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 이야기 13, 스펙터클 2 - 철도서커스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 이야기 13, 스펙터클 2 - 철도서커스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2.1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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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국가가 철도를 발전시켰고 미국에서는 철도가 국가를 발전시켰다(『철도의 세계사』,348). 거대한 땅을 가진 미국에서 철도는 가장 적합한 교통수단이었다. 철도는 미국역사의 많은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부 대서양 연안의 대도시의 부흥을 앞당겼고 서부에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고 이민자를 운송했으며 모피사냥꾼. 카우보이. 광부. 농부들의 기업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미국은 드디어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건설과정에는 많은 노동자의 희생과 철도업자들의 부정과 횡령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철도는 국가통합의 결정적 기여자였고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촉매자였다. 그리고 철도는 철도서커스라는 독특한 미국적 문화를 만들어냈다.

 

공연예술과 교통

공연의 성공은 콘텐츠의 내용과 함께 공연환경이 중요하다.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 관객, 공연의 전통, 경제력, 다른 오락과의 관련성 등등 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러나 관객의 접근성 역시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공연이 라도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공연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 공연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브로드웨이나 라스베가스, 웨스트엔드에서의 상업적 성공 때문인데, 이는 교통의 발달로 사람의 이동이 활발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극장이 생기기 전 과거의 공연은 이동형 또는 유목형이었다. 공연자는 관객을 찾아 나서야 했다. 조선시대의 남사당패나 코메디아 델라르테 등의 유럽의 유랑극단들도 그런 예들이다. 남사당패는 정착할 곳이 없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연희집단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마을에서나 공연이 가능한 것도 아니어서 마을에서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곰뱅이를 텄다고 하였다. 일종의 공연허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개 70-80퍼센트의 마을에서는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팔도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간도지방까지 돌아다녔다고 하니 그들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다(심우성 『남사당패 연구』).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여러 가지 형식의 공연무대를 도입했다. 야외나 실내 홀 등에서 공연하거나 마차를 공연무대로 활용하는 방식 등을 사용하였다. 마차에는 숙식이 가능한 공간을 별도로 두었고 그 사이에 무대를 설치하였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도 공연하고 싶은 곳에서 마음대로 공연할 수는 없었다. 도시나 마을의 책임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고, 전염병이 돌 때는 공연을 금지당했다. 교회로부터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아 공연이 금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유층이 사는 곳을 찾아다녔다. 1857년 4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 영국의 헨리 쿡(Henry Cooke)은 하루에 한 마을씩 순회하였다. 아침에 도착하면 텐트를 치고 세트를 설치하고 공연하고 공연후 저녁 늦게 출발하는 강행군이었다. 도착하면 아침부터 홍보활동에 나섰는데, 마을주민들을 위해 행진을 하였다( 『The Circus and Victorian Society』, 21).

가부키 역시 예외없이 지방순회공연(巡業)을 실시하였다. 영국 서커스처럼 하루에 한 마을씩 돌곤 하였는데 이를 이치리바(一里場)라고 불렀다. 오랜 여정 끝에 병이 나서 도중에 돌아오거나 객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들 제아미(世阿弥)와 함께 노(能)를 집대성한 간아미(觀阿弥)는 1384년 순업도중 객사하고 말았다(『일본예능사』, 131).

 

철도서커스의 기원

18~19세기 초에 많은 미국인들은 지방에서도 공연을 보고 싶어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텔레비전도 없었고 제대로 된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같은 문화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청에 부응하여 공연단체들은 서부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공연을 위해 학교나 교회와 같은 건물을 빌리기도 하였지만 도덕적 이유 때문에 대관이 거절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이동식 극장이 유행하였는데 여기에 이용된 것이 ‘쇼보트’였다. 기차가 발달하기 전 가장 많이 이용된 교통수단은 물이었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배에 무대를 싣고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뮤지컬 <쇼보트>를 보면 배에 공연세트를 싣고 공연을 떠나는 배우들의 애환이 표현되어 있다. 쇼보트는 남북전쟁전, 1840~1850년대에 유행하였다. 주로 가족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그래야 비용을 줄이고 도덕적 이유로 공연을 비판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쇼보트에 싣고 다니던 무대는 작았고 조명은 촛불을 사용하였다. 당시 미국의 모든 엔터테인먼트는 지역을 순회하였다. 보드빌이나 서부활극은 물론이고 교육 엔터테인먼트였던 셔토커(Chatauqua)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하고 쇼를 하였다.

미국의 초기 서커스를 ‘머드 쇼’라고 불렀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서커스단이 진흙탕길을 헤치고 다니던 상황을 빗댄 것이다. 이들은 마차에 짐을 싣고 강을 건너고 진흙길을 걸어 마을과 마을을 돌았다. 그러나 짐이 무거워서 다리를 건널 수 없을 때는 짐을 보트에 싣거나 때로는 헤엄을 쳐서 건너야 했다. 머드 쇼는 날씨에 취약했고 마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로 공연자들이 쉽게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마차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공연할 곳에 다다르면 ‘차이나(China)’라고 외쳤다(Linda Simon, 『The Greatest Shows on Earth』, 102)고 한다. 중국이란 먼 나라에 가는 것만큼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머드 쇼 당시에도 사전에 선발대가 공연예정지에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날짜를 예고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교통사정으로 인해 공연이 제 날짜에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괴테의 걸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소설은 주인공 빌헬름의 연극수업과 이를 바탕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 교양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는 빌헬름이 감독으로 있던 유랑극단이 도둑들의 습격을 받아 재산상의 손해는 물론이고 신체의 상해까지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는 화재를 당하기도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순회공연단의 고투는 상당했을 것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 우기나 밤에는 이동을 못했을 것이고 도중에 강도나 도둑들의 습격도 받았을 것이다.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도 많이 걸렸을 것이고 단원이 병이라도 나면 단원교체도 쉽지 않아 공연에 차질도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지 않았고 특정지역의 관객만으로 장기공연이 불가능했던 과거에 공연단은 필수적으로 순회공연을 해야 했다.

