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남사당은 아이돌그룹×태양의 서커스”
[인터뷰] “남사당은 아이돌그룹×태양의 서커스”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1.01.12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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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수 사단법인 남사당 임시회장

문진수 열두발상모춤(c)Park Sang Yun
문진수 열두발상모춤. 2014년.(사진=더프리뷰 박상윤)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남사당의 정의요? 예전의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형태적인 특징으로 보자면 ‘태양의 서커스’와 비슷한 신체기예의 종합판이지요. 남사당놀이는 악(樂)․가(歌)․무(舞)․희(戱)․기예(技藝)와 곡예(曲藝) 등이 두루 연계된 총체예술입니다. 풍물, 줄타기(어름), 접시돌리기(버나), 덧뵈기(탈춤), 살판(땅재주), 덜미(꼭두각시), 얼른(마술), 죽방울, 12지신탈놀음, 한량무 등등 총체예술의 전형입니다.

동시에 남사당은 노동․제의․민속․종교․사상 등 매우 다양한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는 ‘문화복합체’입니다.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민중예술의 성격을 바탕에 깔고 있는 거죠. 이러한 민중예술 성격과 다양한 고난도 기예를 융합시킨 전문적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단체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은 민족의 자랑입니다.”

문진수(사진:본인 제공)
사단법인 남사당 임시회장 문진수(사진제공=문진수)

최근 남사당 이론과 실기의 종합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단행본 <남사당의 덧뵈기>를 출간한사단법인 남사당의 문진수(文珍壽.50) 임시회장을 만났다. 이 책의 중요한 가치는 남사당 덧뵈기의 대본을 총수집하고 공연 버전의 변천사를 기록했으며, 남사당의 춤, 노래, 재담, 탈의 구체적 특징들을 정리했다는 점이다. 남사당 재인들의 계보 정리는 기본이고, 1990년대부터 찍었던 탈 사진을 바탕으로 의상, 소품의 제작과정까지 일일이 담았다. 규격과 색깔이 달라진 것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반영했다(더프리뷰 2020년 12월 9일자 참조).

남사당의 근본에 대한 그의 설명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특히 남사당놀이에서 춤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남사당놀이의 예술성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귀 기울여 들을만했다. “남사당놀이에서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신체표현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공연요소 구성과 연출에 따라 적절히 도입되는 춤이야말로 주제를 가시화하고 놀이를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19030년대 남사당패 사진(자료:한국민속극박물관)
1930년대 남사당패 모습(사진제공=한국민속극박물관)

즉 춤의 요소가 단순한 기술적 볼거리에 머물지 않도록, 기예에 춤동작들을 삽입함으로써 예술적 개성과 표현성, 그리고 풍자와 해학적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또한 기예에 결합된 춤의 움직임은 놀이(종목)의 활력과 개성을 표현해내면서 예술적으로 연희적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는 미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관객과 호흡하고 어울리는 공동체적 집단의식을 반영하기 위해 기교적인 춤과 해학적인 춤을 적절히 활용하지요.”

그런 점에서 문화원형으로서 남사당놀이의 춤 요소는 표현적 의미와 예술적 영역의 확장을 가능케 하며 이는 곧 문화적 감성 코드로 작용하기 때문에 춤의 요소를 다양하게 재구성하는 공연 콘텐츠로서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현 남사당 박용태 보유자와 제자들
남사당 보유자 박용태와 제자들(사진제공=문진수)

이렇듯 민족문화의 수준 높고 풍부한 요소를 담고 있건만, 민속 분야가 대부분 그렇듯, 남사당 역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인물이 드물다보니 양쪽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저작물이 별로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남사당 종목 중에서도 꼭두각시에 관한 논문은 그나마 50여 편에 이르지만 나머지, 가령 풍물이나 버나에 관한 연구는 겨우 10여 편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그가 낸 <남사당의 덧뵈기>는 매우 의미 있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남사당 교과서’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춤가락
그는 원래 대학에서 전자계산학과를 다녔지만 고교생 시절에 야학 교사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덕분에 풍물은 좀 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춤은 군대를 다녀온 후에야 인연을 맺었다.

“어느 날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무슨 음악 소리가 들려왔어요. 위를 쳐다보니 무용학원 간판이 보이더군요. 가슴이 마구 뛰면서 저걸 꼭 배워야 한단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요...”

몇 달 동안 맴돌기만 하다가 마침내 올라갔다. 그렇게 그는 23-24세부터 전라도 권번 출신 김효순(예명 김윤)에게서 승무, 살풀이 등을 배웠고 운동권 단체에서 운영하는 춤교습에도 참가했다. 이후 진도, 광주, 서울, 대전을 오가며 박관용, 양태옥, 임순자, 박정임, 송재섭, 남기수, 남기문 같은 명인들에게서 춤, 풍물, 발탈, 승무 등 여러 종목을 배우면서 연희자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남사당의 남기수 선생과의 인연으로 1994년 남사당패에 발을 딛었고, 신발이 닳아 없어질 지경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 마침내 남사당 종목은 물론 발탈, 승무, 영광 우도농악 종목의 이수자가 되었다.

