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 이야기 13, 스펙터클 1- 기형쇼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 이야기 13, 스펙터클 1- 기형쇼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1.1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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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웃는 남자(사진출처=인터파크티켓)
뮤지컬 웃는 남자(사진출처=인터파크티켓)

 

기형쇼

스펙터클

인간은 스펙터클을 좋아한다. 스펙터클 선호는 공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인기 있는 공연은 대부분 스펙터클한 장르들로서, 스펙터클은 공연의 기본적 조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의 요소를 장경, 성격, 플롯, 조사, 노래, 사상 등 여섯 가지로 구분하면서 스펙터클(장경)을 포함하였다. 그가 말한 스펙터클은 장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트나 미술 등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역할을 높게 보지 않았다. 장경은 우리를 매혹하기는 하나 예술성이 가장 적으며 작시술과는 가장 인연이 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연이론가들은 오랫동안 물질적이고 탈문학적인 고려를 주장해왔다. 이야기나 줄거리보다는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더욱 신경을 써 온 것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문화는 ‘물질적인 사회 과정‘(『Marxism and Literature』, 62)이라고 말한다. 사유나 상상처럼 고립된 성격의 정신적 과정이 아니라 음성이나 목소리 등을 사용하거나, 그리기 등의 물질적인 성격을 동반하는 사회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앙토넹 아르토는 『연극과 이중』에서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쓰여지고 말해지는 것보다 미장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찰스 러들럼(Charles Ludlam)은 아르토의 물질주의를 더욱 확대하여 “공연은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물질적 사업” 이라고 하였다. 공연은 상상력에 물질성을 결합하여 화려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대한 올림픽이나 스포츠 경기, 매스게임, 축제, 메가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화려한 무대는 모두 스펙터클이다. 그리고 공연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스펙터클을 이용하여 위기를 극복해 왔고, 이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펙터클은 단순히 시각적 장대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래나 자극적 이야기도 스펙터클에 넣기도 한다.

인간은 무언가 특이한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다. 특이한 것, 새로운 것, 특별한 것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다. 특이한 것이나 새로운 것만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마빈 주커만은 인간에게는 자극추구 또는 감각추구(sensation seeking)성향이 있어서 늘 보던 것에서 벗어나 새롭고 특이하고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주커만은 이를 ‘체험추구’라고 부른다. 모험을 즐기고 스릴을 추구하는 일, 금지된 것에서 일탈하려는 성향, 지루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성향도 자극추구성향의 일종이다. 엘렌 디사나야케는 예술을 특별화하기라고 말한다. 미디어 또한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특별한 것,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는 영역이다.

19세기를 서커스의 시대 또는 박람회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산업혁명의 진전에 의해 물건의 대량생산과 고급화가 이루어지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이들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벤야민은 박람회를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에 비교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거대한 볼거리라는 면에서는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이다. 백화점이 탄생한 것도 19세기다. 올림픽이 부활한 것도 이 때였고 곧 이어 월드컵이나 많은 국제적 스포츠대회도 탄생했다. 이들 스펙터클들은 필연적으로 오락과 연관을 맺게 된다. 박람회나 백화점에는 오락적인 볼거리들이 동반되었고 어떤 박람회에서는 박람회 자체보다 쇼가 더 인기를 끄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우리의 시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스펙터클들이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이 거대하고 재미있고 특이하며 경쟁적인 볼거리들이다. 오늘날 판타지 영화, 판타지 뮤지컬, 판타지 소설들이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이 역시 자극추구성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가짜 뉴스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 역시 인간의 자극추구의 욕망과 관계있을 것이다. 가짜뉴스는 자극적이어서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고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새롭고 큰 것을 좋아하는 강한 시각적 욕망(Visual Desire)이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심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를 절시증(scopophilia)이라고 하였다. 관음증도 유사한 시각적 욕망에 속할 것이다. 불법 동영상 촬영이나 몰카도 인간의 시각적 욕망이 초래한 사회문제들이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으로, 어릴 때 강제로 기형이 된 소년 그윈플렌(Gwynplaine, 번역소설에서는 괭플렌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위고의 소설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과 그가 눈속에서 구해준 눈먼 소녀 데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토리의 전개, 음악, 정교한 세트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 시종일관 극적 긴장감을 주는 수작이다. 위고는 소설속에서 신체를 기형으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던 사람들을 ‘콩프라시코’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 17-8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사실( Wikipedia –Freak show)이라고 한다. 위고는 콩프라시코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 그들은 한 인간을 데려다가 발육부전의 난쟁이로 만들었다. 한 얼굴을 바보의 얼굴로 만들었다. 그들은 성장을 방해했다. 표정을 만들었다. 기형적 요소의 인위적인 이 산물은 그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과학이었다. 하느님께서 하모니를 놓았던 자리에 기형을 놓았다. 이러한 괴물생산은 대규모로 이루어졌으며 매우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36) . 데아와 입이 찢어진 그윈플렌은 그들을 구해준 우르수스에 의해 광대가 되고 관객들은 늘 웃는 모습을 보이는 그의 특이한 신체적 기형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19세기의 특이한 스펙터클 중의 하나는 기형 인간들을 전시한 기형쇼(Freak Show)였다. 기형쇼는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기형쇼는 매우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초기의 기형쇼 중 유명했던 것은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으로 찰스 1세의 궁정에서 라자러스(Lazarus)와 조아네스 뱁티스타 콜로레도(Joannes Baptista Colloredo) 형제가 벌인 쇼였다. 그들 형제는 몸이 붙어 있었는데, 라자러스는 어느 정도 정상적이었지만 동생의 덜 발달한 몸은 그의 가슴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라자러스는 쇼가 없을 때에는 외투로 그를 감싸서 남들이 보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당시의 기형쇼는 선술집이나 장터 같은 곳에서 특별한 재주를 선보이는 쇼와 결합되어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었다. 예를 들면 18세기에는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난 난장이 마티아스 버친저(Matthias Buchinger)가 놀라운 마술과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버친저는 독일출신이었는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스타가 되었고, 네 번의 결혼으로 14명의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중세시대 이전만 해도 기형은 주술사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기형은 신의 질서나 과학적 연구대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연구는 아직도 원시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고 기형학(teratology)이라는 학문도 탄생하였지만 인간은 아담과 이브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는 단일기원설과 다양한 기원를 갖는다는 다기원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형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형은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기형쇼는 19세기에 들어와 미국과 영국에서 상업화되었고 이후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비정상적으로 작은 사람,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양성적 인간, 끔찍한 병에 걸린 사람,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 등 신체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인간들이나 희귀한 생물학적 기형을 가진 사람들을 전시하는 쇼를 말한다. 심하게 문신을 했거나 불을 먹거나 칼을 삼키는 사람들도 기형쇼의 대상이었다. 184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약 100여년 정도 지속되었고 놀이공원, 서커스, 다임 박물관(서민들을 위한 박물관), 보드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쇼맨과 흥행사들은 모든 종류의 기형을 전시하였다. 비백인계 기형 인간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종이나 기형으로 소개되었고 , 백인 기형들은 발견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이름이 붙어 대중화되었다. 소두증을 가진 사람이나 작고 뾰족한 머리나 불균형한 신체조건을 지닌 사람들은 이국적 모습으로 특화되었다. 팔이나 다리 없는 사람 역시 동물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었다.

