nguyen Tan Loc)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기다림과 시도가 필요했다.

임선영 무용가
임선영 무용가
sunyounglim@hotmail.com
이대 무용과 졸업. 2018년 아르코 국제레지던시 선정.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현재는 베트남 아라베스크무용단 초빙안무가로 활동 중이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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