교통은 이처럼 공연의 성패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세기에 유럽에서 문화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원인중의 하나는 철도의 등장이었다. 공연 역시 사람의 이동이 증가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미국에서 철도는 서커스의 대형화, 분업화, 전문화를 촉진하였고 이는 서커스의 산업화로 이어졌다.

미국은 1774년 투계와 경마, 모든 종류의 유랑극단이나 쇼를 금지하였다. 신생국가로서의 미국의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금지조치는 무시되었고 곧 서커스가 도입되었다. 근대 서커스는 1768년 영국의 필립 애슬리(Philip Astley)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에 서커스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애슬리의 제자였던 존 빌 리케츠(John Bill Ricketts)로서, 1792년 필라델피아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대단한 서커스 애호가로 그의 공연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변변한 서커스 공연장이 없었다. 리케츠는 서커스단을 이끌고 지방순회공연에 나섰다. 그러나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악전고투하였다. 때로는 보트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였다. 리케츠는 카리비아해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떠났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1800년에 바다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미국의 서커스가 혁명적 변화를 맞게 된 것은 조슈아 퍼디 브라운(Joshua Purdy Brown)이라는 임프레사리오의 아이디어 덕택이었다. 그가 살던 델라웨어에서는 도시에서 오락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브라운은 이를 피하기 위해 텐트극장을 생각해 낸다. 이 때가 1825년이었다. 텐트극장의 도입은 고정극장에서 공연하던 유럽과 달리 유목형 서커스가 특징인 미국적 서커스의 기초가 되었다. 1825년 이후 미국 서커스는 빠르게 성장한다. 브라운은 여기에 동물원을 결합한다. 반나체 상태의 서커스단원과 동물원이 결합하자 관객은 급속히 증가한다. 그러나 1800년대 초반의 서커스는 아크로바틱, 광대, 동물, 기마술 등으로 구성된 단조로운 오락이었다. 거기엔 거창한 행렬이나 동물원, 사이드 쇼 등의 스펙터클이 없었다. 그러나 서커스는 점점 스펙터클해졌다. 단원의 구성, 거대한 빅 톱(천막극장)의 도입, 동물원, 사이드쇼 등 많은 스펙터클들이 도입되었다. 미국의 서커스가 거대한 스펙터클이 된 것은 열차와 텐트가 결합되면서부터였다.

기차 서커스는 1830년대부터 약간의 물건을 운송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기차서커스는 1850년대가 되어서야 시작된다. 미시시피강 주변에서 활동하던 <스토운과 매디슨 서커스단>이 1851년에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철도서커스는 아직 소규모였다. 불과 두 대의 차량을 동원한 작은 규모였고, 이를 투 카 쇼(Two Car Show)라고 불렀다. 오히려 왜건 쇼보다도 규모가 더 작았다. 미국은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하는데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1869년 개통된 대륙횡단철도다. 이로써 서부개척이 더욱 활발해지고 사람의 교류가 대폭 증가하였다. 유럽의 이민이 급증하였으며 임금은 30년 동안 60% 가량 증가하였다.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커지고 오락에 대한 소비도 가능해졌다. 이 시기를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부른다. 마크 퉤인의 소설에서 따 온 용어다.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은 철도서커스를 전미대륙으로 확장시킨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당시에 대중들에게 서커스는 최고의 스펙터클이었다. 나중에 바넘과 서커스 사업을 같이 하게 되는 돈 카스텔로는 동서해안을 잇는 철도서커스를 개척하였다. 1860-70년대에 철도서커스는 점점 증가하여 많은 서커스단이 철도서커스에 나서게 된다. 1903년에 98개의 서커스단이 있었는데 이 중 38개가 철도서커스를 하였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이 1898년 뉴올리안스에 도착했을 때 지역의 신문은 이렇게 썼다. ‘ 어젯밤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가 도시의 주민들을 몽땅 뺏어가서 도시는 텅텅 비었다. 모든 사람들이 쇼를 보러 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찾으려면 거기에 가면 있을 것이다’.

1904년 위스콘신 애쉬랜드의 신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길은 기차에서 내려 서커스를 보러 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미 어제 저녁에 도착했다. 모든 공장은 휴업했고 사람들은 서커스를 보러 갔다’.

1913년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BBWW)가 아리조나의 클리프턴에 왔을 때 농부들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40km에서 70km를 달려 서커스를 보러갔다.

19세기 ~ 20세기 초반 철도서커스는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서커스가 열리는 지역에서는 상점이 문을 닫고 학교수업은 중지되고 공장도 문을 닫았다. 철도회사는 반경 70km 이내의 주민들이 서커스 구경을 갈 수 있도록 특별열차를 운행했다. 서커스는 곧 한 마을을 형성했고 서커스가 당도한 지역은 모든 일상이 중단되었다. 미디어는 이를 ‘ 서커스의 날’(Circus Day)이라고 불렀다. 관객도 스펙터클이었다. 각지에서 온 수천 명의 관객이 텐트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것도 커다란 재미였다. 서커스 기차도 스펙터클이었다. 1.5~ 2km에 달하는 거대한 기차에서 수많은 단원과 수백 마리의 동물, 거대한 장비를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을사람들의 또 다른 재미였다. 서커스는 미국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파고들어 대중들을 울리고 웃긴 가장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1900년경 450여 개의 기업이 1000명을 고용하고 있었고 1000여 개의 기업은 500-1000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1870년대 일반회사들의 직원수는 평균 100여 명 정도였다. 서커스단은 1000여 명 이상의 단원과 많은 동물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잡부까지 포함하면 1600여 명이 넘었다. 서커스단의 임금은 일반노동자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서커스 단원이나 잡부들의 임금은 일반 회사와 비슷했다. 여성단원이 주당 7달러 정도였고 남성단원은 10~15달러였다. 단원들의 수당은 등급에 따라 달랐지만 특급 공연자의 경우에는 200달러 이상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1600여 명의 단원과 잡부들에게 지급하는 인건비는 상당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당시와 지금의 환율은 약 28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특급단원의 한 달 개런티는 오늘날의 환율로 환산하면 22,000불, 원화로 2천 5백만원 정도였다.