기형쇼는 어떻게 인기있는 오락이 되었는가

박물관

- P.T. 바넘과 아메리칸 박물관

기형쇼의 유형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비서양인이고 또 하나는 괴물이다( Robert Bogdan, 『Freak show』, 6-7).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비서양인으로서 아프리카인, 흑인들, 아시아인 등 서양인들에게 친숙하지 않고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인종들의 전시가 이에 해당한다. 비서양인들의 전시는 인종전시회 또는 인간동물원(Human Zoo)의 형식을 띠게 된다. 두 번째는 괴물로서의 기형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기형적으로 출생한 선천적 기형(lusus naturae)으로써 머리가 둘 달린 사람, 팔이 없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샴 쌍둥이 등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만들어진 기형’ , 즉 인공적 기형이 있었다. 문신을 요란하게 하여 공포감을 주는 사람, 지나치게 머리를 기른 사람 등이다. 네 번째로는 특별한 행위를 하는 사람, 즉 신기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칼을 삼키는 사람, 불을 삼키는 사람 등도 여기에 속했다. 또한 속임수로 기형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는 팔이 있지만 팔을 안으로 감추어 팔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이렇게 본다면 기형은 단순히 신체적 이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형쇼는 개인의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실천이자 사고방식이었고, 제도화된 오락이었다. 19세기의 미국은 가족과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적 사회에서 학교, 공장, 사업체, 병원, 정부기관과 같은 공식적 기관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기형쇼는 이런 사회적 변화에 의해 탄생한 쇼였다. 기형쇼 제도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박물관의 등장이었다. 1840년대에 미국에는 많은 박물관이 있었지만 이들은 늘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박물관 운영에 혁신을 이룩한 흥행사는 P.T. 바넘(1810-1891)이었다. <쇼맨>이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바넘은 19세기의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바넘은 돈벌이에 대한 타고난 후각을 지녔던 것 같다. 코네티컷 출신의 바넘은 가게 점원, 신문발행인 등 몇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1834년에 뉴욕으로 와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바넘은 1835년에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조이스 헤스(Joice Heth)라는 여성을 160세 된 조지 워싱턴의 간호사라고 속이고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조이스 헤스의 실제 나이는 80세였고 조지 워싱턴의 간호사를 지낸 적도 없었다. 석고로 3m의 가짜 카디프 거인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하였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우던 제니 린드의 공연은 바넘의 흥행사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준 이벤트였다. 바넘은 1841년 망해가던 스커더의 아메리칸 박물관(AM)을 반값에 인수하여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였다. 박물관의 원래 목적은 과학발전상을 과시하고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지만 바넘은 이를 오락화한다. 밝은 빛의 장식과 많은 광고를 붙여 분위기를 바꾸어나갔다. AM은 동물쇼, 강연, 왁스 박물관, 공연, 기형쇼 등을 선보임으로써 대중문화의 중심적 공간이 되었다. 바넘은 여기에 피지 인어, 샴 쌍둥이(창과 엥), 난장이, 거인 , 이국적 동물 등을 전시하였고 예쁜 아기 선발대회 같은 이벤트도 개최하였다. 입장료도 매우 저렴해서 처음에 25센트를 받다가 나중에 10센트로 인하하여 많은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전성기에는 15시간씩 개장하였고 하루 입장객이 15,000여 명에 달했다. 1841~1865년까지 4100만명이 입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860년 당시 미국 인구는 3200만 명이었다. 1865년에 화재가 나서 다시 복구하였지만 1868년에 다시 화재가 발생하자 바넘은 이후 서커스 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868년 화재로 폐쇄할 때까지 박물관 사업은 그의 가장 중요한 핵심사업이었다. 그는 사양길에 있던 미국의 박물관 사업을 대중적인 오락공간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당시의 박물관은 엔터테인먼트의 중심공간으로 변한다. 가족 단위로 도시락을 먹으면서 전시회를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 AM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이었고, 샹들리에로 치장한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있어서 연극공연이나 강연회 등도 열었다. 바넘의 아메리칸 박물관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Freak Show』, 30)

- 다임 박물관

다임(dime) 박물관은 입장료가 저렴한 서민용 박물관을 말한다. 1870년경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여 1880~1890년대에 호황을 누린다. 특히 이 시기에는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급증하면서 관객도 같이 증가하였다. 19세기 말 도시거주자는 50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보스톤, 시카고 등지에도 많은 다임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다임 박물관의 중심은 기형쇼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임 박물관에는 대중음악과 춤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가 추가된다.

