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대구오페라축제의 <링> 전곡 공연
[공연리뷰] 대구오페라축제의 <링> 전곡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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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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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퀴레 (사진제공=대구오페라)
'발퀴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더프리뷰=대구]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 = 2022년 10월, 꼬박 1주일에 걸쳐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기념비적인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이하 링> 전곡 연주회가 진행되었다.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발퀴레 Die Walküre> <지그프리트 Siegfried>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이렇게 네 개의 오페라가 하나를 이루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독일 만하임 국립 오페라 하우스. 영국 출신의 만하임 오페라 음악감독 알렉산더 소티와 한국 출신 연출가 요나 김을 중심으로 만하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가수들 등등 200여 명의 독일 현지 팀이 만하임의 무대 전체와 함께 건너온 프로덕션이다. 올 여름 만하임에서 초연된 프로덕션으로서, 이전 만하임 <링>이었던 아힘 프라이어의 프로덕션과 직접적인 비교가 될 수 있었던 무대였는데, 마침 만하임 오페라 하우스가 몇 년 예정으로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간 탓에 이렇게 대구로 고스란히 옮겨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라인의 황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라인의 황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한국에서는 <링> 공연이 지극히 드문 경우였는데, 서울시향에서 콘서트 연주회로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 전막, KBS 교향악단이 역시 콘서트로 <발퀴레> 1막만, 2018년에는 아힘 프라이어 연출로 <라인의 황금> 전곡 정도가 무대에 올랐었고 2004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페라가 러시아 <링> 사이클을 진행한 것이 전부. 이번 대구의 <링> 프로젝트는 한국 초연이라는 타이틀은 아쉽게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독일 중심 가수진으로 구성된 독일 바그너의 오리지낼리티를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점에 있어서 초연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대구에서도 비스바덴과 칼스루에와 공동으로 제작한 바그너 오페라들을 올려왔지만 이렇게 오케스트라까지 모두 옮겨온 기획은 처음.

라인의 황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라인의 황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이번 대구-만하임 <링> 프로덕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앞서 오케스트라 사운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년부터 몇 달에 걸쳐 오페라 하우스의 음향개선 공사를 한 것이 주효했는데, 오케스트라 피트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여 9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착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홀 사운드의 컨디션이 이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살짝 낮은 피치와 다소 어두운 음색,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뉘앙스와 신속하면서도 강력한 다이내믹 레인지가 펼쳐지며 한국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바그너 사운드가 만개했다. 더불어 독일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지휘자 소디의 침착하고 정확한 페이스를 바탕으로 극적인 맥락과 표현의 정도에 따라 템포 및 디테일, 스케일을 변화무쌍하게 만들어낸 리더십 또한 빼어났다. 이렇게 성악가들의 대화 부분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주도하는 장면들 모두에서 소디가 보여준 바그너의 참다운 음향과 오페라적인 표현력에 대구 청중들은 뜨겁게 열광했다.

발퀴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발퀴레'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디테일과 완성도에 있어서 시간과 장소의 제약 때문에 작품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 김의 현대적인 연출은 지나치게 연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함몰되지 않고 이야기의 설득력과 장면마다의 몰입감을 강조한 무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금속 커튼과 이동 카메라, 악기들과 부분조명 같은 연극적인 아이디어와 악기들로 표현된 오페라적인 상징, 경제적인 무대와 영화적인 몰입감, 무대 밖까지 확장된 공간감과 암전 배경에 얹어진 세련된 스팟 조명 등등을 매끄럽고 인상적으로 연결해냈는데, 캐릭터와 장면의 임팩트를 강조하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바그너가 의도한 음악극으로서의 흐름을 무대효과 그 자체보다도 이야기의 흡인력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에서 탁월한 극장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발퀴레> 3막이나 신들의 황혼 2, 3막에서 보여준 멋진 발퀴레들의 합창 장면과 부녀의 사랑의 대비, 질투의 파국과 불멸의 정화의 대조는 실로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성악진도 대부분 훌륭했다. 레나투스 메사르의 보탄이나 요아힘 골츠의 알베리히, 하성현의 훈딩, 한국에서 기용된 캐스팅으로서 놀라운 호흡과 바이로이트 가수로서의 탁월한 발성을 보여준 전승현의 하겐 등등 저음 가수들의 활약이 어마어마했고, 에르다의 율리아 페일렌보겐과 프리카의 엘레나 코르디치를 비롯한 여러 여성 캐릭터들 또한 바그너 가수로서의 올바른 스타일과 연기를 선보였다.

지그프리트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지그프리트'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지그프리트>에서 주인공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란츠는 역전의 노장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웅적인 절창으로 손에 땀을 쥐게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대구-만하임 링의 주인공은 단연 브륀힐데 역을 맡은 다라 홉스였다. 그녀는 린다 왓슨에 비견할 만한, 소위 소녀장군 같은 고운 음색과 우렁찬 발성을 가진 소프라노로서 발퀴레부터 마지막까지 효심과 사랑, 질투와 분노, 권위와 연민을 가진 복합적인 캐릭터로서의 브륀힐데를 너무나 강력하고 인상적으로 만들어냈다. 그 무엇보다도 이 사이클의 마지막 대목인 브륀힐데의 자기희생에서 그녀가 30여분 동안 보여준 그 폐부를 찌르는 듯한 드라마틱한 가창과 상상 이상의 경지에 다다르게끔 하는 꿈결 같은 음색의 향연은 오랜 동안 청중의 가슴 깊은 곳에 전설로 남을 것임이 분명하다.

신들의 황혼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신들의 황혼' (사진제공=대구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무대, 지휘자와 가수 모두가 혼연일체를 이룬 바그너의 <링>이 언제 또 한국에서 선보일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대구-만하임 <링>이 이를 평가할 진정한 기준으로 가장 먼저 거론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바그너 <링>의 전통이 시작됨을 알린 만하임 극장 전체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이를 가능케 한 저력과 근성의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게도 진심어린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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