1860년대 이후 철도서커스는 점점 대형화되었다. 그러나 바넘은 이를 더욱 확대했다. 바넘은 기차를 사람과 장비에 맞게 개조했다. 매일밤 수백마일을 달렸다. 새벽에 도착해서 세트를 설치하고 오전에 행진하고 오후에 공연하고 심야에 출발하는 강행군이었다. 철도서커스 첫 시즌에 145개의 도시를 순회하였는데 하루에 세 번의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관객수요가 많기 때문이었다. 텐트의 크기가 크다 보니 관람객들이 너무 멀어서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불만이 제기되자 두 개의 링을 설치하였다(1872년)

 

P.T. 바넘 (출처=구글이미지)
P.T. 바넘 (출처=구글)

링글링 브러더스와 바넘 베일리 서커스단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미국에는 크고 작은 많은 서커스단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랫동안 활약한 서커스단은 링글링 브러더스와 바넘베일리 서커스단( (Ringling Brothers & Barnum & Bailey Circus, RBBX)이었다. RBBX1871년부터 2017년까지 146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 미국서커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RBBX는 그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과 바넘베일리 서커스단이 합병하여 태어난 거대 서커스단이다.

 

- 바넘베일리 서커스단

P.T. 바넘은 61세 때인 1871년 윌리엄 카메론 쿠프의 권유로 처음으로 서커스단 운영에 참여한다. 이미 돈 카스텔로와 쿠프는 자신들이 만든 서커스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바넘의 참여를 설득한 것이었다. 한편 제임스 앤서니 베일리는 독자적으로 베일리 서커스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 단체는 가장 큰 라이벌이었는데 바넘은 1880년 윌리엄 쿠프와 결별하고 제임스 앤서니 베일리와 손을 잡는다.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BB)이 결성된 것이다. BB1897년부터 1902년까지 유럽순회공연을 하였다. 1200 명의 단원과 330 마리에 달하는 동물이 공연에 나섰다. 5년 동안 300여 도시를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독일의 카이저 대왕의 군대는 서커스단과 동행하면서 인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노우하우를 배울 정도였다. 11월에 런던에서 시작된 서커스는 대성공이었다. 더 타임즈는 바넘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공연이었다고 격찬하였다. 특히 그는 네로의 방탕을 그린 < 네로: 또는 로마의 파괴>라는 연극을 선보였는데 이 연극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바넘의 쇼는 몇 개월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뉴욕 타임즈는 유럽 서커스는 (미국의) 매머드 쇼에 비하면 작은 사이드 쇼에 불과하다고 썼다. 바넘은 늘 도덕적 엔터테인먼트를 주장하였다. 어린이나 여성들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도덕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공연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엔터테인먼트를 한다고 해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형쇼는 아마도 당시의 도덕기준으로는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RBBX의 서커스 기차(출처=구글)
RBBX의 서커스 기차(출처=구글)

-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

5명의 형제가 만든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은 1884년 위스콘신에서 창단되었다. 창단 전까지 링글링 형제들은 서커스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서커스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고 이런 오랜 준비를 통해 서커스단을 창단할 수 있었다.

1870년 아버지 오거스트 렁겔링은 댄 라이스 서커스단의 말 안장을 고쳐주고 수리비를 받는 대신 가족이 관람할 수 있는 서커스단 입장권을 받았다. 여덟 명의 형제들은 서커스를 보고 서커스 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형제는 링 마스터, 저글러, 기수, 염소훈련사 등이 되어 서커스 훈련을 하였고 1871년에 자신들의 작은 서커스단을 창설하게 된다. 입장료는 5센트였다. 텀블링, 공중곡예도 포함하였다. 친구들과 이웃들이 열심히 도와주었다. 1875년에는 위스콘신으로 이사하였고, 형제들은 아버지의 말안장 수리를 도왔다. 그러나 형제들은 서커스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1882년에 다시 <클래식 코믹 콘서트 캄퍼니>라는 명칭으로 다시 서커스단을 창단하였다. 겨울에는 뮤직홀에서 공연하였는데 돈을 벌지는 못했다.

1884년 봄에 양키 로빈슨이 합류했다. 한 때 성공한 사업가였던 로빈슨은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두 서커스단은 의기투합하여 <양키 로빈슨과 링글링 형제의 쇼>를 창단한다. 그리고 양키 로빈슨이 1884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링글링 형제 서커스단은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순회공연에 나섰다. 1886년에는 다양한 종류의 텐트를 구비하였고 1890년에는 다른 서커스단처럼 기차로 순회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RBBB 이외에도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아담 포포(Adam Forepaugh)<빅 쇼>는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었다. 1891년에 워싱톤 포스트는 포포 서커스단을 거기에 등장하는 동물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만으로도 신문 한 면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빅 쇼에는 동물들의 갖가지 쇼와 서부활극등이 포함되었다. 포포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쇼라는 이름을 붙였다.

RB는 자수성가하였고 가장 도덕적이고 바른 서커스단으로 포지셔닝하였다.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세상에서 가장 큰 쇼를 건설한 서커스단임을 표방하였다. 사술이 없는 성실함, 잔돈 떼어먹지 않는 정직함 , 사기꾼이 없는 사이드쇼등을 내세웠다. 지역의 경찰과 협력하여 소매치기와 도박꾼을 단속하기도 하였다. 단원들을 위한 규율집을 만들어서 행동에 유의하도록 하였다. 아무리 BB가 도덕적 오락을 표방한다고 하더라고 RBBB보다 다섯 배는 더 도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1897년부터 시작된 BB의 유럽공연은 RB에게는 도약의 절호의 기회였다. 전기조명을 갖추어 밤에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RB는 사회공헌에도 나섰다. 스페인과의 전쟁 발발시 전쟁을 지휘하던 러셀 앨저 장군에게 전보를 보내 코끼리 25마리를 지원하여 쿠바전선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말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는 코끼리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앨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RB를 알리는 전설이 되었다.