19세기에 미국에는 다임 소설(Dime Novel)이라는 값싼 출판물도 있었다. 이름이 소설이지만 문고본의 값싼 소설과 잡지등을 포괄하는 용어였다. 남북전쟁 이후 문해율이 급격하게 올라갔는데 출판업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이들에게 값싸고 대중적인 소설들을 보급하였다.

- 홍보전략

바넘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대중들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한 그의 혜안에 있었다. 교양이나 교육적인 볼거리보다는 값싸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찾는 대중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오락과 교육을 결합한 ‘ 합리적 오락’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바넘은 AM을 뉴욕의 명물로, 뉴욕의 화제거리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갖가지 기발한 아이디어와 대중기만술, 광고를 활용하였다. 바넘은 ‘광고의 세익스피어’ 라고 불릴 정도로 홍보에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기형쇼의 마케팅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구술방식으로 강연의 형식을 취했으며 쇼맨이나 교수들이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두 번째는 인쇄 광고로서 팜플렛이나 신문광고를 통하여 알렸다. 세 번째는 의상, 서예, 퍼포먼스, 공간을 사용하여 홍보하는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수집이 가능한 그림이나 사진을 사용하여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19세기 미국에는 열광적인 사진광(cartomania)들이 있었다. 사진은 주로 앨범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찍었다. 기형쇼도 사진광들의 중요한 대상이었고 사진광들로 인해 무대쇼가 다채로워질 정도였다. 톰 섬의 아내 라비니아 워렌은 무려 5만번 정도나 사진이 찍힐 정도로 당시의 사진열기는 대단했다. 의사들은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사용하여 전시의 권위를 높여주기도 했다. 아래는 당시 기형쇼의 홍보맨들이 관객을 유인하던 말들이다.

1 다임, 2 니켈, 10분의 1달러... 면도 한번 값. 머리 리본 하나 값. .. 놀라운 경이와 신비의 집단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지구의 끝에서 온 사람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브라질의 정글에서, 양츠강의 신비한 물에서, 오세아니아의 섬에서, 서릿발이 서린 히말라야의 언덕에서, 코카서스의 초원에서 왔습니다. 지구의 모든 마을 모든 오두막까지 구석구석 뒤져서 마치 촘촘한 빗으로 머리를 빗듯이 돈을 아끼지 않고 지구 곳곳에서 찾아냈습니다. 교양있는 신사 숙녀 여러분들을 위한 세련된 전시회. 기다리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시고 오세요. 신사숙녀 여러분 당장 오세요. 티켓은 입구에서 팝니다.

기형쇼의 전략

기형쇼에 등장할 정도의 기형인간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기형인간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고 이들을 찾는 직업이 등장했다. 기형을 기형 그대로 소개해서는 대중들의 특별한 흥미를 끌지 못했다. 대중을 어떻게 잘 속일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했다. 홍보전단에는 과장과 거짓정보가 넘쳐났다.

기형쇼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이국 모드고 또 하나는 과장모드다(『Freak Show』, 97). 이국 모드는 비서양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전시하는 방법, 미국인을 외국인으로 둔갑시키는 방식, 식인풍습. 일부다처제. 희생양. 이상한 옷차림 등 야만적이거나 이국적 풍습을 전시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주최자의 끝없는 상상력이 작동했다. 아프리카의 오지, 보르네오, 터키의 하렘, 고대 아즈텍 등의 지명이 사용되었고 심지어 1920-30년대에 색소결핍증이 있던 에코와 이코형제는 외계에서 왔다고 선전하였다. 미국인을 유럽에서 온 난장이로 소개하거나 미국 브루클린 출신의 색소결핍증 환자를 호주출신으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실제보다 과장하는 과장모드도 많이 사용되었다. 거인은 키를 더 크게 하고 난장이는 더 줄여서 발표하였다. 난장이의 나이는 더 많게 하였다. 톰 섬은 실제로 5세였지만 11살로 둔갑하였다. 기형인간들에게는 모두 높은 직위를 부여하였다. 대위, 소령, 장군, 왕자, 왕, 왕비 등의 직함이 붙었다.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이나 영국을 연상케 하는 직위를 붙인 것이다. 의상이나 장식에 있어서도 값비싼 보석이나 의상, 고급 모자, 이브닝 가운을 입어 외양을 위엄있게 장식했다. 노래나 춤 연기등에서 높은 재능을 보이는 것도 과장모드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초가 된 기형쇼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19세기에 시작된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기형쇼다. 기형쇼는 독자적인 엔터테인먼트가 되거나 다른 쇼의 2차적인 콘텐츠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를 사이드쇼라고 부른다. 아래의 쇼들은 기형쇼를 사이드쇼로 활용한 장르들이다.

- 서커스

기형쇼는 서커스의 중요한 콘텐츠였다. 서커스단은 1820년경에는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100여 개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를 서커스의 시대라고 부른다. 서커스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공연으로 기차를 통째로 전세내어 이동하는 기차 서커스가 이 시대의 대세였다 . 1850년경까지 서커스는 하나의 링에서만 공연하였지만 이후 두 개의 링, 나아가서는 세 개의 링에서 동시에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커스는 점점 스펙터클해지고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서커스단은 바넘이 참여한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으로서 1884년 창단되었다.