문진수류 상쇠춤(국제춤축제)
2018년 10월 계룡산춤축제에서 공연된 문진수류 상쇠춤(사진=남두희)

“아무래도 대학 무용과에서 배워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 대학 무용과엘 진학했는데, 그게 전통춤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현대무용, 발레도 조금씩은 해야 하는데, 글쎄 타이즈를 입기가 정말 창피하더라구요. 게다가 제 신체조건이 꽝이거든요, 춤추기엔 팔, 다리가 짧아요. 고민하다 한 달 만에 자퇴했어요.”

하지만 결국은 다시 대전대 무용과에 진학해서 학사과정을 마쳤고, 이어 세종대, 한양대 무용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이른바 ‘학구파 실기인’이 된 것. 물론 그러면서도 현장과의 교감은 한시도 놓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현장에서 익힌 실기를 접목시키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꾸준한 공연활동과 무대 감각을 유지하는 등 현장과의 교감을 놓지 않았다.

“전통의 재창조는 무한확장” - 연희에 색을 입히다
한편으로는 전통의 새로운 수용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배운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전통을 기반으로 재구성, 재창작하는 것이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느껴졌다. 남사당놀이라고 늘 같았겠는가, 예전의 남사당은 지금과는 달랐겠지? 특히 남기수 선생은 “남사당에 제(류)가 어디 있냐? 잘 하는 게 남사당이지”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스승의 말씀은 그의 공연내용과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전통의 무한확장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을 열어주었다.

남사당 선대 예인들
남사당 선대 예인들(사진제공=남사당)

이런 생각에서 그는 전통의 답습에 머물지 않고 ‘당대적 재창조’에 몰두했다. 풍물에서 첫 박에 맞춰 발놀음을 좌우로 번갈아 시도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전통 풍물에서 발이 음악에 묶여 있는 걸 해방시킨 셈. 그런가하면 굿거리의 경우 음악이 주, 동작이 종으로 인식되지만 실제 연희에서는 몸이 주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스승인 남기수는 이 같은 시도를 인정하고 격려했으나 대부분의 전통 연희자들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비판을 가해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의 이런 재창작들이 ‘신종 교본’처럼 남들이 따라하거나 참고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전통의 복원 및 재현, 재창작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며, 그런 작품들은 곧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번져갔다. 이런 재창작품으로는 열두발상모춤, 버나놀이, 채상설장구, 상쇠춤, 소고춤, 한량무, 진쇠춤 등이 있다. 예술은 카피에 리카피다. 이러한 작업은 동일한 대상이라도 무엇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라는 물음, 그리고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하다.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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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수 채상설장구(사진제공=문진수)

예인조직 운영의 어려움
그는 2018년 12월 17일부터 남사당놀이보존회와 사단법인 남사당의 ‘임시회장’을 맡고 있다. 명함에도 임시회장이라고 돼 있다. 여기에는 예인들의 단체에서 종종 드러나는 조직상의 난맥이 숨어있다. 좋은 뜻으로 모였어도 어차피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는 생기게 마련.

2015년 3월 29일 사단법인 남사당의 임시총회에서 모씨가 이사장으로 선임됐으나, 2016년 남사당 전수자 2인이 총회결의 무효소송을 냈고 2017년 1월 18일 최종적으로 총회무효 확정판결이 났다. 무효의 이유는 "당시 총회구성 정회원이 430명임에도 대다수 회원에게 소집통지 없이 57명만 참석한 상태에서 총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사단법인 남사당은 대표권자가 없게 되었고 총회 소집자도 없게 되었으므로 민법 제63조에 의거, 법원이 대표권이 있는 이사(임시회장)로 2018년 12월 17일 문진수를 선임했다. 이후 현재까지 코로나19와 정회원의 총회 참석자 수 미달 등으로 총회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해 차기 회장이 선출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혹시라도 오해가 있으면 안되니 기사에도 꼭 ‘임시’ 회장으로 명기해 달라고 강조했다.

사단법인 남사당의 모체는 남사당놀이의 연구, 보존, 선양, 전승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남사당놀이보존회다. 사단법인 남사당은 비영리법인인 보존회에서 하기 어려운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단법인 민속극회 남사당(문공부승인 64호)은 1970년 4월 설립됐으며, 초대 이사장은 민속학자 고(故) 심우성 선생이 맡았다.