BB가 유럽에서 돌아올 때쯤 RB는 미국 최고의 서커스단이 되어 있었다. 많은 재산을 모았고 1905년에는 아담 포포 서커스단을 경매를 통해 인수하였다. BB와는 경쟁을 자제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1906년에 BB의 베일리가 사망하자 베일리의 미망인은 서커스단의 지분일부를 RB에 매각했다. 1907년에 RBBB의 주식을 샀다. 그러나 두 서커스단은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다가, 1918년에 합병하여 RBBX가 되었고 서커스계를 지배하게 된다.

1925년에 서커스 역사가인 마크 세인트 레몬은 RBBX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이렇게 적고 있다. ‘1600명의 움직이는 마을은 4 대의 특별열차로 이동하였다. 각 기차에는 20여 미터에 달하는 화차가 100대 정도가 달려 있다. 이 거대한 쇼에는 800 마리의 말과 1,000여 마리의 다른 동물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42 마리의 말. 기린.낙타 등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동물들이었다. 스리 링과 두 개의 무대가 설치되었고 이는 2시간 반 정도의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작동하였다. 중앙 링의 스타 쇼를 제외하고는 어떤 쇼도 5분을 넘지 않았다. RBBX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스타가 되는 길이었다.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으며 칭찬이 가득한 포스터를 읽을 수도 있었다.

다섯 개의 서커스단으로 구성된 미국 서커스협회(ACC)1929년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하기로 계약한 사실을 RB가 알게 된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오랫동안 RB가 공연해 온 RB의 본거지였다. 존 링글링은 그들의 행태에 격분하여 ACC2백만 달러에 매입하였다. 새로 설립하는 회사의 주식을 상장하여 차입금을 갚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뉴욕증시의 폭락으로 이 계획은 좌절되고 존은 몇 년동안 큰 경제적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나중에는 새뮤얼 굼퍼츠라는 서커스 사업자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존 링글링이 1936년 사망한 후 조카와 형제들이 힘을 합쳐 간신히 가족서커스단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들이 그 때 내건 슬로건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서커스의 도입이었다. 과거 서커스의 향수에 젖어있던 대중들로부터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서커스단은 라디오 영화 등의 발전이 초래한 대중들의 취향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스펙터클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의상과 조명 등 시각적 대상을 스펙터클하게 바꾸는 일, 무질서하게 흩어져있던 동작들을 통일된 주제하에 통합하는 일 등이 새로운 서커스의 주안점이었다. 조지 발란신에게 안무를 의뢰하였는데 발란신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하여 스트라빈스키도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는 영화와의 제휴도 이루어진다.

이렇게 안정되어 가던 RB에게 불행이 닥친다. 하트포드 기차화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56년에 빅톱 공연을 줄이고 스포츠 스타디움이나 아레나 등의 고정공간에서도 공연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에는 플로리다에 서커스 학교를 세워 1997년까지 운영하는 동안 1400여 명에 달하는 수료생을 배출하여 미국 서커스의 체계적인 운영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RBBX는 밀려오는 현대적 오락물의 공세와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2017년 폐쇄를 선언한다.

 

월렌다 가족( Flying Wallendas) (출처=구글이미지)
월렌다 가족( Flying Wallendas) (출처=구글)

철도 서커스의 스펙터클

 

초기의 서커스는 기마술이 중심이었다. 서커스를 창시한 애슬리가 기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기마술은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서서히 쇠퇴한다. 뮤직홀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초기 서커스도 기마술이 가장 인기있는 레파토리였지만 점점 쇠퇴해 간다. 대신 레파토리가 다양해진다. 공중그네, 공중곡예, 줄타기, 저글링, 광대들의 익살, 특이한 묘기들, 기형쇼 등등. 동물쇼의 경우에도 원숭이, 개 등 유순한 동물에서 호랑이, 사자, 표범 등 맹수들이 등장하고 타조 등의 조류까지 등장한다. 돼지, 쥐 등의 특이한 쇼도 있었다. 그리고 세 개의 링을 사용하는 스리 링이 도입되고 월렌다 가족, 릴리안 라이첼, 콘 콜레아노와 같은 국제적인 스타들이 나타난다.

철도서커스는 공연내용 이외에도 마을진입에서부터 공연준비, 철수까지가 모두 대단한 볼거리였다. RBBX는 자신들을 지상 최대의 쇼라고 하였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단원구성이나 동물, 1600여 미터에 달하는 기차의 크기, 공연장 설치시의 일사불란한 분업체계와 업무량, 설치와 철거에 동원되는 동물, 어머어마한 홍보물 등이 모두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1908년 위스콘신의 어느 신문은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은 75명의 요리사와 식당보조원이 매일 3200 명의 식사를 준비하고 매일 360kg의 양고기를 먹어치운다고 하였다. 관객들에게는 허허벌판이 두시간 만에 거대한 유목도시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큰 볼거리였다

 

- 기차

철도 서커스는 공연의 내용도 스펙터클했지만 그 스펙터클을 뒷받침하는 거대한 규모가 관객들을 압도하였다. 기차는 그 자체가 거대한 스펙터클이었다. 에머슨 켈리는 1917년 캔사스시에 들어오는 서커스기차를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나는 도저히 그 규모를 믿을 수가 없다. 이 공연단은 네 대의 기차에 나누어 타고 들어왔는데 마치 하나의 마을 같았다. 구두수선하는 가게도 있고 커다란 식당, 이발소도 있었다. 마치 정규 우편배달부처럼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기공장과 물을 배급하는 물차도 있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Circus Age, 37). 서커스 기차가 진입하는 장면 자체가 장관이었다. 시민들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빵 한 조각 먹고 기차역으로 나갔다. 그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서커스기차를 지상 최대의 공짜 쇼라고 불렀다. 1890년 디트로이트의 한 신문에 의하면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은 800명의 남자와 200명의 여성 아미’( BTS의 팬클럽 이름이 아미인데 RBBX의 단원들도 아미라고 불렀다)를 고용하고 있었다. 1893년에는 40 마리의 말과 조랑말, 2마리의 노새, 1 마리의 털이 없는 말, 12 마리의 코끼리, 4 마리의 낙타, 8 마리의 단봉낙타, 102대의 왜건, 55대의 화물용 마차, 22개의 대형우리(동물용), 2대의 티켓마차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차는 미국의 풍경을 바꾸었고 목가적 서커스를 거대한 산업적 오락으로 바꾸었다. 남북전쟁후 기차는 서커스의 운영방식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일처리를 신속하게 하였고 전문화시켰다. 플랫카( 객실이 없이 짐만 운반하는 기차차량)를 통한 장비와 동물, 그리고 각종 생필품의 운반이 가능해져서 서커스의 대형화, 이동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RBBX의 빅 톱 (출처=구글)
RBBX의 빅 톱 (출처=구글)