1850-1900년대까지 서커스단은 지속으로 증가하였고 규모도 커졌다. 빅톱으로 불리우는 텐트극장은 1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서커스를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고 1870-1920년대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오락이었다. 서커스는 1920년대에 들어와 쇠락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놀이공원, 영화, 라디오등 새로운 오락의 등장 때문이었다.

1870년대까지 대부분의 서커스단에서는 기형쇼를 공연하였다. 오히려 서커스가 기형쇼를 공연하는 주무대가 되었다. 사이드 쇼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는데 반드시 작은 규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놀이공원

19세기 중엽부터 주요 도시에 여름용 리조트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목욕탕, 가족 호텔등. 19세기 말경에는 댄스 홀, 살롱 등의 오락공간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개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이어서 놀이공원이 등장하는데 니는 기업들이 투자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뉴욕의 코니 아일랜드에 설치된 놀이공원으로써, 1893년 시카고 박람회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910년 경에는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 놀이공원이 설치되었고 1919년에는 1500개 이상을 헤아리게 된다. 당시 놀이공원의 주요한 콘텐츠는 기형쇼였다.

- 카니발

중소도시들에는 놀이공원이 없었다. 카니발은 주로 중소도시에 적합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였다. 카니발은 원래 거리축제를 의미한다. 1800년대에 공식적으로 조직된 카니벌이 등장하기 전에 쇼맨들은 독자적으로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하였다. 장터나 축제들에서 약을 팔거나 버라이어티한 여흥을 선보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카니발이 등장한 것은 1893년 시카고 박람회부터다. 오토 슈미트라는 프로모터가 시카고 박람회에서 카니발을 선보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오늘날과 같은 카니발이 등장한다. 농산물 시장이나 거리축제 등에서 벌어졌다. 1902년에는 17개의 카니발이 조직되었고 1905년에는 46개로 증가하였으며 1937년에는 300여 개로 늘어났다. 카니발에서도 기형쇼는 핵심 콘텐츠였다.

- 박람회

세계박람회는 일반적으로 1851년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박람회를 효시로 본다. 미국의 첫 박람회는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필라델피아 박람회다. 첫날 18만 6천여명이 입장하였고 6개월간 천만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이는 미국 전체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 박람회에서도 기형쇼가 등장하였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는 오락구역을 별도로 설정하여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행했다. 기형쇼는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콘텐츠 중의 하나였다. 미국에서는 1895년부터 2-3년에 한 번씩 세계박람회가 열렸는데 1930년대까지 기형쇼는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다.

- 보드빌

보드빌은 19세기말경 프랑스에서 시작된 연극적 형식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코미디를 중심으로 노래와 춤이 결합하였다. 미국에서 보드빌은 1880년에서 1930년경까지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 형식은 프랑스의 보드빌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뮤직 홀처럼 버라이어티한 오락으로 바뀐 것인데, 서로 연관성이 없는 몇 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노래, 춤, 코미디, 동물쇼, 마술, 아크로바틱, 저글링, 연극장면의 일부 등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옴니버스 스타일의 버라이어티 쇼였던 것이다. 당시 보드빌은 콘서트, 민스트럴(19세기 초에 시작되어 남북전쟁 후에 유행했던 쇼로,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이 나와 춤과 노래, 연극 등을 공연하였다. 흑인들을 우둔하고 게으른 인종으로 묘사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담긴 쇼였다), 다임 박물관 쇼, 서커스 등 다양한 대중문화로부터 콘텐츠를 차용하였다. 멜팅 팟이라 불리는 미국의 문화적 특성이 보드빌에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빌은 19세기 후반부터 인기를 끈 대중오락이었는데 이 역시 1910년대 이후에 등장한 저가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쇠락하게 된다. 그러나 보드빌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새로운 오락장르에 영향을 주었고 보드빌 스타들은 이들 새로운 오락에서 활약하게 된다.

버팔로 빌(윌리엄 프레데릭 코디, 1846-1917) (출처 : 구글)
버팔로 빌(윌리엄 프레데릭 코디, 1846-1917) (출처 : 구글)

-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

서부활극(Wild West Shows)은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순회공연 형식의 보드빌로써, 처음에는 연극무대에서 공연하다가 규모가 커지면서 야외로 나아가게 된다. 서부개척시대에 있었던 인디언 학살, 버팔로 사냥과 카우보이의 정찰활동 등을 담았다.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Buffalo Bill Wild West, BBWW)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당시 최고의 서부활극이자 보드빌이었다. BBWW를 제작한 사람은 윌리엄 프레데릭 코디(1846-1917)인데, 나중에 버팔로 빌로 불리게 된다. 그는 인디언의 활동을 감시하던 척후병이자 인디언과의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기도 했다. BBWW는 그의 이런 경험을 기초로 제작한 쇼였다. 버팔로 빌이 BBWW를 제작한 건 1883년 네브라스카주에서였다. 처음부터 대중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1886년 뉴욕공연에서는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참관하였다.

19세기 미국의 쇼는 기마술을 중시하였다. 아마도 이는 영국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서커스는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기마술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도 기마술이 서커스의 중심적 콘텐츠였다. BBWW는 말의 행진으로 시작되고 마상에서의 많은 묘기와 인디언과의 전투장면 등이 재현되었다. BBWW는 그 거대한 규모가 관객을 압도하였다. 12,000여명의 출연자(인디언, 군인, 멕시코인, 척후병 등), 버팔로를 비롯한 많은 동물이 등장하였다. 1887년부터 1892년까지 5년 동안이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인디언, 버팔로, 노새, 순록, 야생 텍사스 황소, 당나귀, 말 180마리 등 어머어마한 규모의 출연진이 동원되었다( 양홍석, 『고귀한 야만』, 65). 영국 공연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5월과 6월 매일 3-4만 명의 영국인들이 관람했고 빅토리아 여왕이 두 번이나 관람할 정도였다. 이후 버밍햄, 맨체스터 등으로 순회공연을 하였고 이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인기는 대단했다. 독일 공연에서는 빌헬름 2세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곳곳에서 공연하였다. 1893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도 공연을 하였는데 주최측에서 공연공간을 빌려주지 않자 별도의 공간을 임차하여 18,000석의 야외공연장을 마련하였다. 첫날부터 관중이 물밀 듯이 몰려와서 박람회보다 BBWW관객이 더 많았다.