남사당놀이는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현재 회원은 760여명. 서울에 본부가 있고 지역 및 해외(일본, 미국) 지회까지 합치면 20여 개에 가까운 조직이 활동 중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남사당의 인지도나 명성은 국내외를 넘나든다. 하지만 종종 안팎으로 드러나는 고질적 병폐가 남사당의 명성에 상처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사당 창립8주년 팜플릿, 1973년
1973년 남사당 창립 8주년 기념공연 팸플릿(사진제공=한국민속극박물관)

”예인단체도 다른 조직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성을 지니고 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 흔히 ‘사람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사람 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들 말하지요. 예인들의 조직도 마찬가집니다. 결국 사람의 도리가 먼저인 것입니다. 그러면 단체는 저절로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남사당의 옛 명성의 부활과 새로운 미래의 예술성 제고를 향해 모든 남사당인이 마음이 하나로 합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동식 입체무대 ‘산대’ 부활의 꿈
“<남사당의 덧뵈기>에서도 누차 강조했지만 남사당은 생각보다 아주 오래된 정통 예술종목입니다. 신라시대에 생겨나서 임진왜란 전까지는 줄곧 융성했어요. 아울러 그 예인들은 일부에서 오해하듯 결코 백정이 아닙니다. 백정들을 임금님 앞에서 공연시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노비가 아니라 재인, 예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천민의 신분이지만 노비나 백정은 아니었다. 임금님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데 어떻게 백정이나 노비를 세웠겠는가. “조정에서 기구를 만들어 이들을 관리했습니다. 현재의 국립국악원 수준의 관청이었지요.”

그는 또 남사당이 무속을 배경으로 한 마을굿의 전승이 아니라 처음부터 궁중놀이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태생이 민속이 아니라 예술이었다는 것. “덧뵈기 마당씻이 과장만 봐도 궁중놀이의 흔적이 있어요. 게다가 탈을 쓴 상태에서 상모 돌리고 악기 연주하며 대사를 치고 소리도 해야 합니다. 이건 전문예인이 아니면 상상도 못할 기예의 수준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재정의 악화로 조정에서 더 이상 이들을 챙겨주지 못하자 나중에는 은퇴한 궁중재인들이 민간기구인 재인청을 세워서 후배 예인들을 양성한다.

1725년(영조 1년) 아극돈(阿克敦)이 그린 '봉사도(奉使圖)' 제7폭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에서의 중국사신 영접행사 연희 장면. 우측 하단 바퀴가 달린 거대한 예산대(曳山臺)의 모습과 광대들의 연행 장면. 비단에 채색, 51×40cm(북경 중앙민족대학 소장)
1725년(영조 1년) 아극돈(阿克敦)이 그린 '봉사도(奉使圖)' 제7폭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에서의 중국사신 영접행사 연희 장면. 우측 하단 바퀴가 달린 거대한 예산대(曳山臺)의 모습과 광대들의 연행 장면. 비단에 채색, 51×40cm(북경 중앙민족대학 소장)

그는 우리의 독특한 전통무대인 산대의 복원에 대해서도 깊은 집착을 갖고 있다. “산대(山臺)는 글자 그대로 산같이 생긴 무대입니다. 규모가 아주 크고 모양도 입체적입니다. 큰 산대의 경우 거대한 산을 본 떠 만든 높이 25m 짜리도 있었습니다. 보통은 높이 7m, 길이 10m, 폭 3m 정도로 수레바퀴를 달아 사람이 끌고 다니는 이동무대였습니다. 무대도 오늘날의 서양식 극장처럼 편평한 무대가 아니라 입체적 형태였어요. 동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경복궁까지 이동하면서 공연도 했구요, 여기에 역대 임금들의 경쟁심리까지 가세해 산대를 더 크게, 더 멋지게, 공연도 더 다채롭게 하려 노력했지요. 이걸 한번 복원해 보고 싶습니다.”

'봉사도'에 그려진 예산대(曳山臺)의 모습. 예산대는 수레 위에 산대를 꾸며 거리를 행진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산거(山車)라고도 불렀다. 교방가요의 침향산과 유사하다. 산대에는 낚시질하는 신선 인형, 춤을 추는 선녀 인형, 원숭이 인형, 붉은 옷을 입은 인형, 그리고 나무들과 누대도 설치돼 있고 산대 잡상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비단에 채색, 51×40cm(북경 중앙민족대학 소장)
'봉사도'에 그려진 예산대(曳山臺)의 모습. 예산대는 수레 위에 산대를 꾸며 거리를 행진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산거(山車)라고도 불렀다. 교방가요의 침향산과 유사하다. 산대에는 낚시질하는 신선 인형, 춤을 추는 선녀 인형, 원숭이 인형, 붉은 옷을 입은 인형, 그리고 나무들과 누대도 설치돼 있고 산대 잡상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비단에 채색, 51×40cm(북경 중앙민족대학 소장)

산대의 상상력은 오늘날 극장무대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의 소원대로 실제로 복원해서 공연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전통예술계는 물론 공연예술계 전반에 엄청난 기폭제가 될 것같다.

최근엔 4-5년 전부터 무리한 연습으로 인대와 연골이 손상되면서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무릎이 제대로 접히지 않아 수술을 권고 받은 상태라서 자중하고 있지만, 그래도 새해엔 그간 자신이 재창작했던 작품들을 모아 공연을 하고 싶단다. 그의 신년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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