- 홍보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의 등장과 함께 홍보방식은 보다 정교해진다. 과거에는 단순히 주민의 숫자만을 중시했지만 링글링 브러더스는 계절적 요인, 당지역의 기후, 가뭄과 홍수, 추수, 공장가동현황, 금융사정, 여름리조트 등까지 세심하게 분석했다. 각 서커스단에는 전문적인 홍보팀이 있어서 공연 몇 개월 전에 현지에 가서 사전홍보를 하고 연료. 동물사료. .달걀.고기 등의 조달가능성 등을 조사하였다. 이를 선발대(advance men)라고 불렀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었다. 수천 장의 포스터를 약국이나 서점, 이발소, 호텔로비, 담배가게, 식당 등 사전에 부착허가를 받은 지점에 붙였다. (이런 방식의 포스터 부착은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대개 서점이나 악기점 등에 포스터를 부착하고 이들이 티켓 예매까지 담당하였다). 포스터를 부착하기 위해서는 풀이 필요했는데 그 양도 상당해서 6개 정도의 커다란 쇠통이 필요했다. 대개 지역당 5천장 정도의 포스터를 붙였다.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이 1893년 뉴욕에서 한 달 정도 공연을 했는데, 이 때는 27,110장의 포스터를 붙였고 인근 도시에도 추가로 8,186장을 붙였다( Circus Age, 44). 1911RBBX가 사용한 포스터는 90만장이 넘었다(The great Shows on Earth, 10). 포스터는 처음에 단색으로 인쇄하다가 나중에는 6-7 개의 칼러를 사용하여 도시의 벽면을 울긋불긋하게 장식했다. 서커스단은 막대한 홍보비를 사용했다. 포스터로 한 마을을 도배하고 나면 신문광고를 했다. 신문은 광고비를 계속 올렸지만 당시에 신문광고는 필수였다. 1896년에 링글링 브러더스는 포스터 비용만으로 128,000달러를 썼다. 오늘날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40억원 이상 되는 금액이다. 이 외에도 많은 홍보비가 소요되었을 것이니 당시의 서커스 비즈니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커스 공연에는 많은 인허가와 계약이 뒤따랐고 이를 전담하는 계약전문가가 있었다. 이들은 장소임차, 공연허가, 포스터 부착, 동물사료, 고기, 숙박, 음식 등에 대한 계약을 담당하였다. 필요하면 초대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 행진

퍼레이드도 중요한 홍보방식의 하나였다. 퍼레이드는 철도 서커스만이 아니라 변변한 홍보수단이 없던 과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사용되던 홍보방법이있다. 철도서커스의 퍼레이드는 서커스단원들과 동물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규모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19세기 초반의 행진방식은 매우 소박해서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 소수의 단원만이 행진하였다. 밴드나 동물원도 없었고 텐트도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점점 스펙터클해진다 . 1891BB의 뉴욕 행진에는 1000여 명의 단원과 400여 마리의 말, 16 마리의 코끼리와 많은 동물들이 참여하였다. 코끼리와 말, 낙타는 신나는 걸음걸이로 시민들을 즐겁게 하였다.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사람과 소리, 동물의 냄새 등이 5번가를 가득 채우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행진은 더욱 스펙터클해졌다. 공연자는 물론 말과 마차, 동물우리가 뒤따랐고 북, 손풍금, 아코디온, 비올, 플룻,호루라기 등 백여개의 악기도 동원되었다. 행진을 더욱 재미있게 한 것은 빛나는 갑옷, 자유의 여신상, 신화속 주인공의 화려한 복장을 한 공연자들의 묘기였다. 행렬이 가까이 올수록 소리는 더욱 커졌고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도로변에는 물론이고 건물 위에까지 올라가서 이 거대한 스펙터클을 구경하였다. 이 모든 광경은 도시를 흔들었다.

나중에는 아침행진을 위해 젊은 발레 걸들을 채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행렬의 맨 앞에 서고 나이먹은 여성들은 뒤에 따라갔는데 이들은 나이를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서커스단에는 코러스 걸이나 동양인 여성댄서들도 있었다. 때로는 일년에 천 명 이상의 발레 걸들을 뽑아 퍼레이드와 오프닝 공연등에 활용하였다. 행진의 거리도 매우 길어서 약 5킬로미터 정도에 달했다. 야간 행진도 벌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굉음을 울리는 트럼펫과 밴드, 포효하는 사자와 호랑이들이 거리를 돌았다.

그러나 행진은 자칫 오후공연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몇시간 동안 행진하고 나면 공연시간에 간신히 맞추거나 출연자들의 휴식시간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행진 대신에 본공연 전에 출연자들이 전부 출연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 스리 링 서커스

바넘베일리 서커스단은 1880년대에 스리 링 서커스(three ring circus)를 시도하였다. 가장 중요한 공연자를 정중앙에 배치하고 좀 열등한 공연자는 가장자리에 배치하였다. 볼거리를 최대한 늘린 것이다. 스리 링 서커스는 스펙터클을 지향하는 임프레사리오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무대였다. 또한 당시 라이벌이었던 아담 포포(Adam Forepaugh)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것이다. 상대보다 더 크고 더 멋있는 스펙터클을 계속 찾아 나선 것이다.

복수의 링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조지 생어였다. 그는 1848년부터 서커스 산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60여 마리의 말, 6마리의 사자 그리고 1860년에는 스리 링 서커스를 실험하였다. 그러나 이는 관객들의 불만을 사서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생어는 19세기 후반 유럽대륙의 가장 강력한 서커스 임프레사리오였다.