재닛 데이비스는 BBWW를 ’문명‘과 ’진보‘를 표현하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Janet M. Davis, 『The Circus Age』, 22). 그러나 버팔로 빌은 인디언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Circus Age』, 59). 사라져가는 인디언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부개척을 통한 미국의 확장이라는 가치의 충돌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래서 인디언을 자신의 쇼에 출연시켜 인디언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인디언 문화의 보존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BBWW는 인종주의를 상징하는 대중오락이었다. 서부개척의 역사와 인디언 말살을 적라라하게 재현함으로써 미국인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쇼였다. 버팔로 빌은 폭력을 신성한 것으로, 인디언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인종으로 그렸으며 따라서 미국인들의 서부개척은 역사적인 당위로 표현하였다.

 

톰 섬과 라비니아 워렌의 결혼식 (1863) (출처 = 구글)
톰 섬과 라비니아 워렌의 결혼식 (1863) (출처 = 구글)

난장이 쇼의 유행

19세기에 난장이 쇼는 가장 인기있는 스펙터클의 하나였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P.T.바넘이었다. 그는 톰 섬과 그의 아내 라비니아 워렌, 도트 장군(Admiral dot) 등 많은 난장이들을 발굴하여 아메리칸 박물관의 중요한 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갔다. 바넘을 모방하여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도 난장이 쇼가 기획되었고 이는 큰 인기를 모았다. 난장이라는 말은 미국에서 dwarf와 midget로 표현하는데 dwarf는 이국적이고 어린애 같은 느낌을 주는 경멸적인 단어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midget라는 말을 사용한다(『Freak Show』,175)

- 톰 섬

톰 섬은 1838년에 코네티컷에서 탄생하였고 본명은 찰스 셔우드 스트래턴(Charles Sherwood Stratton)이었다. 한 살 때에 성장이 중단되어 키는 불과 60센티미터(2인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지역의 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바넘은 부모를 설득하여 5살이던 톰 섬을 뉴욕으로 데려온다. 바넘은 그를 런던에서 태어난 11살의 톰 섬 장군이라고 소개하였다. 톰 섬의 어머니가 이에 대해 항의하자 그는 ‘ 만약 내가 곧이곧대로 다섯 살로 소개한다면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출생지를 속인 것은 당시 미국인들이 유럽을 우러러보던 풍조를 이용한 것이었고 톰 섬 장군이라는 이름과 직책은 아더왕의 전설에 나오는 톰 섬의 이야기, 아버지의 엄지손가락(thumb)보다 작았다는 난장이 장군 이야기에서 따 온 것이었다. 바넘은 톰 섬을 가벼운 머리칼과 붉은 뺨을 가진 총명한 난장이로 표현하였다. 찰스 셔우드 스트래턴은 이렇게 톰 섬 장군으로 재탄생하였다. 마치 오늘날 연예인들이 본명을 버리고 예명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되어 예능계에 등장한 것이다.

톰 섬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바넘은 이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는 점차로 무대체질로 변해갔다. 초기에는 나폴레옹의 흉내를 내는 연기를 했고 나중에는 아메리칸 뮤지엄의 거인과 함께 다윗과 골리앗을 연기하기도 했다. 군복을 입고 25센치미터 정도의 칼을 들고 무대를 행진하면서 군사훈련 장면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루에 두 번씩 공연을 했고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거인, 맘모스 어린이 , 팔없는 사람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무대에서 무대밖에서 그는 매우 점잖은 매너로 손님들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고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도 초청이 오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보스톤의 박물관에 출연하기도 했고 필라델피아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1844년에 바넘과 톰 섬은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다. 런던에서 시작하여 3년간 프랑스, 벨기에, 영국의 지방도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순회한 유럽공연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파리에서는 1845년에 <보드빌 극장>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나왔다. 공연내용은 미국에서 했던 공연에 약간의 변화를 준 것이었다. 바넘의 기본적 생각은 톰 섬을 귀족의 체취가 풍기는 점잖은 인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톰 섬의 유럽공연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유럽의 궁전에서 왕과 귀족들을 위해 공연을 하였고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세 번이나 그의 공연을 보았다. 여왕은 그에게 선물도 주었는데 톰 섬은 공연 때마다 이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톰 섬은 출연 홍보를 위해 멋지게 장식한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이 마차는 여왕의 마차제작자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톰 섬은 1847년에 3년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의 센세이션과 여왕 알현등이 알려지면서 아메리칸 박물관의 입장객 수는 계속 기록을 갈아치우게 되었다. 톰 섬은 19세기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유명인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춤과 노래, 코메디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퍼포머라기보다는 쇼맨이었다. 바넘은 톰섬에게서 스타로서의 잠재성을 보고 매력적인 난장이로 키워냈다. 기형쇼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는데 톰 섬을 통해 바뀔 정도였다. 세련된 의상, 유럽신사인 척하는 태도, 다양한 신분으로의 변장 등을 통해 과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톰 섬과 역시 난장이였던 라비니아 워렌(Lavinia Warren)은 1863년 결혼하였다. 당시 8면을 발행하던 뉴욕 타임즈는 1면을 전부 그들의 결혼식에 할애하였다. 바넘은 뉴욕의 정치인, 부유한 실업가 등을 대거 초청하였다. 10,000여 명의 하객이 운집했고 결혼식 후에는 링컨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였다. 군중들은 거리를 메웠고 경찰은 브로드웨이 9번가에서 12번가를 통제하고 바리케이드까지 설치하였다. 피로연은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열렸는데 신랑신부는 몰려든 군중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들의 결혼식은 상업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순수한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바넘은 이를 홍보에 활용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그가 죽은 후 35년 뒤에 아내 라비니아 워렌이 죽었다. 그녀는 죽을 때 톰 섬의 묘 옆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녀의 묘비에는 ‘ 그의 아내’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 레오 싱어

레오 싱어(1877-1951)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흥행사였다. 1912년 비엔나에서 난장이 공연을 보고 흥미를 느껴 부인과 함께 난장이 공연단을 조직한다. 비엔나에 ‘난장이 도시( Lilipustadt – midget city’)라는 건물을 세우고 공연을 하였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럽순회공연에 나섰고 지속적으로 난장이들을 스카웃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신의 공연단을 싱어의 난장이(Singer’s Midgets)로 명명한다. 싱어 공연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다른 난장이 공연의 붐을 일으킨다.

미국 곳곳에는 난장이 마을이 들어섰고 1933년 시카고 박람회에는 ‘난장이 공동체’가 구성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소방서, 교회, 학교 등 45개의 빌딩이 세워지고 시장도 선출되었다. 난장이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든 과장모드의 또 다른 형식이었다.

- 톰 노먼

노먼(1860-1930)은 영국의 P.T.바넘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한 흥행사였다. 바넘은 그에게 실버 킹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노먼은 원래 백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가게 옆에서 <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전기부인 – 전기를 가득 안고 태어난 여성>이라는 쇼를 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쇼 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된다. 노먼 역시 기형쇼를 많이 제작했는데 그의 가장 유명한 기형쇼는 <엘리펀트 맨>이다. 1970년대에 영국 국립극장에서 연극으로 제작되었고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도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이를 영화화하였다. <엘리펀트 맨>은 얼굴이 온통 기형으로 태어난 조셉 메릭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는 ‘ 어머니가 코끼리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그렇게 태어났다’ 고 믿고 있었다. 톰 노먼도 난장이 공연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하였다.

- 힐튼 자매

난장이 자매였던 힐튼 자매 역시 과장 모드의 또 다른 예였다. 힐튼 자매는 1908년 영국에서 술집 여종업 케이트와 성명 미상의 남자 사이에 태어났다. 케이트는 이들 자매를 메리 힐튼에게 넘긴다. 그들 사이의 상세한 거래내역을 알 수는 없지만 돈을 받고 판 것은 분명하다. 힐튼은 이 자매를 세 살때부터 쇼에 등장시켰고 순회공연도 조직하였다. 네 살 때 독일에서 다섯 살 때는 호주에서 공연을 하였다. 자매는 힐튼의 남편을 어르신으로 딸을 에디트로 불렀다. 이들은 유년기를 악몽의 시기로 기억한다.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노래와 춤을 익히느라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힐튼의 가족들은 이 자매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고 이들을 착취하였다. 자매가 10대가 되었을 힐튼의 딸이 메이어 로스봄이라는 남성과 결혼을 했고 이후 로스봄이 매니저가 되었다. 로스봄은 자매에게 색소폰과 우크렐레 등 악기를 배우게 했고 이어서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힐튼은 미국에서 죽는다. 자매는 슬퍼한 것이 아니라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힐튼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로스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로스봄은 자매의 이력을 과장하였다. ‘영국의 장교의 딸로서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이들의 마음은 높은 이상과 건강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인종 전시회

오늘날 외국의 민속공연단의 공연은 큰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아무리 처음 보는 나라의 민속공연단이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흥행에 성공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미 대중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있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이들을 간접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의 대중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외국의 문물을 보거나 경험하기가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특히 인종적 우월성에 사로잡혀 있던 유럽인들에게 미개한 아프리카인들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 구경거리로서의 스펙터클에 지나지 않았다.

18-19세기 유럽에는 인종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유럽인이 우월하다는 인식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다고 믿고 일부의 과학자들이 동원되어 유럽우월주의를 조장하였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 시작하였지만 기후나 풍토에 따라 다섯개의 인종으로 분화되었고 코카서스 인의 일부 기능이 퇴화하여 다른 인종이 되었다는 블루멘바흐의 퇴화론이나 아르투르 고비노의 <인종불평등론>은 당시 유럽인들을 지배했던 백인우월주의의 대표적 이론이었다. 심지어 계몽주의적 학자들까지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칸트나 헤겔, 디드로같은 당대의 대학자들도 이런 인종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인종불평등론에는 다윈의 진화론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진화론 역시 진화를 통해 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의 구별이 생겼다거나 다인종으로 분화되었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발전은 우생학 운동으로 이어져서 1800년대 후반의 중요한 과학운동이 되었다. 우생학 운동은 백인우월주의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이는 식민지 지배와 유럽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이런 백인우월주의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인류사의 비극이었다.

유럽에서는 1870년대부터 1950년까지 세계 각국의 인종들을 전시하는 인간동물원 또는 인종 엑스포가 붐을 이루었다. 당시 파리, 함부르크, 안트워프, 바르셀로나, 런던, 밀라노, 뉴욕 등지에 인간동물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주 대상이었는데 여기에는 유럽인들의 인종적 우월의식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유럽인과 유인원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동물처럼 여겼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이런 전시회를 교육적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종전시회는 아프리카인들에서 시작되어 점차 미국의 인디언, 에스키모족, 필리핀인 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877년부터 1912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30건의 인종전시회가 열렸다. 1831년 파리에서 열린 인간동물원에는 6개월간 3천4백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루었다.