프랑스나 미국에서도 관객들은 스리 링 서커스를 싫어했다. 시각이 분산되어 한 곳에 집중할 수 없었고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다. 관객들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보기를 원했다. 스펙터클을 최대한도로 강화하여 관객을 유인하려던 방법이었지만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켜서 혼란만 초래하고 말았다.

하나의 링에서 벌어지는 서커스조차 순차적이고 질서정연한 감각으로 서커스 정보를 수용하기가 어렵다. 특별한 기예는 비록 무대에서 자주 공연되더라도 특별한 주의와 감각이 필요하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늘 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개의 링이 설치되어 있다면 감각은 완전히 분열되고 말 것이다( Semiotics at the Circus, 84).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쓰리 링 서커스는 혼란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 공연장 설치작업

잡역부들은 매일 약 62,000 미터의 천막을 세우고 약 5만 미터에 달하는 로프를 사용했다. 공연장은 132 미터 ~ 154 미터에 달했으니 축구장의 거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였고 전체면적은 보통 12,000 평 이상을 차지했다.

머드 쇼 당시에는 한 사람이 티켓도 팔고 설치작업도 하고 홍보에도 참여하는 등 업무분담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도서커스 시대에 들어오면서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일사분란하게 작업이 이루어졌다. 개인은 이름보다는 번호로 불리웠다. 수백 명의 인부들의 이름을 서로 기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차가 도착하면 90여 명에 달하는 인부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천막과 장대, 각종 짐, 의상 등을 내렸다. 짐의 운반에는 마차와 말이 사용되었고 각각의 마차는 4-6 마리의 말이 끌었다. 객석, 티켓판매 부스, 동물원 등을 설치했고 이어서 구두수선실, 분장실, 의상실, 식당 등 12개의 텐트를 차례로 설치했다. 이런 모든 작업들은 불과 2.5시간 이내에 완료하였는데 대개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 6시경에는 완성하는 일정이었다. 아무 것도 없던 허허벌판이 공연장으로, 하나의 유목도시로 바뀌는 것이다.

철거작업은 오후 8시경 공연이 시작되면 바로 시작된다. 동물원 텐트를 철거하고 공연과 관계없는 물품들은 마차에 싣는다. 공연에 참가하지 않는 동물들은 미리 철창속에 가둔다. 공연후에는 천막과 객석을 철거하는데 이 모든 작업들은 30분만에 이루어졌다. 철거작업이 완료되고 모든 단원들이 승차하면 새벽 1시 경에 다른 도시를 향하여 출발한다. 서커스단은 본공연 후에 민스트럴 등의 막후콘서트(After Show Concert)를 하였는데 관객들에게는 이보다 철거작업을 보는 것이 더 큰 스펙터클이었다. 이 작업은 마치 20세기 초반의 테일러 시스템이나 포드 시스템이라는 과학적 관리기법을 연상시키는데 오히려 그보다 먼저 시작된 방법이었다. 코끼리도 무거운 구조물을 옮길 때는 설치작업을 지원하였다.

 

- 점보

코끼리는 매우 인기있는 동물이었다. 이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서커스가 마을에 들어오면 모든 마을 사람들은 코끼리를 보러 나갔다.

점보(1860-1885)는 수단의 밀림에서 잡힌 대형 코끼리였다. 점보라는 말이 크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점보는 키가 3.23 미터에 몸무게는 6.2 톤에 달하는 대형 코끼리였다. 처음에는 파리의 동물원에 왔다가 1865년에 런던의 동물원으로 갔다. 영국에서 점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어린이들은 서로 점보의 등에 타 보려고 싸웠다. 1882년 동물원 책임자는 점보를 P.T.바넘에게 1만 달러에 팔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런던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10만 명의 어린이들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팔지 말라는 청원을 하였고 존 러스킨(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공예운동을 한 평론가)<모닝 포스트>지에 매각을 반대하는 기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보는 바넘에게 양도되어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전시되었다. 바넘은 불과 3주만에 투자금을 회수하였다. 이어서 점보는 바넘베일리 서커스단에 투입되어 1885년 캐나다로 순회공연을 갔다가 기차와 충돌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티켓판매

당시의 티켓판매방식은 80-90퍼센트가 현장판매였다. 해당 지역의 약국이나 서점 등에서 사전 판매를 했는데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현장에서의 혼란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티켓판매원은 매우 숙달된 경험자들이었다. 40분 만에 8-9천 장의 티켓을 팔았다. 19세기 이전에 쇼 수입의 상당부분은 사기로부터 나왔다( Freak Show, 86). 사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고 대중들은 잘 속아 넘어갔다. 가장 많이 사용된 사기수법이 잔돈 떼어먹기(shortchanging)였다. 이는 개인적 사기가 아니라 계산된 방식의 쇼의 경제체계였다. 많은 쇼에서 티켓 판매원은 정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를 관객의 잔돈 떼어먹기 수법으로 보충하였다.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은 걸어나가기였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잔돈을 받지 않고 지나가도록 은근히 유도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티켓 판매대를 높이 설치하고 잔돈이 잘 안 보이도록 놓아두는 방법을 사용했다. 관객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원래 지불해야 할 잔돈보다 적게 동전을 놔두는 방법도 사용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서 잔돈을 다시 계산함으로써 관객을 혼동케 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많은 관객이 몰린 입구는 늘 혼잡하였고 티켓 판매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다.

요금은 좌석에 따라서 25센트에서 2달러까지였다. 보드빌이나 벌레스크와 같은 오락은 1다임(10센트)이었던데 반해 서커스는 상당히 고가였던 셈이다. 서커스는 대개 1-2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오락이어서 대중들은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고가의 오락을 즐겼던 것이다. 농사일에 지친 시골농부들에게 서커스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축제였다.