유럽에서 인종전시회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항해술이 발달하여 타대륙과 교류가 시작된 16세기 이후의 대항해시대부터 활발해진다. 이미 1501년에 브리스톨에서 에스키모인이 전시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550년대에는 루앙에 브라질 인디언의 마을이 건설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태평양의 도서지역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이 호기심에 가득찬 유럽인들에게 전시되었다.

- 줄루족 전시회

1853년 A. T. 칼데코트(Caldecott)는 13명의 줄루족 흑인들을 데려와 런던에서 공연했다. 수많은 관중들이 모였고 , 빅토리아 여왕이 버킹검 궁에 이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할 정도였다. 이들은 정적인 사이드쇼가 아니라 매우 극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결혼식이나 종족간의 갈등 등 줄루족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열정적으로 표현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P.T.바넘은 빅토리아 정부에 10만불을 낼테니 영국과 줄루족간의 전투에서 생포한 케취와요(Cetshwayo) 족을 데려와 공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케취와요는 당시 줄루족과 영국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을 두 차례나 물리쳐서 영국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던 줄루족의 왕이었는데 영국군이 생포한 케취와요의 가족과 줄루족들을 데려와 공연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정부는 이들의 제안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흥행권은 다른 라이벌 업자에게 넘어갔다. 이 흥행사는 영국군에 투항한 케취와요의 세 명의 조카와 어린이들, 다른 줄루족 추장, 그리고 23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왔다. 런던에 도착하자 10만 명 이상의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고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가짜 줄루족이었다. 영국군에 생포된 줄루족은 데려오지 못하고 런던에 있던 흑인들을 줄루족으로 변장시켜 공연을 한 것이었다. P.T. 바넘은 1888년에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줄루족의 공연을 하였는데 바넘이 쓴 광고문구는 ‘ 두 사람의 진짜 줄루족’이었다.

- 칼 하겐벡의 인간동물원

미국에 P.T.바넘이 있었다면 독일에는 칼 하겐벡(Carl Hagenbeck)이 있었다. 그는 1870년대에 동물관련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동물을 포획하고 관리하는 비용 때문에 늘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동물들을 전시해서 입장료를 받는 사업을 제안하였고 하겐벡은 이 동물전시로 큰 돈을 벌게 된다. 1874년에는 실론에서 사모아인과 북유럽인들을 ‘순수하게 자연적’인 인간으로 포장하여 동물과 같이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일상용품만이 아니라 마술, 저글링, 무용 등을 포함하여 보다 오락적인 전시회를 구성하였다. 1876년에는 아프리카의 누비아족과 맹수들을 같이 전시한다. 이 전시회가 성공하자 베를린, 런던, 파리 등지로 순회전시회를 떠난다. 고정되어 있던 인간 동물원이 순회전시회를 떠난 것이다.

사라 바트만  (출처 : 구글)
사라 바트만 (출처 : 구글)

 

- 호텐토트 비너스

호텐토트 비너스는 1810년~1811년에 런던에 전시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흑인 여성의 별명이다. 당시 영국의 의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녀를 런던에 데려와 전시를 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사르티에 바트만(Saartjie Baatman) 또는 사라 바트만으로 호텐토트 족 출신이라서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그녀는 10대 후반, 백인 정찰대에게 납치되어 케이프타운으로 끌려갔다. 이후 케이프타운에서 피터 세자르라는 자유민 신분의 흑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곧 피터의 동생이었던 헨드릭 세자르의 아이를 돌보며 설거지 및 청소 등의 가사일을 했다. 이후 아일랜드인 영국 군악대원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아기는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남편도 그녀의 곁을 떠나면서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케이프타운의 군의관이자 헨드릭 세자르의 상관이던 윌리엄 던롭은 사르키(사르티에)의 고용주였던 세자르 형제에게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사르키를 영국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그곳 사람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끌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유럽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엉덩이와 전설적인 길이의 소음순을 가진 호텐토트족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유럽 여행객들과 학자들이 퍼트린 것이었는데, 이런 허풍에 찬 이야기들은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 흑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면서 그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던롭은 사르키가 “호텐토트족에 환상을 갖고 있던 유럽인들의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를 설득해 전시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어떤 아프리카 원주민도 총독의 허가 없이 케이프 식민지를 떠날 수 없다는 호텐토트 법령을 피해 이들은 런던으로 밀항했다.

1810년 5월 사르키 일행은 런던에 도착했다. 당시 오락의 본거지였던 피카디리, 이곳에서 9월 24일 드디어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가 개막했다. 이 쇼는 당시 피카디리에서 유행하던 기형쇼의 일종으로, 사르키는 하루 4시간씩 6일 동안 공연을 하였다. 그녀는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즈와 아프리카 전통 장신구를 착용하고 전통민요를 연주하거나 원주민처럼 춤을 춰야 했다.

공연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프리카에는 놀라운 몸매를 가진 호텐토트족 여성들이 있다는 소문이 런던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지만 쉽사리 실물을 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물밀듯이 공연장으로 밀려들었다. “140센티 정도의 작은 키, 숯처럼 반들반들한 검은 피부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먼 곳을 바라보는 불가사의한 표정과 보조개가 깊이 팬 하트형 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지만, 관객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거대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엉덩이와 놀랄만한 길이의 소음순을 확인하는 데 있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가 개막한 뒤 불과 하루 만에 사르키는 피카디리의 독보적 스타가 되었다. 던롭과 세자르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주말마다 그녀를 마차에 태워 런던 시내를 돌며 공연을 홍보했다. 비너스가 탄 마차가 지나가면 노점상과 거지들, 거리를 바쁘게 혹은 느릿느릿 활보하던 사람들은 그 유명한 아프리카의 우상을 보기 위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1811년 5월, 런던에서의 쇼는 막을 내렸고 사르키 일행은 영국의 지방을 돌며 박물관, 전시회, 극장, 선술집 등에서 호텐토트의 비너스 쇼를 이어갔다. 