 

서커스의 애환

1994<굿 모닝 아메리카>라는 방송프로그램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은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아니라 코끼리 조련사라고 하였다(Circus Age, 237). 동물조련사는 가끔 커서스 도중 동물에게 물려 죽기도 하였고, 동물들에게 물려 심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계속 공연을 해야 하기도 했다. 공연자 역시 말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고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일도 많았다. 어려운 것은 동물조련사만이 아니었다. 철도서커스에서는 일년내내 스탭과 단원, 동물들이 기차안에서 생활하였다. 이는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단원, 스탭, 잡부 등 1600여 명이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일해야 했다. 마치 압력밥솥같았다고 한다. 또한 늘 노동이 많았다. 작업(천막설치, 운송, 티켓판매, 질서유지, 홍보, 천막해체, 음식조리 등)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인부들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위기는 상존해 있었다. 날뛰는 맹수들, 공중그네 사고, 어린이 실종사고, 동물들의 질병, 소매치기 때로는 단원의 죽음까지 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천막을 치다가 벼락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고 폭우로 텐트가 붕괴되기도 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밖에 나와서 자야 했다. 잡역부들의 일은 서커스 공연자의 스턴트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부상을 당하기 일쑤였고 때로는 무거운 장비에 깔려 사망하기도 했다.

공연자들은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는 촉박한 일정을 지켜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아침 퍼레이드에 나선다. 점심 식사후에는 오후 리허설에 참가하고 이어서 공연을 한다. 저녁 식사후에는 저녁공연을 하고 바로 출발준비를 해서 새벽 한 시경에는 다른 도시로 출발해야 했다. 일은 많고 혹독했으며 잠이 늘 부족했다.

서커스 관람에도 예외없이 짐 크로우(Jim Crow)법이 적용되었다. 이 법은 1876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남부에서 시행되었던 인종차별법으로, 흑인들의 공공장소 출입과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악법이었다. 마틴 루터 킹의 흑인민권운동은 짐 크로우법으로 야기된 흑인차별에서 발단이 된 것이었다. 서커스에서도 흑인 관객은 별도의 차량에 탑승해야 했고 빅 톱에서도 별도의 좌석에 앉아야 했다. 매점도 백인용과 흑인용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남부에서 서커스에서의 인종분리정책은 매우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입구와 좌석에 흑인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에 비해 임금도 낮았고 승진도 제한되어 있었다.

철도서커스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1874년부터 1994년까지 120년 동안 계속 사고가 발생하였다. 서커스의 규모가 큰 만큼 사고가 나면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기차가 충돌하기도 하고 서커스 장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열차충돌사고와 화재 사고는 하몬드 기차충돌 사고와 하트포드 화재였다.

 

- 하몬드 기차충돌 사건

기차 충돌사건중 최악의 사고는 19186월에 발생한 월리스 하겐벡 서커스 사고였다. 이 서커스단은 한 때 RBBX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던 서커스단으로 칼 하겐벡이 설립한 칸 하겐벡 서커스단과 벤자민 윌리스가 만든 월리스 서커스단이 1907년에 합병한 서커스단이었다. 사고는 뒤에서 따라오던 열차가 앞서가던 열차와 충돌하여 발생한 사건인데, 무려 86명이 숨지고 127명이 부상을 당했다. 두 개의 기차로 이동중이었는데 새벽에 승무원이 졸다가 뒤에 가던 열차가 앞에 가던 기차와 부딪히고 화재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 하트포드 서커스 화재

194476일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의 RBBX 서커스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미국 화재 역사상 최악의 화재중 하나였다. 당시 8,000명 정도의 관객이 관람중이었는데, 화재가 발생하자 소방당국이 신속하게 대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캔버스 텐트가 방수를 위해 가솔린과 파라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167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는 2차대전중으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서커스 기차의 도착도 자주 지연되었고 텐트설치나 해체도 늦어졌다. 그래서 75일의 2회 공연중 1회는 취소되었다. 서커스 미신 중에는 공연을 하지 못하면 악운이 따른다는 미신이 있어서 단원들은 6일 공연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대하면서 공연에 임했다. 불은 텐트의 남쪽에서 발생하였다. 이를 본 단원이 질서있게 퇴장할 것을 부탁했지만 공연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관객들은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찾아다녔다. 그 날의 관객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들을 찾은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다.

수많은 관객이 몰리면 이를 통제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들은 흩어지고 아이들이 실종되기도 하였다. 모두가 땀에 흠뻑 젖었고 화장실은 부숴지기 일쑤였다. 지방의 건달들이 폭도로 변하는 경우도 많았다. 1892년 뉴욕에서는 건달들이 갑자기 돌과 눈덩이를 던져서 차량에 타고 있던 여성단원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남성단원들이 폭도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마을건달들은 인부들에게 싸움을 걸기도 했다. 특히 산간벽지에서는 서커스단의 도착은 싸움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커스는 미국인들이 모이는 의례적 공간이 되었다. 날씨 때문에 고생하는 일도 많았다. 폭우가 오면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였다. 아담 포포 서커스단은 1893년 사우스 다코타의 공연에서 무거운 빅톱아래 갇혀있어야 했다. 때로는 벼락이 쳐서 관객이 죽기도 하였다.

 

철도서커스와 미국문화

미국의 서커스에는 유럽제국주의와 연결된 국제주의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미국의 서커스 단원은 다국적이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중국, 인도, 일본 등 20여 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선발되었다. 사이드쇼 출연자들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출신들이 많았다. 동물들도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왔다. 동물의 조달은 국제무역이 되었다. 동물무역의 대표적 인물은 독일의 칼 하겐벡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관리들의 사냥허가를 받고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맹수와 코끼리 등을 사냥했다. 그의 아들 로렌츠 하겐벡도 동물무역에 종사했다. 동물사냥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사냥과정만이 아니라 운송과정도 매우 험난했다. 마치 17-8세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사서 노예무역을 하던 것 같았다. 사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19세기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권력자들이 식민지 국가에서 하던 오락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코끼리가, 인도에서는 벵갈 호랑이가 많이 포획되었다. 현지인들은 적은 임금을 받고 사냥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 관리들의 허가없이는 사냥에 나설 수가 없었다. 사냥은 제국주의적 통치술의 하나였다.

미국에서 초기의 서커스, 박물관, 놀이공원 등은 사람이나 동물, 수공예품 등 다른 나라나 식민지에서 조달한 이국적 문물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말경 절정에 달했던 철도서커스에 비하면 빈약한 것이었다. 1890년경까지 미국의 쇼맨들은 외국의 문물과 이국적 기형을 미국 제국주의와 국가정체성 확립이라는 목적에 맞게 활용한다. 그러나 멕시코 전쟁과 같은 침략주의적 성격을 띤 전쟁이나 내부갈등을 표출했던 남북전쟁 같은 사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서커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미국 서커스가 주로 제재로 삼았던 사건들은 미국민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타자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소재였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획득한 <루이지아나 매입>이나 서부활극(Wild West)과 같이 미국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사건들은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축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400년 전의 미대륙 발견도 서커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미국의 발전엔진을 점화하는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독립혁명(1776-1783)역시 미국 민족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쇼맨들은 독립혁명을 권위주의 대 자유를 사랑하는 자유민들의 싸움으로 묘사하였다. 독립혁명은 미국이 가장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하는계기였다.

서커스와 함께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BBWW)역시 미국 제국주의를 주요한 소재로 삼았다. 인디언과의 충돌을 문명화를 위한 불가피한 투쟁으로 표현하였다. 미국인들에게 인디언은 이방인으로서, 이들을 퇴출하는 것은 의로운 투쟁이었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 역시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중요소재였다. 링글링 브러더스 서커스단은 스페인 전쟁에 코끼리를 보내겠다고 제안하였고 BBWW의 프레데릭 코디는 3만명의 전사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BBWW는 유럽순회공연중이던 1899년 미국.스페인전쟁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이 전쟁은 식민지 정복전쟁이 아니라 진보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서커스는 미국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을 지지하였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1896년과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팽창주의를 반대하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이겼고 열렬한 팽창주의자였던 루스벨트는 1904년 선거에서 쉽게 승리했다. 또한 달러외교를 표방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1908년 브라이언을 이겼다. 많은 미국인들이 팽창주의를 지지하였는데 팽창을 1873년과 1983년의 경기침체에 대한 처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서커스가 대영 제국주의의 국가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필립 애슬리는 스스로가 전쟁영웅이었고 서커스에서도 전쟁 스펙터클을 선보였다. 많은 서커스단이 <워털루 전투><넬슨의 죽음>과 같은 전쟁 스펙터클을 공연하였다. 애슬리 서커스장에서는 1824년 매일 저녁 만석을 이루었고 몇 달만에 15만 명 이상이 관람하였는데 주로 전쟁 스펙터클 때문이었다. 그러자 코벤트 가든과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지식인들은 국가연극의 타락을 부추긴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관객을 유인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철도는 산업화의 핵심적 요인이었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마차 등을 이용하여 이동했지만 속도와 수송량 등에서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철도가 발명되면서 오지까지 물자와 사람의 운송이 가능해졌고 이는 경제발전에 혁명적 변화를 촉진하였다. 산간벽지에 있는 석탄의 생산과 수송이 가능해지고 인적교류로 소비가 촉진되고 문화의 전달과 교류가 활발해졌다. 철도로 인해 경제행위에서 거래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우유, 고기, 쌀 등 식재료의 빠른 운송으로 음식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이동성이 강화되어 사회의 변화가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도서커스는 거대한 땅과 이동에 용이한 텐트, 이를 연결하는 기차가 만들어낸 거대한 산업이었다. 철도는 많은 사람, 동물, 물자를 운송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커스 산업이 거대한 비즈니스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다. 재닛 데이비스는 철도서커스의 특징을 거대주의(Gigantism, Giantism)라고 하였는데 이 거대주의는 미국의 소비주의에도 영향을 미친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 거대한 스펙터클들은 철도서커스와 스리 링 서커스 등의 영향을 받았다. 백화점에는 거울이 설치되고 바닥은 반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성경과 사전이 지배해온 문화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압도적인 시각적 축제가 시작되었다.

철도서커스는 미국의 시간을 표준화하였다. 과거에는 도시마다 시간이 달랐다. 아침에 해가 머리위에 뜨면 교회종소리가 울리고 마을사람들은 여기에 맞추어 행동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기차의 도착시간이나 서커스의 시작시간 등을 맞출 수 없었다. 1883년에 기차운송업 종사자들은 전국의 시간을 네 개 권역으로 나누어서 시간, 공간, 장소에 대한 관념을 통일했다. 시간의식은 기차서커스의 모든 방면에 침투했다.

서커스는 전자매체의 등장 이전에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엔터테인먼트였다. 서커스는 한 나라의 문화를 반영한다. 미국의 철도서커스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의 도구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미디어였으며 미국의 제국주의를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알튀세의 용어로 교회, 군대, 교육과 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장치들)이기도 하였다. 서커스는 또한 대중들을 한 데 모아 에너지를 상승시키는 축제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철도서커스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국지적 문화를 총체적으로 연결하는 국가적 엔터테인먼트로 바꾸어 나갔다. 우리는 퍼포먼스가 우리의 의식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퍼포먼스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문화를 바꾸어나간다. 19세기 유럽이민자들은 서커스와 BBWW를 보고 미국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였다.

 

- 열차서커스의 쇠퇴

미국에서 서커스는 1930년경부터 쇠락하기 시작한다. 1903년에 98개로 정점을 찍었던 서커스단은 1956년에는 13개로 감소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도시개발로 서커스를 공연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부족해졌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강해지면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졌고 스트라이크도 빈번해졌다. 특히 고도로 위험한 작업에 시달리던 서커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잡부들은 1937년에 미국노동자 총연맹(AFL)에 가입하였다. RBBX가 고정극장으로 장소를 옮긴 것은 스트라이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RBBX1956년에 야외공연을 버리고 아레나로 장소를 옮겼다. 미국인에게 서커스는 인부들이 새벽에 일어나 쿵쿵거리는 코끼리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텐트를 치고 수많은 네트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빅 톱이 사라지자 과거의 서커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서커스의 쇠락은 서커스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 특별한 것을 독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커스 역시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미디어의 스펙터클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커스는 또 다른 변신을 해야 했다.

쓰리 링 서커스(출처=구글)
쓰리 링 서커스(출처=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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