그녀는 커다란 엉덩이와 유럽인들과는 다른 체형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 영국인들의 커다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폐쇄된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는데 몸이 아파도 협박에 못이겨 출연해야 하는 날도 있었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의 몸을 더욱 기괴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울긋불긋한 옷을 자주 입었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들에 대해 당시의 지식인들은 신문사에 이를 항의하는 투고를 하였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는 1815년에 파리에서 죽었는데, 죽은 후에도 그녀의 신체의 각 부분은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인종의 차이를 연구하는 과학연구용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식민지 전시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문물을 과시하는 식미지 전시회를 열었다. 가장 먼저 열린 것은 1879년 호주의 시드니에서 열린 전시회였는데 이는 영국이 자국의 문화를 호주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식민지 전시회가 두 차례 열렸다. 첫 번째 전시회는 1915년에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로서 일제의 통치를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여기에는 조선에서 생산되던 각종 물품과 일본의 지역특산물 등이 전시되었다. 두 번째 전시회는 1929년에 개최된 <조선박람회>인데, 일제 통치 2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조선과 일본의 각 지역 특산물을 전시하는 물산전시회였다. 두 전시회 모두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식민지 전시회는 1880년대에는 성격이 바뀌어 ‘아프리카 쟁탈전’에서 획득한 포획물들의 전시가 포함된다. 유럽제국주의의 발전상을 과시하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관객유인책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31년 파리 식민지 전시회였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특히 아프리카에서 온 동물인간들이 전시되었다. 이들은 자국의 전통공예품을 만들거나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6개월간의 전시기간동안 3천4백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 조선인 전시

인간동물원은 조선인에게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일제는 1903년 오사카에서 내국권업박람회를 개최하였다. <학술인류관>이라는 공간에 터키인, 아프리카인, 대만인, 아이누인, 류큐인 등 32 명의 동물인간을 전시하였는데 여기에 두 명의 조선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박람회가 인기를 얻자 일제는 1907년에 도쿄에서 권업박람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에 갓을 쓴 조선인 남성 한 명과 긴 치마를 입은 여성 한 명이 전시되었다. 돈을 벌게 해준다는 일제의 꼬임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썼다. ‘ 박람회장에 조선 동물 두 마리가 있는데 아주 우습다’.

기형쇼의 쇠락

19세기 미국의 엔터테인먼트에도 서열이 있었다. 서커스는 가장 품위있는 쇼로 여겨졌고 기형쇼와 카니발을 비하하였다. 그러나 이들 쇼들은 늘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신의 법에 반하는’ 천박한 오락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기형쇼는 1930년 경이 되면 크게 쇠락한다. 기형을 신비롭게 보아왔던 대중들이 오히려 위험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인데, 이는 과학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18세기부터 등장한 우생학은 기형인간은 유전자와 관련을 갖는 것이며 신체적 .정신적 불균형을 가진 비정상적 신체로 보기 시작한다. 또한 X 레이의 발명으로 인간의 신체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기형이 일종의 질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기형에 대한 신비감이 거부감으로 변하였고 사회적으로도 격리되기 시작한다. 막스 베버는 근대화의 중요한 현상으로 탈신비화 ( 탈주술화)를 꼽았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세상의 많은 현상을 신의 섭리라든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으로 간주해왔던 획일적 세계관 또는 종교적 세계관이 과학지식의 발달로 신비로운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기형쇼에 대한 사회적 비판도 강했다. 연극에 대한 반감은 매우 뿌리 깊고 강력한 것이었지만 기형쇼나 서커스, 카니발 등에 대해서도 연극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좀 더 교양 있고 품위 있는 형식의 오락을 주문하는 것은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의 공통된 비판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경쟁오락의 출현이었다. 특히 영화나 라디오 등 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새로운 형태의 오락은 기형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비에 편리하고 재미있는 합리적 오락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기형쇼의 몰락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엘리아스의 노르베르트의 말을 빌려 문명의 합리화과정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도 인류는 많은 문화현상들에 대해 왜곡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조건의 따라 달라지게 된다. 기형쇼는 지식의 축적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변화에 따라 점점 쇠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형쇼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진기명기>등의 프로그램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기형쇼의 현대적 이름이다.

기형쇼는 차이를 상업화한 것이었다. 인종의 다름, 신체의 다름 등은 모두 나쁜 것이었다. 들뢰즈는 기형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의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조푸르아와 비에르의 논쟁을 통해 기형, 즉 <괴물>이 차이의 한 양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층 전반에 걸쳐 실현되고 있는 것은 동일한 ’ 추상적인 동물‘이다. 다만 그 추상적인 동물은 정도가 달라지고 양태가 바뀔 뿐이며 매번 주변의 것들과 환경이 허용하는 만큼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다.... 인간 괴물들은 특정한 발전 정도에서 멈춘 태아들이며 그 안에 있는 인간은 비인간적인 형식들과 실체들을 위한 외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천개의 고원』, 98) .

기형쇼 문화는 인종, 젠더, 성적 혐오, 종족성과 불구같은 문제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만들어냈다. 학자들은 기형쇼가 미국인들이 비정상적 신체를 바라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한다. 19세기에 기형쇼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기형쇼가 상업화의 대상이 되고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흥행업자들이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문화현상이 만들어지는 데는 특별한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형쇼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유방식이 만들어낸 사회적 구성물이었다. 그리고 차이도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와 생산방식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다(『Freak Show』,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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